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7-3
제7대 세조(이유)의 여자들
정희왕후 윤씨!
貞憙 (정희)
"곧게 기뻐한다' 는 이름이다.
보통은 정희라는 이름은
바를 正(정)에 여자 姬(희)자를 쓴다.
남편 세조가 왕에 오른 지 13년(1468년) 9월
피부병이 악화되어 세자 해양대군(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난다.
지금으로 따지면 피부암 정도일 것이다.
아마 저승 문앞에서 많은 혼백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문종과 형수님, 단종, 안평대군, 금성대군,
황보인과 김종서, 사육신들이 말이다.
(Welcome = Bienvenida)
이라고 쓴 플랭카드(?)를 들고서 진짜로
환영했는지는 나중에 가서 알아봐야겠다.
세조를 이어 아들이 예종으로 왕에 오르자
정희왕후는 뒤에서 수렴청정을 한다.
조선 왕조 최초로 대왕대비가 용상 뒤에
수렴(발 -커튼- 을 드리우는 것)을
드리우고 왕을 움직이게 된다.
그러면 정희왕후 뒤에는 누가 있었겠는가?
친정 파평 윤씨가 아니었을까?
파평 윤씨, 명문 집안이 된 것이다.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죽은
사육신과 생육신 중에는 윤씨가 하나도 없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들 사육신은 세조에게는 역적이었지만
후세에는 영윈한 충신으로 남아 있다.
내친 김에 성삼문과 박팽년의 시를 한번 보면,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랑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성삼문님
까마귀 눈 비 맞아 희는 듯 검 노래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한 줄이 있으랴.
박팽년님
두 분의 이름에다 '님' 자를 붙인 것은
조금이라도 존경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나~리 나~리 개~나리"
세조 앞에서 성삼문이 이렇게 세조를
조롱했다고 하니 참 대단한 기개를 지녔다.
성삼문 호는 매죽헌이다.
매화처럼..
대나무처럼..
향기롭고 강직하셨다.
요즘에도 저런 충신들이 있을까~~??
세조도 인정했다.
"너희들은 영원한 충신으로 남을 것이다.
비록 너희들이 나에게는 역적일지라도..."
참 멋진 말씀을 하셨다.
그래도 왕은 왕이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임금,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인지 왕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아버지 세조의 뒤를 따른다.
"긍게 왜 씰데없이 옥좌를 뺏어가지구..."
그 권럭의 단맛 좀 보려다가
자기도 빨리 죽고 두 자식도 빨리 죽었다.
"도대체 세조 무신 짓을 한겨~?"
우리 모두에게 "차카게 살라!" 라는
교훈을 진하게 보여주었다.
정희왕후, 이제 손자 성종의 대리청정을 한다.
7년 동안 치맛바람이 아닌 국정을 수렴청정을
하다가 손자 성종과 사소한 일로 틀어져
권한을 성종에게 넘겨주고 물러나는데 실은
성종이 20세가 되어 수렴청정 구실이 없어져서다.
그리고 우리 옆동네 온양의 온궁에서
노천 온천장에서 노시다가 성종 14년
(1483년) 3월에 66세로 돌아가셨다.
정희왕후, 현재는 저 천연기념물 새인
크낙새가 많이 살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에 세조와 함께 묻혀 계시다.
가장 잔인한 왕과 정희왕후!
부부금슬은 참 좋았다.
부모에게 효도도 참 잘했다.
그냥 조카 단종 잘 보살펴 주고 대우받으며
이승의 여행을 해피하게 할 수 있었는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편집자가 왜 노자 46장을 여기에 썼는지..
그리고 정희왕후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왜 부각시켰는지를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욕심!
어느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욕심으로 타인의 행복을 침해한다면,
그것은 탐욕이고 죄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한 말이 있다.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지 마래이.
그러면 언젠가는 네 눈에도
피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데이..."
내일 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