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하루 남았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라호르 가는 길이 376킬로미터로 다소 멀긴 하지만 고속도로여서 걱정은 없다. 8시 반. 파키스탄 기념비를 보고 떠나기 위해 서둘렀다. 버스가 신호를 받기 위해 잠시 멈췄는데 멀리 주유소의 가격표가 보인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어제께 주유하면서 보았던 연료가격이 하룻밤 새 폭등을 한 것이다. 어제는 분명 칼텍스 주유소의 디젤이 337루피(휘발유 322루피)였는데, 오늘 가격표는 521루피(휘발유 459루피)로 바뀌어 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디젤가격이 1,854원에서 2,866원으로 뛴 것이다. 어제 만당으로 넣었어야 했는데. 기념비는 디자인이 독특했다. 대체로 어느 나라이든지 모뉴먼트는 오벨리스크 형식을 취한다. 4개의 꽃잎이 바닥 한가운데에 있는 피라미드 조형물을 감싸 안고 있다. 흰 무늬를 새긴 갈색 꽃잎들은 꼭대기에서 날카로운 끝을 안쪽으로 모아 서로를 향해 오므리고 있다. 그러니까 가운데 아래 검은색 조형물이 더욱 더 보호를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오늘 아침 이슬라마바드 회담 소식을 전하는 뉴스 화면에 기념비가 비쳤다. 나는 그때 당시는 솔직히 기념비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가운 마음이 든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이렇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또 이렇다. 드디어 라호르까지 행진을 시작한다. 버스가 M2 고속도로에 접어들더니 빗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한질주를 시작했다. M2는 이슬라마바드와 제2의 도시 라호르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이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파키스탄-인도 국경에서 연출되는 경비교대식 관람이다. 교대식이 오후 5시에 시작되고, 주차장에서 식장까지 솔찬히 걸어가야 하므로 여유 있게 도착해야 한다. 점심은 차 안에서 아침에 싸온 과일 도시락을 먹었다. 가이드가 휴게소에서 사온 란을 한 장씩 나눠주었으나 식어버린 란은 입맛을 돋우지 못했다. 그런데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국경교대식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버스가 PSV 체크포인트에서 멈췄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나운싱이 없어 답답한 가운데 현지 가이드들이 빗속을 분주하게 오간다. 나는 당시 PSV의 의미는 몰랐지만 체크포인트라는 단어가 조금 걸렸다. 나중에 알게 된 PSV는 대중교통차량(public service vehicle)의 약자였다. 20분 이상 지체한 뒤 겨우 출발을 했는데 금방 그 이유를 눈치 챘다. 얼마 안가 S자 급한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경찰차량이 10여대의 버스 대형을 선도한다. 버스들은 경찰차량의 보호 아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서행을 계속한다. 시속 30킬로? 그 정도로 느림보 운행을 계속한다. 사고다발지역에 대한 안전조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승용차는 단독으로 쌩쌩 잘도 달린다. 버스가 라호르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바로 국경방향으로 향한다. 어느 지점부터는 담장이 양쪽 도로변을 막고 나선다. 국경통제구역에 들어섰다는 신호다. 3시 반 주차장 도착. 이슬비로 바뀌었다. 나는 비를 맞다가 일행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하면서 걸었다. 관광객보다는 내국인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성문 형태의 구조물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스타디움이 나온다. 맞은 편 철창을 친 국경 너머에 인도 스타디움이 보인다. 인도의 만장의 관객들이 질러대는 함성소리가 텅 비다시피 한 이쪽으로 넘어온다. 거대한 쓰나미가 덮쳐오는 듯하다. 당장에 파키스탄과 인도의 인구 차이, 국력 차이가 느껴진다. 교대식 명칭도 다양하다. 와가 지역 국경에서 벌어진다고 해서 보통 와가보더(Wagah Border)로 부르는데, 치고 빠지는 작전(Beating Retreat Ceremony)이나 입구 안내판에 쓰인 명칭처럼 국기 하강식(Flag Lowering Ceremony)으로도 부른다. 우리는 일찍 도착한데다 관람객이 별로 없었으므로 관람석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인도의 인파는 참 대단했다. 비가 오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많이 모였을까? 그런데 소리는 왜 질러대나? 그래서 미리 나와 몸을 푸는 파키스탄 병사들에게 괜히 소리를 질러 응원을 한다. 나도 분위기에 휩싸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국경 철창을 열고 양국의 경비병들이 한쪽 발을 들어 올리며 위세를 떨치는 퍼포먼스는 하지 않았다. 각자 자기 영토 내에서 자기 식의 독특한 교대식을 연출한다. 30여분 동안 진행된 교대식은 흥미롭게 끝났다. 저녁식사를 위해 시내의 파키스탄 식당으로 갔다. 식당 앞 도로는 자동차의 파도와 클랙슨 소리로 소란스럽다. 다시 비가 시작되었다. 비로 반질반질해진 아스팔트 도로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아 검게 빛나고 있다. 그랜드 밀레니엄 호텔이 파키스탄에서의 마지막 숙소다. 송경희가 단톡방에 아스피린 광고를 냈다. 나는 목 상태 때문에 아스피린이 필요했다. 가져온 것은 룸메이트 목감기에 모두 투약하고 없다. 401호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간 문을 두드렸다. 그가 효과 직방이라며 액상 아스피린을 권했다. 그때 YMK는 화장실에 있어 보지 못했다. 나는 500미리 정제 두 알을 받아왔다. 내 방으로 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효과 좋다는 액상 아스피린을 거부했다. 내가 보수적으로 변해가는구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늙어간다는 의미다. 헹. 나는 아직 진보이고 싶다. 참고로 내 친구들이 여행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 또 한 번 가야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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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6.05.15 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