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같은 시인의 생애가 빚어낸 진액이 주는 향기 [한 방울 고요 속으로]- 해설
문학박사·시인·평론가 황 갑 윤
이화란 시인의 시에서는 풋풋한 풀잎 향기가 난다. 새벽이슬에 내린 오솔길에서 옷자락이 젖듯 시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젖어드는 것이다. 그 특유의 섬세한 필체와 아름다운 시어들이 조용한 산사(山寺)에 든 듯 안식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현란한 수사 어나 뒤틀린 표현기교들을 사용하지 않아 읽으면 그대로 스미듯 자연스레 의미가 전달되는 작고 수수한 풀꽃을 만나는 듯 그리 편할 수가 없다. 또 이화란 시인의 시편들에선 시인 자신의 삶의 여정(旅程)과 그 속에서 체득한 지혜, 인생관, 자연관 등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책상에 앉아 서만 만든 작품이 아니라 지천명의 세월과 현실의 삶이 빚어낸 ‘진액’이 한 방울, 두 방울 모인 듯해 저절로 그 향에 취하는 것이다.
아슴한 등불 아래 투박한 탁자에 앉아 향기와 시간을 잠재운 마른꽃잎 다발을 바라본다
한때는 이슬 머금은 상큼한 꽃잎 위에 향기를 쫓아 벌, 나비 떼 날아들었으리라
옛날은 아름다운 것 되돌아 갈 수 없는 순간들이 영원으로 남기 때문이다
소박하여 나뭇잎 태우는 향기 가득한 산사의 찻집에서 추억의 쪽배를 타고 작은 노를 저으며 기억 저편으로 가고 있다 [찻집에서]-전문
시인은 산사의 찻집에 들었다. 그 곳에서 마른 꽃잎 다발을 보았다. 이제는 꽃잎의 싱그러움도, 향기도 사라졌지만 지나온 꽃의 생애를 들여다본다. 시인의 문학적 상상력은 어느새 벌, 나비 떼 날아들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불러온다. 그 꽃밭은 시인 자신의 젊은 시절이자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일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저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출렁이고 있다. 되돌아 갈 수 없는 순간들이 영원으로 남아있는 그 호수를 추억의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가며 우리네 삶은 저물어 갈 것이다. 이 시편에서는 마른 꽃다발을 통해 시적 공간을 확장하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소통의 통로를 열어주는 시인의 눈이 그 빛을 발하고 있다하겠다.
강가에 서서 바람이 흐느끼는 소리를 그대 들어 보았는가
은빛 물결 위로 머물지 못할 인연이 잎새 끝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무엇이기에 별도 달도 머물다 간 이토록 쓸쓸한 자리에 나를 붙들어 세우는가
수없이 이별을 하고서도 떠나고 보내는 일, 혼자되는 것은 정녕 두려운 일이다
한차례 바람은 지나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무수한 시간들 속에서 함께 하는 시간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갈 대]-전문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맞이한다. 모든 만남이 영원하다면 소중함도 덜할까? 아무튼 모든 만남은 반드시 이별을 동반한다. 그 시간의 많고 적음이 차이가 날뿐 다름 아니다. 이화란 시인은 이 시편에서 ‘머물지 못한 인연’을 ‘갈대 끝에 부는 바람’으로 설정을 했다. 이별을 앞 둔 그 인연이 우는 내면의 울음소리를 강가에 서서 들었다. 겪고 감당 보면 내성이 생기는 법인데 떠나고 보내는 일은 늘 두려운 일이다. 수많은 이별을 통해 얻은 자연스런 지혜는 ‘함께 하는 시간만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함께 하는 시간동안 더욱 강렬하게 껴안고, 사랑하고, 소통하기에 열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인연을 맺었다면 시인의 말대로 소중하게 그 의미를 키워나가야 하리라. 쉬이 만나고, 쉬이 헤어지는 요즘의 연인(戀人), 부부(夫婦), 이기적인 우정(友情)이 인연의 소중함과 시간의 의미를 깨우치고 그 성실성을 다할 때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성숙된 인연의 맛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이별마저도 기꺼이 맞을 수 있으리라.
적요한 내 삶의 뜨락에 용광로 불길처럼 온몸을 녹여버릴 가슴 두근거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깜깜한 내 삶에 영롱한 달빛 같은 사랑의 시 읽을 수 있는 애틋한 가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소중한 사람 있어 길고도 아름다운 고백의 시 그대 두 눈 다 젖을 때까지 읽히고 싶습니다
간혹은 새벽녘 별처럼 날 밝아 안타까워하는 그대의 뒷모습 가만히 안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도 그런가요]-전문
이화란 시인은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나이에 도달하였다. 하늘의 뜻을 분별 할 수 있는 나이라는 뜻이다. 수명연장의 실현 때문인가. 요즘에는 쉰의 나이가 그리 도(道)를 깨칠 나이는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이쯤 되면 체득한 삶의 지혜와 연륜이 주는 느긋함을 겸비하게 되는 것 같다. 지천명에 사랑이 찾아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시인은 이 시편에서 ‘가슴 두근거림’, ‘애틋한 마음’, ‘젖은 두 눈’, ‘조용한 포옹’을 갈망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연인(戀人)이 생겼을 때 자연스레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누구나 애틋한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기에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불멸의 주제가 될 것이다. 사람은 사랑을 할 때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워진다. 젊음이 가고 적요한 뜨락에 사랑이 찾아온다면 얼마나 가슴 뛸 것인가. 시인이기에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노래할 것이고 그 연인은 사랑의 시를 젖은 눈으로 읽을 것이다. 시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두 연인은 조용한 포옹을 하며 서로를 소통하는 것이다. 이 한편의 시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음미하는 듯 달콤하면서도 은근한 취기(醉氣)를 선사하고 있다.
나뭇잎이 물들어 간다 노랗게 혹은 빨갛게 가을을 채색하는 단풍은 사그라져가는 마지막 아름다움이다
바람이 불었다 옷깃 속을 파고드는 한기처럼 문득 떨어진 낙엽의 퇴색된 슬픔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누구나 시간의 태엽을 감고서 태어난다 조금씩 풀리는 시간 속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도 떠나야한다
지나온 삶의 흔적들이 세월과 함께 사라질지라도 곱게 물들어야 한다
다만 바라는 것은 무심코 펼쳐든 너의 책갈피 속 반가운 단풍잎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풍의 의미]-전문
어김없이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면 나뭇잎은 채색된 단풍이 된다. 봄, 여름을 이겨낸 연륜의 빛으로 사그라져가는 아름다움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화란 시인은 이 시에서 단풍 속에 삶을 투영하였다. 중년의 삶을 계절로 표현한다면 가을의 어디쯤 일까. 인생의 가을 속에서 곱게 물든 단풍이 어느 날 무심코 펼쳐든 책갈피 속에서 반가움으로 찾아드는 상상을 해보라. 그 책을 펼쳐든 사람이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사랑했던 연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벌레 먹고 곱지 못한 낙엽은 책갈피에 담길 수 없다. ‘아! 곱다.’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으려면 자신의 삶을 더욱 열심히 경영해야 하리라. 우리 모두는 나무에서는 떠났어도 고운 단풍으로 영원히 남아야하겠기에.
산마루를 향하는 길엔 온통 연둣빛 환희가 넘치고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내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세상살이 묵은 때 땀방울에 하나둘 씻고 가벼운 날개를 달고 나비가 되어 날아본다
진달래꽃 향기에 이끌려 분홍빛 꽃망울에 입맞춤하고 노란 제비꽃 살짝 건들고 며느리밥풀 꽃에 미소 짓는다
문득 내가 날아왔던 허공 속에 난 길을 돌아본다 짓누르던 틀을 벗어나면 이리도 자유로운 것을
녹색숨결 가득한 숲과 호젓한 오솔길을 헐떡이는 숨소리와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르는 사이 새로운 길 하나가 생기고 있다 [길]-전문
이화란 시인의 작품 [길]은 세상살이의 고달픔과 문제들이 자연의 치유를 통해 해결되는 즐거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등산을 하는 동안 세상살이의 묵은 때로 찌들어 갑갑하기만 했던 자아(自我)가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나비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유와 진리를 갈망하는 내적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그 내적 자신은 항상 ‘짓누르던 틀’에 갇혀 살아왔다. 인생을 한편의 연극에 비유할 때 사람들은 현실의 배역에 충실해야한다. 그러므로 참된 가치나 참된 자유가 갈구하는 내부의 소리를 다 따를 수는 없다. 등산을 하면 호흡이 빨라지고 전신에 땀이 흐르며 육신은 힘들다. 발바닥에 닿는 흙의 감촉이나 숲의 신선한 공기와 동화되어 가는 동안 정신이 맑아지며 지혜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간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 새로운 길 하나‘를 발견하는 심상은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자유로움과 희망이 샘솟는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운 눈빛 연적 기울어 늦은 가을비로 내리면 내 눈동자는 어두운 하늘 사무치는 별이 되어 너를 부르고 일어선다
그 무엇인가 그리운 날이면 별에 박힌 수심도 어스름도 쓸어내리고 내 눈동자에 그대를 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 밤에는 가을바람을 타고 앉아 저 하늘 한편에 사랑이 고인 그대 얼굴 그려내느니 환한 웃음에 등불을 단다
빈천지가 한 평 마련되거든 다 아 저문 가을날에 향이 그윽한 차 한 잔 나누며 노래를 불러도 들리지 않게 일생을 껴안으면서
저 마지막 한 방울 고요 속으로 아득한 정을 맺으리 [한 방울 고요 속으로]-전문
이화란 시인의 첫 시집의 제목인 [한 방울 고요 속으로]에서는 고요함 속에 그리움을 노래하는 가을밤의 정서가 물씬 느껴진다. 가을비 내리는 밤, 시인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별이 되어 그리운 이를 부른다고 했다. 별이 총총한 맑은 밤도 아니고 비 내리는 밤의 별이 된다는 것은 은근한 멋이 있다. 그 별은 동시에 그리운 이의 얼굴이다. 비록 구름에 가려있어 잘 보이지 않고 하늘에 떠 있어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대 이지만 한 평의 공간이라도 마련되는 날, 그윽한 차 한 잔 나누며 고요 속에서 아득한 정을 나누자고 기약하고 있다. 그리운 이가 먼 곳에 있든, 생을 달리했든 먼 훗날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리움을 가슴과 눈동자에 담고 살아가는 애틋함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화란 시인의 첫 시집 [ 한 방울 고요 속으로 ]에서는 유독 추억이라는 주제를 많이 볼 수 있다. 추억이 아름다우려면 매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야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과거와 미래는 실존하지 않으며 오늘이 지나가면 과거요, 다가올 오늘이 미래가 아니던가. 문학 또한 현실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자녀들을 훌륭히 길러내고 한가정의 주부로서 매일을 성실히 살며 쉰 살의 연륜에서 우러나는 지혜와 넉넉함이 밑바탕에 흐르는 이 시집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불러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끝으로 자식을 잉태하듯 산고의 고통을 통해 나온 이 시집이 속도와 경쟁으로 삭막해진 현실세계의 피곤함을 잠시나마 잊도록 하는 정신적 안식처가 되길 바라며 독자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많은 사랑을 받길 기원하며 축하의 말과 아울러 문운을 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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