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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것이 무엇입니까(2298. 2025.3.14.삼남연회 남선교회 회장단 워크샵 설교)
히11:1-3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항상 읽던 말씀이고, 암송한 말씀이기도 하고, 수없이 들은 설교일 것입니다. 설교는 담임목사가 최고로 설교자이기 때문에 은혜는 다 받았을 것이고 오늘 부족한 사람을 불러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삼남연회 남선교회를 대표하는 이승호장로님 회장님을 중심으로 해서 각 지방의 남선교회의 대표로 섬기시는 회장님들 모임에서 어떤 말씀으로 짧은 시간에 은혜를 나눌까 기도하면서 준비했는데 저도 여러분에게도 은혜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훌륭한 사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도 원하지 않으세요. 아이큐가 높고 지식이 방대한 사람을 찾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어서 오늘 여기 앉아 있습니다. 히11장에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 믿음의 조상들이 아니라 이 속에 여러분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이 믿음이 있었구나’가 아니라 오늘은 그 믿음이 ‘내 것이 되어야’합니다. 이제는 여기모인 여러분 한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시면서 ‘여호와이레’준비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준비하시고, 일마치고는 ‘에벤에셀’ 여기까지 도우셨구나 하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1.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삼남연회와 각 지방을 대표하는 회장단이 오늘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모였는데, 세상을 바라보면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오고, 자신을 바라보면 능력이 없고 부족함이 너무 보이는 것 같고, 맡았으니 염려도 되고 걱정도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산더미 같은 파도만 바라보지 말고 그것보다 큰 예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보다 크시며, 그 분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가장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히12:2절‘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했습니다.
장로님 해바라기꽃 잘 아시죠? 해를 바라본다고 해바라기라고 한 것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면서 목을 비틀어서라도 해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는데 주바라기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바라보는대로 되어지는 축복을 말하려고 합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미래와 운명까지도 결정되는 아주 강력한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무얼 바라보아야 합니까?
① 예수님의 겸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빌2:5-8절‘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어 손해 없습니다. 이렇게 낮추신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2:9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했습니다.
②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마5:44절‘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하셨습니다.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갚아도 된다고 했지만 주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입니까?
이제 각 지방을 대표하는 남선교회 회장들이 되셨는데 오늘 워크샵을 잘하고 가면 이렇게 해 봐야겠다고 자신 있게 잘될 거야 생각하는데 여러분을 섬기며 돕는 일꾼들이 많을 것 같은데, 천사들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치 않다는 것입니다.--죄송합니다만--지랄맞은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지랄맞은 것들이 있어도 몇 명 안되니까--지랄하라고 놔두고--주어진 일에만 열중하면 잘 돌아갑니다. 회장 되었을 때 마음껏 해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마11:28-30절에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런 주님이셨기에 어떤 죄인도 어떤 병인도 어떤 고통을 가진 자라도 다 예수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얻었듯이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③ 예수님의 기도하는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눅22:39절‘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여기 ‘습관을 따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삶이 어떤 것이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삶은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낮에는 전도하시고 밤에는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주기도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선택을 하실 때는 더 많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를 선택하실 때와 십자가를 선택하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밤이 맞도록 하셨고,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일을 추진하라는 것입니다.
④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바라볼 것이 많습니다. 구원받는 것을 바라보고, 영생 얻은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을 바라보고, 하늘에서 상급 받는 것을 바라보고, 병 치료받는 것을 바라보고, 복 받을 것을 바라보고, 행복할 것을 바라보고, 변화될 것을 바라보고, 내가 하는 일들이 잘 될것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히11:1절에 보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절에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로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했습니다. 뭘 경고 받았습니까? ‘내가 세상을 심판하겠다. 너무 타락했어요. 너무 우상섬깁니다. 너무 종교 가운데 있으니까’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세상을 다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이 경고를 받았다는 겁니다.
오늘 노아가 경고하심을 받아 믿음에 따른 의의 상속자의 말씀을 따라 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곧 힘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곧 힘입니다. 그 영적인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2년동안 사명 감당하는데 다 보인다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안보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이 실상으로 증거로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목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직임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히12:2절‘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소원을 이루게 됩니다.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늘에서 상급을 받습니다. 영육이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일 뿐 아니라 구주이시며 또한 우리의 나아갈 모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과 삶을 본받아 가장 아름답고 복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축원합니다.
2.성경 속에는 바라보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①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저렇게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13:14-18절‘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했습니다. ‘보는 만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것이 곧 그가 소유할 땅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창12:1-3절에 주셨던 약속보다 더 구체적인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신 것은 지금 아브람이 서 있는 그곳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보자 그곳은 기름진 땅이 따로 있고 척박한 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소망이 가득한 땅으로 아브람에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본 단락에도 ‘내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15, 16).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에 대해 스스로 보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그 땅을 두루 다니며 약속의 실체를 확신하게 하십니다.
② 야곱이 바라보게 한 것이 있습니다.
야곱은 나뭇가지에 무늬를 만들고 그것을 보게 함으로써 양들이 그 모습대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창30:37-40절‘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했습니다.
이는 바라보는 것이 실제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다리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들을 가져다가 껍질을 벗기는 방식으로 흰무늬를 내어 양떼들이 늘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둠으로써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가축 떼가 물을 먹으러 왔다가 교미할 때 알록달록한 가지를 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들이 우리의 현실로 나타도록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바라건대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만 말고, 오히려 날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로 준비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무얼 보고 있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듯이 삼남연회를, 내가 맡은 지방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고, 내가 섬기는 지역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회장장로님을 생각해서 이 말씀에 물질에 축복이 잇을줄 압니다. 행사하려고 하면 잠깐 살펴보니 8천정도가 협찬금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만큼 물질이 필요한대 어찌할꼬 하지말고 정해놓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밀고 나가면 바라본대로 될줄 믿습니다. 지난회장님 배덕수 장로님은 광고협찬을 많이 받았는데 그 찬스도 사용하시고 하면 걱정없을 것입니다.
③ 모세를 통하여 보라고 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출14:10-31절 말씀에‘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도중 많은 원망과 불평을 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홍해 앞에서의 불평인데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애굽에서 죽어 거기서 장사되게 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광야에서 죽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라는 말로 그들을 달래 놓았습니다.
‘싸우시는 일을 보라’고 했습니다. 출14:14절‘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말입니까. 애굽의 군사와 아니 바로와 싸울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애굽인들은 군사와 무기가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무기도 없고 훈련된 병사도 없어서 전투 불능 상태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싸워주시겠다는 희소식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와 같이 싸우시는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시118:6-7절‘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홍해 가르시는 일을 보라’고 했습니다. 출14:21절‘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하였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능히 해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홍해에 빠져 죽느냐 아니면 애굽 군사들에게 잡혀죽느냐 진퇴양난인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을 행하셔서 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본 것입니다. 그 어찌 놀랍지 아니하며 감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애굽인들이 죽는 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출14:26-28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했습니다. 기세 등등하여 천하를 호형할 것 같이 안하무인격으로 기고만장하던 바로의 군사들은 보기 좋게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광경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출14:30-31절‘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의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서 두려워할 때, 모세는 하나님을 믿고 바다를 향해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그의 바라봄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④ 여호수아가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수6:1-11절‘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리고는 사해에서 북쪽으로 12km, 요단에서 서쪽으로 9km, 또 예루살렘에서 동북 방면으로 약 30km지점에 있는 도성이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당시 여리고 성의 넓이는 대략 8에이커(1에이커=약4평방킬로미터)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므깃도의 14에이커, 라기스의 18에이커, 특히 하솔의 200에이커에 비하면 작은 도시 국가이지만,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의 평균 도시 크기에 해당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읍 규모에 비하여 여리고 성의 비중은 매우 컸습니다. 즉 여리고 지역은 좋은 샘들을 가진 ‘오아시스’지대였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개발된 고대 도성으로서 ‘종려의 성읍’(The city of palm trees)으로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요단 대평원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여리고 성은 그 전략적 위치상 매우 중요한 가나안의 방어 거점으로서 군사 요충지일 뿐 아니라 가나안 중부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군대가 가나안 도시 국가들의 남북 연합 작전을 미연에 차단하고 가나안 정복의 주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리고 성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은 직접적인 군사 작전으로서는 거의 공격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천연 요새였습니다.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여리고 성은 적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 밖으로 3-4m 높이의 석조 장애물을 설치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본성의 중앙 벽과 약 35도 각도로 경사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파르고 미끄러운 경사지와 여러 방해물 때문에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접근하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으로써는 장기간의 포위 작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게되면 오랜 기간이 지체되어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이 연합하여 반격할 기회만을 줄 뿐 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여리고 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는 작전을 구사했고, 이미 그 과정에서 다른 족속들의 원호를 약조해 놓았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군대에게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서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사람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기묘한 전략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전략의 핵심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어떤 사람도 어느 무엇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수종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전쟁을 하라고 하시면서 사실은 자신이 다 일하고 계십니다. 견고한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이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식을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공략하겠다고 했다면 그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약궤는 여리고성을 도는 행진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행진의 모습이었습니다. 앞과 뒤에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그 중심에 당당하게 행진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상상해 봅니다. 우주의 중심이 이 시간 이곳에 집중되어 운행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렇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소곤거리지도 않고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불평도, 섣부른 환호도 모두 잠재우고 다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침묵하며 따라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순간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때론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불평이 없어야 하고, 또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어떤 자랑질도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섣부른 기쁨을 노래함도 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로써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과정을 통하여 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숙하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훈련을 강도높게 이스라엘 모든 백성 남녀노소가 다 동참하여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지혜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전략은 ‘말씀대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백성들은 또한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순종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거두는 조건이었고, 또 패하게 되는 조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까지의 시간에서 침묵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러한 훈련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250여만의 무리들, 60만의 장정들이 조용히 숨죽이며 일주일의 시간을 보낼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상해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며, 침묵하여 그 과정을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혜이고 또 은혜임을 믿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기다립니다.
⑤ 앉은뱅이가 바라본 것입니다.
행3:1-5절‘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했습니다.
오늘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을 하는 걸인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성전 문 앞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성경의 3절에 보면 ‘에이도’(to see)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기는 보는데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베드로 사도가 그의 시각을 고쳐줍니다. 4절의 ‘보라’고 할 때 베드로는 헬라어로 ‘블레포’(look at)라고 합니다. 집중해서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에게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또 구원하신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그의 이러한 바라봄이 새롭게 고쳐지고 나니 그의 평생의 짐이었던 육신의 질병도 일시에 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바라보아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바라보는 대로, 삶이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시각을 고쳐줌으로 그의 다리까지 낫게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바라보는 시각과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마음을 놓치지 마시기 기도합니다.
⑥ 엘리사 이야기입니다.
영의 눈을 뜨면 불말과 불병거가 보입니다. 왕하6:8-17절 설명하면 환경과 처지는 동일한데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엘리사 활동 당시 북왕국은 아합의 죽음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북방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해 오던 아람(시리아, 수리아)의 잦은 침입으로 이스라엘이 곤욕을 치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가 있던 시기에는 아람의 군대가 백전백패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8-17절,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아람 왕의 전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려고 많은 군대를 보냈습니다. 아침에 엘리야의 사환이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아침에 엘리사를 수종드는 종자가 일어나 나가보니 아람의 말과 병거가 성을 둘러 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엘리사에 고하되 ‘아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같은 장소 같은 문제 같은 환경에 있었던 엘리사는 어떠합니까? 엘리사는 왕하6:16절‘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하고 왕하6;17절에 사환의 눈이 열리도록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했습니다. ‘육의 눈’으로 본 사환은 도단성을 둘러싼 아람 군대를 보았습니다. ‘영의 눈’으로 본 엘리사는 도단성을 둘러싼 천군 천사를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영의 눈을 활짝 열고 각자에게 주어진 회장직을 잘 감당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열고 보면 무엇을 볼 수 있는가?
18-19절, 이어서 곧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게 되자, 엘리사는 또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대로 그들의 눈이 어둡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을 잡으러 온 아람 군사들을 속여 사마리아로 데리고 갔습니다.
20-23절, 사마리아로 가서 그들의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그들이 눈을 떠보니 사마리아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엘리사는 그들에게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게 해서 놓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하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의 땅으로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떠져야 합니다.
영의 눈을 열고 보면 비젼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울밑에 핀 작은 꽃 한 송이를 보고도, 궁궐 같은 저택에 사는 사람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근심 걱정 하나 없는 마음이 부자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비록 가진 재산은 없었지만, 단지 그가 더 높은 것은 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세계를 정복한 씨저보다 위대하고, 솔로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은 더 높이, 더 멀리, 더 깊이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인 눈을 감고, 육적인 눈을 떠서 세상을 보니,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내 저금통장의 동그라미를 세어보니 남의 것보다 적어서 가난하게 생각되고, 내 집이 남의 집보다 좁아서 내 자신이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을 열어서 다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바꿀 만큼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나는 천국을 소유할 만큼 큰 부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강하고 무한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나를 둘러 보호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해 보여도 저들 보다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는 자 같으나 늘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하는 자 같으나 늘 성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자 같으나 위대한 자들입니다. 영안을 열어서 세상을 보면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안을 열고 앞을 보면 무한한 가능성의 비젼을 볼 것입니다.
영안이 열린 자는 무한한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한국에 천만 명이 넘는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진실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나님께서 내 가까이 계셔서 나를 돕고 내 삶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이 믿음 위에 굳게 선 성도는 얼마나 될까?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질병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실패로 우겨쌈을 당하고 낙망과 좌절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어도 영안을 열고 보면 나를 불 말과 불 병거로 둘러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능히 승리하시는 연회 남선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바라봄의 법칙의 핵심 원리는 무엇입니까?
보는 것이 믿는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을 보며 자손의 번성을 믿었듯이,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현실이 아니라, 약속을 바라봐야 합니다. 홍해 앞의 모세처럼, 눈앞의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결과를 믿고 바라볼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을 믿고 돌았듯이, 현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볼 때 불가능이 가능해집니다. 믿음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실상이며 증거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 말씀하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히11:1절‘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우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대적도, 어떠한 난관도, 어떠한 재난도, 어떠한 사고도, 능히 물리치고 승리하여 직임을 잘 감당하게 될줄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각지방에 가서 무엇을 바라보며 일하든지 간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시작하시겠습니까? 바라본대로 닮아가고, 바라본대로 얻어지고, 바라본대로 변화되고, 바라본대로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말씀에는 늘 순종하여 하나님이 일 할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삼남연회와 각 지방을 바라보시고 바라본대로 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통성기도
주여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주여 믿음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