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3:16-14:23, 요나단을 통하여 주신 승리, 24.3.20, 박홍섭 목사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집하고 원하는 왕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워진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그의 망령된 생각과 행동이 금방 튀어나와서 이스라엘은커녕 자기 자신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인물이 사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번제를 드린 사건과 오늘 본문은 여실히 그 사실을 확증해줍니다.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들은 사울은 여전히 블레셋의 군대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13:5을 보면 블레셋 군대의 숫자는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보병이 해변의 모래같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사는 600명이고 지원을 올 수 있는 길도 블레셋에 의하여 다 막혀 있습니다(17-18). 더군다나 그나마 있는 600명도 무기가 아니라 농기구를 들고 있는 그야말로 오합지졸과 같은 군대입니다(19-22).
이런 상황에서 사울은 기브아의 변두리 미그론의 석류나무 아래서 에봇을 입은 엘리의 증손 제사장 아히야와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어떤 왕입니까? 이스라엘이 원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왕은 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8:20을 보십시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이 원하는 왕입니다. 이런 왕을 원해서 고집을 부려서 세운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석류나무 아래 머물러 있지 않고 백성을 위하여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엄청난 블레셋의 대군 앞에서 6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기브아로 후퇴하여 머무르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이 일관되게 하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한 그들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이 어떠하냐는 물음입니다. 조금 전에는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번제를 드리는 망령된 행동을 했었고 지금은 석류나무 아래서 머물고 있습니다. 전세가 유리하면 나가서 싸우고 불리하면 위축되어 몸을 사리고 뒤에서 머물러 있는 사람이 그들이 세운 왕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한 왕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왕을 구했으니 한번 당해 보라고 하시면서 그냥 블레셋에게 당하게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사용하십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라고 합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6절에는 “우리가 이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라고 합니다. 그가 누구에게 이 말을 합니까? 자기 부하입니다.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보병이 해변의 모래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적진에 자신과 부관 단둘이 건너가서 싸우자고 합니다. 여기 요나단과 사울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십시오. 아버지 사울은 겁이 나서 뒤로 물러가 눈치만 보면서 머물고 있는데 요나단은 그렇게 많은 수의 적들이 있는 적진을 향하여 건너가자고 합니다. 건너감과 머무름의 대조가 보이십니까? 요나단의 모습은 얼핏 무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나단의 이 말과 행동을 무모한 모험이 아니라, 사울과 대조되는 믿음의 행위로 설명합니다.
다시 요나단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6절입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노라” 요나단은 우리가 저 할례 받지 않은 자들과 싸우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기 나타난 요나단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그는 먼저 이 싸움을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과 할례받은 이스라엘의 싸움임을 알았습니다. 단지 숫자의 싸움, 무기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과 언약이 없는 블레셋의 싸움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에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블레셋의 군대는 엄청납니다. 저들은 병거만 삼만이고 마병이 육천입니다. 무수히 많은 보병들의 무기도 다 철제무기, 최신식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자신과 아버지 사울 외에는 칼과 같은 무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농기구를 든 600명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과 부관 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최신식 무기와 수많은 병력으로 무장한 저들은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기 힘이 전부인 사람들입니다. 요나단은요? 무기도 없고 사람도 없지만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니 건너가서 싸우자고 합니다.
요나단의 이 믿음에 부관이 응답합니다. 7절이죠.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놀랍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요나단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겠다고 합니다. 요나단이 이 말을 듣고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600명, 수천 명, 수만 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두 명이면 됩니다. 사울 곁에 600명이 있습니다. 있으면 무엇합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요. 하나님의 전쟁에는 여호와를 향한 순전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아멘’하고 동의하는 사람, 그렇게 둘만 있어도 됩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머물러만 있는 사울과 600명이 아니라 우리가 건너가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일어나고 있는 요나단과 그의 부관처럼 믿음으로 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요나단은 부관의 말에 용기백배하여 하나님의 표징을 구한 뒤 손발로 그 험한 바위 절벽을 기어서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가 반나절 동안 이십 명의 블레셋 군인들을 쳐죽입니다. 13-15을 보십시오. 요나단과 부관이 이렇게 20명을 쳐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사 블레셋 진영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고 땅을 진동시켰기 때문입니다. 큰 떨림 앞에 1번이라고 각주가 되어 있죠. “하나님이 떨리게 하셨더라” 하나님이 떨리게 하신 결과 요나단과 부관이 20명을 쳐 죽일 수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블레셋 진영에 큰 두려움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부관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16절부터는 장면이 다시 사울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기브아로 후퇴해서 영문을 모르고 있던 사울은 파수꾼을 통해서 블레셋 군대의 진영이 허물어져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기 군대에서 빠져나간 사람을 점호하여 요나단이 무기 든 자와 함께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진영의 소동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본 사울은 제사장 아히아에게 하나님의 뜻 묻기를 중단하고 서둘러 전장에 나가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은 요나단의 믿음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요나단이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된다면 사울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수단으로만 이용합니다.
처음에는 두려워서 감히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할 마음도 가지지 못하더니 블레셋 사람들에게 혼란이 일어나자 그것을 보고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다가, 그조차도 상황이 급하면 중단하고 달려갑니다. 물론 전쟁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사울 때문이 아닙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본문의 마지막은 이날의 승리를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갔다고 여호와께 모든 승리의 원인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이 싸움에서 철저하게 요나단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는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필요 없으면 찾지 않습니다. 급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합니다. 사무엘이 늦게 왔을 때 자신이 나서서 제사를 드리다가 큰 책망을 받고도 변하지 않습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은 상황이 어렵다고 여겨질 때만 필요한 분이지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사울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요나단에 가깝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