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필드 피터스" (Pieters, Eva Field, 1868-1932) 여성 의료선교사
"에바 필드 피터스"
1868년 미국 아이오와 "디모인"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보험회사에 다녔다.
그러나 의료선교사가 되려고 1893년 다시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1897년 10월 14일 미국 북장로회 여성 독신 의료선교사로
한국 간호사의 대모로 불리우는 "에스터 쉴즈"(Esther L. Shields)와 함께 내한하여 같이 일했다.
당시는 남자 의사가 여자 환자를 돌보는 것을 금기시 했던 때라 "에바 필드" 여의사는 큰 의미가 있었다.
1898년 11월부터 "제중원"(濟衆院)에 부녀과(婦女科)가 생기면서 여성환자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다.
그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1908년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와 결혼했다.
*참고 : "에바필드 피터스"는 "알렉산더 피터스"의 두번째 부인이다.
첫번째 부인은 " 엘리자베스 C. 피터스"(Elizabeth Campbell Pieters)로 그녀 역시 양화진(A30)에 잠들어 있다.
그 후 이들은 10년 간 황해도 재령(載寧)에서 기독교 교육과 의료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에바 필드" 선교사는 "한국어판 찬송가"와 "수학 교과서"를 편찬한 공적이 있다.
"리차드"(Richard)와 "루벤"(Reuben) 두 아들을 낳아,
그 아들들은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22년 선천(宣川)으로 가서 한국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한국어판 찬송가도 편집하여 발행했다.
그러나 불치의 암으로 인하여 그가 봉직했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1932년 7월 20일 64세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비문에는
"ASLEER IN JESUS" (예수님안에 잠들다)
라고 간단히 씌어있다.
그의 남편 "알렉산더 피터스"는 1932년 “에바 필드 추모사업”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치과 수술실을 마련했다.
"피터스"부부와 두 아들 "리차드"(Richard)와 "루벤"(Reuben).
1890년대 한국교회 성도들은 세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찬미가"는 1892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발간한
가사 위주의 찬송가로 1902년에는 207곡까지 증보됐다.
"찬양가"는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117곡의 악보를 포함해 편집, 출판한 "찬양집"이었다.
"찬셩시"는 1895년 장로교 선교사들이 54곡을 엮어 출판했고
주로 서북 지역에서 사용되다가 1902년 "장로교 공의회"에서
공식 찬송가집으로 채택한 후 1905년 137곡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분산된 찬송가들을 하나로 통일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 결과 1908년 "찬숑가"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교파의 외국 선교사들은
교파 및 선교부 간 연합과 협력을 위해 협의체 조직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장로교, 감리교 연합 기관이 "개신교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
(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였다.
1905년 선교연합공의회는 첫 사업으로 연합 찬송가 제작을 결의하고 "찬숑가" 편찬에 착수했다.
편집위원에는 감리교 "벙커" 선교사, 장로교 "안 애리"(Annie Laurie Baird) "민 로아"(F. S. Miller) 선교사가 선정됐다.
1906년 제2차 연합공의회에서는 기존 찬송가를 토대로 개정하되 존경어를 사용하고
구조는 명확하며 교리에 부합하는 내용을 수록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그렇게 해서 1908년, 한국교회 최초 연합 찬송가인 "찬숑가"가
가사판(262곡)으로 발행됐고 이듬해에는 악보판도 출간됐다.
"찬숑가" 서문에는 교회 연합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혀두었다.
“노래는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넘쳐 저절로 소리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마음을 같이하며 기운을 화평하게 하고,
한 곡조로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감리회에서는 "찬미가"를, 장로회에서는 "찬셩시"와 "찬양가"를 불러왔기에,
양 교회 신자들이 함께 예배볼 때 서로 다른 찬송가로 인해 온전한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기회를 주셔서
두 교단의 노래를 합하여 "찬숑가"라는 한 책을 만들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참 아름다운 찬송집이다.”
악보판 ‘찬숑가’ 제작비는 " 알렉산더 피터스 "(Alexander A. Pieters)선교사 개인 돈으로 전액 충당됐다.
"피터스" 선교사는 1898년 시편을 번역한 "시편촬요"를 출간했다.
"시편촬요"는 시편 전체 150편 중 62편을 골라 우리말로 번역해 출판한 것으로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었다.
"시편촬요"를 시작으로 1938년 "구약개역성서"를 완간하기까지
"피터스" 선교사가 한국 선교 역사에 구약성경 번역을 위해 헌신한 업적은 대단하다.
"피터스" 선교사의 주된 사역은 성경 번역이었으나
찬송가를 특히 사랑했기에 "찬숑가" 제작에 큰 힘을 보탰다.
"찬숑가, 1908"은 "무곡판"으로 출판했지만,
"곡조 찬숑가, 1909"는 출판 비용이 엄청나 포기 직전이었다.
"피터스" 목사 부부는 사재를 털어 전액을 부담해 초판 5,000권을 출판했고,
계속해서 4판까지 9만 권을 인쇄했다.
실제로 "피터스" 목사 소장 초판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4판 뒷면 저작권 표지에 보면
"지은이: 조선 평안북도 선천군 "피터스"(피득) 목사,
발행인: 영국인 서울 종로 "반우거"(G W Bonwick)로 인쇄했다."
"이는 왜인들의 출판 금지 압력을 피하기 위해, 저작권은 "피터스" 목사가,
발행권은 "반우거"(G W Bonwick) 선교사가 보유한 형태로 한 것이다."
"찬숑가"는 판을 거듭하며 최종적으로 1942년 판에는 317장으로 증보됐고,
감리교의 "신정찬송가"(1931)와 장로교의 "신편찬송가"(1935)가 나오기까지
20년간 두 교단이 함께 사용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하나의 찬송가를 제작한 이 시도는 한국교회 전 교단이
"통일찬송가"(1983)라는 한 권의 찬송가를 사용하게 된 밑거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찬숑가"에 수록된 곡들은 가사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통일찬송가"와 "21세기 새찬송가"에 다수 포함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이처럼 "찬숑가"는 한국 찬송가 발전에 있어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이 맺은
성공적인 결실이자 후대에 교회 연합의 열매로
찬송가집이 탄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찬숑가, 1908"은 "무곡판"으로 출판했지만,
"곡조 찬숑가, 1909"는 출판 비용이 엄청나 포기 직전이었다.
"에바 필드 피터스" 여사(Mrs. Eva Field Pieters, 1868–1932)는,
음이 높아 부르기 어려운 곡들은 한두 음 낮게 이조(移調)하여 새 악보로 출판했다.
"피터스" 목사는 찬송가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피터스" 목사는 1872년 남부 러시아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의 "김나지움"(Gymnasium)을 졸업 후 독일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히브리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구사했으며,
호주나 미국으로 이주하려다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미국 선교사를 만나 1895년 4월 7일,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일본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 목사의 권유로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5년 5월 16일 조선 땅에 첫 발을 디뎠다.
이름을 "피터스"에서 "피득"(彼得)이란 조선이름을 얻었다.
당시 구약성서는 한국어로 단 한 줄도 번역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피터스"는 히브리어 원문을 기반으로 시편 절반 분량을 번역,
한국인 선교사들의 감수를 받아 1898년 "시편촬요" 출간에 성공한다.
이 책은 8년간 유일한 한국어 구약성서로 사용되었다.
1926년, "피터스"는 구약 개역위원회 평생회원이 되어
김인준, 남궁혁, 이원모 등과 함께 구약성경 번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938년, 국역 구약개역성서를 완간했다.
이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한 성경으로,
세계 성서 번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