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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31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30장, 사도행전13장
성경낭독: 사도행전5:12-26절
설교본문: 사도행전5:12-26절
설교제목: 원수의 박해에도 교회는 보존된다.
예배찬송: 찬송280(시104), 찬송89(시31), 찬송1(시1), 찬송357(시134)
행5장 12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7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에 하나님에 대한 큰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 되는 말씀의 권위를 견고하게 세우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은 표적이요 이적으로 교회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한 두려움으로 우리로 죄의 유혹과 방종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십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재갈이 필요하고, 불순종하는 악한 행위의 팔을 꺾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단순히 무서운 공포의 역할을 하겠지만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을 더욱 신실하게 섬기도록 이끕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 일어난 표적은 일평생 하지마비로 고통 받던 사람을 일으키는 이적으로 시작하여 아나나니아와 삽비라의 즉결심판의 이적, 이어서 사람들 사이에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고, 주께 믿음으로 나오는 무리가 확대되었습니다. 12-16절을 봅시다.
1. 표적과 기사
12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교훈과 더불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의 손에 힘을 실어주셨고, 말에 권세를 더해주셨습니다.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복음의 말씀에 능력이 실렸고, 이 일로 인해서 허다한 사람들의 복음의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치료를 받았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놓여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병자들의 몸에 일어난 이적과 표적은 주님께서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시고자 하는 은혜로운 부름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거리로 메고 나왔습니다. 낮잠을 청하기 위해 사용한 작은 침대나 요 위에 뉘여서 베드로가 지날 때에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습니다. 예루살렘 뿐 아니라 인근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사도들을 만나기 위에 모여 들었습니다. 병든 사람들뿐 아니라 귀신들려 괴로움에 놓인 사람들도 나아왔고 모두가 다 나음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무리가운데서 일어난 치료의 표적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확증케 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적들은 말씀과 결코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심으로 복음을 드러내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적과 표적만을 쫓아갔다면 복음의 내용은 없는 껍데기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표적신앙이 참된 신앙이 아닌 것은 핵심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기복신앙이 허울뿐인 신앙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간과되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병 고침의 기적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실함을 보여주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12절에서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메시야를 기다렸던 언약백성들이었던 유대인 동족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야 되심을 알리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집이라는 공간이 있었지만, 함께 모이기 위해 일정한 장소를 정했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정기적인 모임이 구성되지 않았다면 교회는 지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적 모임이나 집회 없이는 보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으로만 머물러야 할 비상한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인 예배모임이 없었다면 성도의 삶을 지켜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성전과 회당으로 통해서 정기적인 모임가운데서 언약백성의 정체성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신앙 역시 교회의 모성적 돌봄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모임, 곧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는 정상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누가는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함께 교회의 질서를 지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 함께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과 질서 가운데 함께 묶여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들의 표적과 복음의 증거가 있었음에도 13절에서는 합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성령께서 복음의 말씀을 통해 믿음을 일으킨 이들은 성도의 무리에 합류했지만, 또 한 편에서는 사도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전에 체포되었던 것과 매의 눈과 무서운 권력으로 압제의 칼을 갈고 있는 세력이 두려웠던 사람들은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도들에게서 드러나는 표적을 보고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칭송했습니다.
언제나 주의 복음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은 늘 있어 왔습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연연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멍에 지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눈앞에 보이는 권력이나 사람들을 의식하여 용기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하지 않는 이상 목에 매여진 무시무시한 영적 무지의 올가미를 스스로 벗겨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와 방편들이 제공되고 반복적으로 주어지지만 의도적으로 회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은혜의 방편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도 점점 나쁜 데로 빠져들거나 이미 빠져 있는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맙니다.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은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치유되었고, 표적들을 통해서 복음을 믿는 이들과 감명을 받는 사람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솔로몬 행각에서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믿는 사람들의 수는 더욱 더해졌습니다. 위협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되셨다는 복음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담대하고 능력 있는 말씀의 선포와 이적 속에서도 사도들에게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체포될 위험에 따른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2. 투옥에도 불구하고
17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솔로몬 행각에서 전하는 복음의 설교와 이적들로 인해서 많은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회에 사람들의 수가 늘었고, 다양한 은사가 차고 넘쳤습니다.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났고 예수를 믿는 교회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 당파는 자신의 앞마당이라고 생각하고 관리하던 성전 경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시기와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증오가 끓어올랐습니다.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주님을 경배해야 할 성전 맡은 직분자들이 도리어 복음을 방해하고 박해했습니다. 참된 성도들과 주의 교회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이방인들보다 도리어 타락한 교회가 더욱 강렬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박해하고 죽이고자 했던 것처럼, 가인이 아벨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함과 같이, 로마교회가 개혁교회를 학살하고 죽였던 것처럼 거짓교회는 참된 성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벨직신앙고백서」 29항에서 거짓교회가 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불경건한 자들에 의해 경건한 성도들이 핍박을 받는 것을 허용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특정시대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 살육하거나 가두는 일들이 우리시대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개심과 증오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의 말씀대로 몸 된 교회를 이루어가는 일은 쉬운 길이 결코 아닙니다. 대립과 반대를 각오해야 하는 길입니다. 늘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할 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충실하게 순종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길이지만, 이를 순종하기 위해서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교회는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장악하고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꼭대기에 앉아 군림하고 있었고, 유구한 전통과 나름의 권리를 내세워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고, 이제는 사도들을 반대하고 박해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이들이 교회를 장악함으로 교회는 사실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통해 사탄의 회당이 되어버린 성전과 회당으로부터 신실한 교회를 분리해 내시고자 하셨기에, 이들의 박해를 허락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질투’ 또는 ‘시기’는 단순한 시기가 아닙니다. ‘젤루’라는 말로 사악한 힘을 암시하는 ‘열심’과 ‘열정’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의 분노에 사로잡혀서 참된 성도들의 압제하고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즐거워하고 광분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분노에 고삐가 풀리게 되면 폭력적인 공격으로 치닫게 됩니다. 증오와 미움이 제어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사악하고 악의적인 분노는 섬뜩한 힘을 가졌습니다. 맹렬하고 잔인한 분노를 억제하지 않고 쏟아 붓는 일을 미덕으로 여기는 악마적인 분노입니다.
왜 이렇게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박해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을까요? 왜곡된 열심의 무서움을 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전에는 알지 못하고 주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일에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본인은 옳다고 확신하고 형제의 피를 흘리기까지 부지런히 증오하고 박해하였지만, 선과 악을 제대로 분간 못하는 상태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주님이 언약백성들이 기다려왔던 바로 그 메시야인데도 말입니다. 저들을 사도들에 대해 살기가 등등하여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옥에서 풀려나게 하셨고, 복음을 다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18-20절입니다.
18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하나님께서 옥에 갇힌 사도들을 끌어내어 자유하게 하신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담대하게 원수들에 맞서되 두려워하지 말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까지 감당하라고 주신 자유입니다. 후일에 사도들은 박해 속에 죽임을 당하였는데, 주님께서 영혼을 거두어들이실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맞았습니다. 옥문을 열어 자유를 주심으로 사도들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의 바람이 불면 하나님의 소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뒤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불편이나 손해,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세우신 소명과 경주케 하신 일을 포기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열심을 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이유, 우리에게 부와 재능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포기와 도망, 자기야욕이 아니라 더욱 성도답게 주를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전에서 복음을 설교하는 일로 옥에 갇혔는데, 사도들은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설교를 멈추지 않는 일이 원수들이 알게 될 때 어떤 격분으로 무서운 보복을 행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살아도 주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기로”(롬14:8) 하였습니다. 20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복음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복음의 설교는 그저 연설이나 강의가 아닙니다. 복음의 설교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복음 안에 생명과 칭의, 양자, 죄 사함과 영화롭게 될 충만한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생명의 말씀’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영원한 구원의 일꾼이라는 말을 듣고서, 복음을 위한 그 어떤 싸움에도 더욱 담대하게 뛰어들도록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생명을 일으키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생명을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생명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정하신 복음에 대해서 우리는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위협과 유혹에도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명, 무려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공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관련된 교회의 권력자들이 다 모였고, 옥에 갇힌 사도들을 심문하기 위해서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도들은 천사들에 의해 풀려나 성전에서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합법적인 전통교회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몸 된 교회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시대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사탄의 은신처는 기괴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전통과 교회 뒤에 숨습니다. 광명한 천사로 자신을 가장합니다(고후11:14). 가면을 두르고 세련된 모습으로 교회를 박해합니다.
‘원로들’로 구성된 공회모임은 교회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모임과 공회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겉으로는 합법성과 정통의 모습을 지녔다 할지라도 가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전 맡은 자가 공회의 명령을 받고 다시 사도들을 잡으러 왔지만, 강제로 잡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을 강제로 잡고자 할 경우 큰 소란이 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순순히 성전 맡은 자들을 따라 공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통해 생명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고, 큰 무리를 이루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박해가 있었고, 사도들을 가두었어도 복음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믿는 사람들의 수는 핍박할수록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교회는 압력과 박해, 와해시키려는 도전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공동체로 보존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원수의 힘은 강하고 분노와 증오의 소리가 거세지만, 주님의 능력의 손에 의해 교회는 끝날까지 보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