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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분신들을 정리하며
- 구자룡의 책들
어느날 복사골문학회 카페를 들어와 보았다.
누구누구의 책들이 올라와 있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그동안 다른 사람 책에만 몰두하다보니 내 책은 안중에도 없었다.
책장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던 내 분신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먼지를 털고 정리를 해보니 등사본을 제외한 시집이 20권,
수필집이 5권, 동화가 12권, 연구서라는 이름으로 8권,
그리고 같이 엮은 시집 5권, 등 총 50권이나 되었다.
년도 별로 펼쳐 본다.
0. <시집> 촛불을 밝히며. 1963, 등사본.
까까머리 학창시절, 내가 다니는 학교는 공업고등학교였지만 문예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묶은 시집이다.
‘촛불을 밝히며’는 내가 문학을 한다고 하면서 교내신문에 처음으로 발표된 시의 제목,
우격다짐으로 내 시를 책 제목으로 했다.
그러나 등사본 30쪽 짜리, 20부나 찍었을까?
지금 있을 리가 없다. 다시 만들었다.
1. <시집> 순이네 집 겨울비내리다, 1968, 선명문화사.
첫 번째 시집.
공고를 졸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을 했으나
현대문학 지도교수가 없어 황당했다.
졸업 무렵, 대학원에 출강 하시는 정한모 교수님을 석 달 열흘 쫓아다니면
원고지 한 장짜리 추천서를 받아 만든 시집이다.
지금 보면 이것도 시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지만 당시로서 나에게는 천군만마였다.
2. <시집> 에필로그 시몬. 1970, 선명문화사.
두 번째 시집.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다가
서울에 있는 모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을 하고 그해 출간한 시집이다.
지금은 영어를 흔히 쓰는 시대지만 당시로서는 낯설었다.
‘에필로그’란 끝이란 뜻이고 ‘시몬’은 나의 천주교 세례명이다.
다른 뜻은 없고 그저 멋있게 보이기 위해 썼다.
학생들 때문에 재판까지 출간했다.
3. <연구서> 한국 고전문학 해설. 1970, 세운문화사.
‘교과서에 나오는’ 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원고료를 많이 준다기에 얼굴도 모르는 다른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펴낸 책이다.
그런데 그 원고료가 쥐약(?)이 될 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원고료 만큼 책을 학생들에게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이런 원고는 천금을 주어도 다시는 안 쓴다고 다짐을 했다.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
4, <시집> 쏟아지는 햇살더미. 1975, 선명문화사.
세 번째 시집.
소명여자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면서 삶의 둥지를 부천으로 틀었다.
그리고 출간한 시집이다.
아구닥다리 같은 서울서 30여년을 살다보니 사람이 찌들대로 찌들어버렸다.
원미산 언저리, 학교 교정에 아침마다 쏟아지는 햇살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 시집을 지금도 간작하고 있는 제자들이 있다.
5. <시집> 빛이 내리는 뜰. 1977, 천야사.
네 번째 시집. 이 시집에는 큰 의미가 있다.
부천으로 이사를 와서 만난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은 사진작가 김수열 이고, 또 한 사람은 최은휴 시인이다.
지금은 모두 작고 하셨지만 이 두 분들은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도움을 많이 주신 분들이다.
김수열 님은 화보 사진을 찍어주었고, 최은휴 님은 발문을 써주었다.
6. <동화집> 하늘나라 구경 간 채송화. 1978, 중앙문화사.
1961년 김승옥이 <생명의 연습>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될 그 무렵,
나도 동화를 써서 응모를 했다.
자신만만했지만 당선은커녕 예선에도 못 올랐다.
당연했지만 이 원고가 문예반 선생님의 배려로 학교 교지에 실렸고
먼 훗날, 소사성당 신부님께서 주일학교 교재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7. <시집> 눈과 안경사이의 고독. 1979, 신문출판사.
다섯 번째 시집.
내가 맡은 반에 반장은 내 글씨 흉내를 잘 냈다.
어찌나 똑같이 쓰는지, 이 시집은 그 아이의 육필로 만들어진 시집이다.
누가 물었다, 정말 눈과 안경사이의 고독이라는 것이 있느냐고.
그 고독은 아무도 모른다.
평생 안경을 끼고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 뵈는 것이 없는 사람이니까.
8. <시집> 일곱 빛 강물마다. 1980, 성암사.
여섯 번째 시집.
원래 나는 무교주의자였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강론 시간만 되면 왜 그리도 졸음이 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체험, 몸으로 때우는 일은 신나게 잘 한다.
일곱 빛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어디부터가 눈이고, 어디 부터가 안경인지 분간 할 수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9. <시집> 빛과 혼과 그대와. 1980, 성암사.
일곱 번째 시집.
사람들은 나를 보고 다작의 시인이라고 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시절 검열에 작품 한편이 걸려(?) 수난을 격은 시집이다.
‘4월의 장’에 군화가 등장 하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표지는 대한민국 국전에서 특선한 사진작가 김수열 님의 ‘축복의 종’에서 일부를 사용했다.
10. <시집> 춤추는 겨울. 1982, 동림문화사.
여덟 번째 시집.
이 집을 두고 호인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이번 시집 출판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특별히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아직까지 그가 다름 아닌 시인으로 남아 있다는 표지(標識)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쯤 되면 그의 시가 성공적이나 아닌가를 차지하고서라도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칭찬(?)을 했다.
11. <동화집> 동방의 새 빛. 1983, 동림문화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된 이승훈의 전기, 전집 중에 한 권이다.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써달라고 청탁을 받고 미루고 미루다가
한 달 만에 원고지 1,000장을 단박에 썼다.
원고를 다 쓰고 나니 눈이 안 떠져 장님이 되는 줄 알았다.
일주일 만에 눈이 떠지기는 했지만 고생을 많이 한 책이다.
다행히 이승훈 삶의 효시가 되었다.
12. <수필집> 꼴찌들의 합창. 1983, 성요셉출판사.
첫 수필집.
유독 내가 담임을 하는 반 아이들은 꼴찌만 했다.
그러나 일 년 내내 결석 한번 하지 않고 학교는 열심히 잘 다녔다.
그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고 했던 이야기들을 묶어 펴낸 책이다.
당시 MBC 문화방송 청소년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에서 주간주제로 방영까지 했다.
덕분에 원작료도 받고 책도 좀 팔렸다.
13. <동화집> 하늘나라 구경 간 채송화.(재판) 1983, 중앙문화사.
하루는 개신교 목사님 한 분이 찾아 왔다.
이 책을 여름성경 학교 교재로 사용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책이 한 권도 없었다.
부랴부랴 이상덕 화백을 찾아가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왕이면 활자 말고 글씨를 써 아이들에게 새롭게 책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책값은 몇 푼 못 받았지만 이렇게 해서 재판이 탄생했던 것이다.
14. <시집> 겨울 기도. 1984, 중앙문화사.
아홉 번째 시집.
그 당시는 겨울만 추웠던 것이 아니라 봄도 여름도 추웠다.
내가 쓴 후기에 이런 글이 있다.
‘시라는 것은 시골 아낙이 겨울 빨래터에서 온몸이 시려오는 고통을 참고 빨래를 하듯 써야한다.
민생의 꼭대기보다 밑바닥을 내려다보며 사는 것처럼 써야 한다.’라고.
시절이 시절인만큼 세상은 겨울보다 더 힘들었다는 이야기다.
15. <수필집> 머물다 갈 뿐이지만. 1985, 성 성황석두루까 출판사.
이름도 생소한 출판사가 어느 날 내 앞에 다가왔다.
‘성(聖)’은 성인 이라는 뜻이고 ‘황석두’는 그냥 이름이고 ‘루까’는 천주교 세례명이다.
출판사 이름 쳐놓고는 어렵지만 전속(?)계약을 맺고 일을 시작했다.
이 책은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발행하는 주보에 실린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평신도들이 신앙적 체험을 쓴 글을 정리한 것이다.
16. <시집> 복사골 우리 동네. 1985, 성 황석두루까 출판사.
열 번째 시집.
옛날에는 학교마다 가정 방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내가 근무 하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을 끝낸 오후, 가가호호를 방문하다 보니 아이들이 사는 동네 이름이 새로웠다.
이렇게 해서 10년간 자료를 수집하여,
‘시로 쓴 부천‘이라는 부제를 달고 한권의 서사 시집을 엮었다.
시장님이 서문을 쓴 관계로 강제로(?) 팔렸다.
17. <동화집> 성녀 작은 꽃 데레사. 1985, 성. 황석두루까 출판사.
18. <동화집> 성녀 젬마 갈가니. 1985 성.황석두루까 출판사
19. <동화집> 성녀 엘리사벳 씨튼. 1986 황석두루까 출판사
20. <동화집> 성녀 모니카와 아오스팅. 1986 황석두루까 출판사
21. <동화집> 성녀 마리아고레띠. 1987 황석두루까 출판사
22. <동화집> 성녀 프란체스카. 1987 황석두루까 출판사
어린이를 위한 세계성인이야기 20권 중 일부이다.
이 책은 내가 번역 한 것이 아니다.
출판사애서 번역 해온 것을 토대로 내 나름의 생각으로 우리 실정에 맞게 번안을 한 것이다.
보통 영세를 하고 천주교 신자가 되면 자기 이름 외에 본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여자는 성녀, 남자는 성인 중에서 닮고 싶은 이름을 찾아 쓰는데 그들의 전기이다.
주로 성녀만 썼다.
한 권에 원고지 약 300장 정도 분량으로 여섯 권을 쓰는데 일 년에 두 권씩 3년이 걸렸다.
덕분에 출판사에서 원고료 외에 시집과 동화집을 덤으로 출간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계약을 잘 못해 인세를 못받는 이 책은 지금도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23. <시집> 빨간 뾰죽집. 1986, 황석두루까 출판사.
열한 번째 시집.
출판사에서 그동안 수고했다고 보너스로 출간해 준 책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들을 위한 시집을 펴내봤다.
머리글에 이렇게 적었다.
'누군가가 어린이의 마음은 어른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저 푸른 오월의 하늘같기도 할 것입니다'라고.
덕분에 성당 주일학교에서 좀 사주었다.
24. <동화집> 아빠의 훈장. 1987, 황석두루까 출판사.
내 문학의 원조는 시보다 동화였다.
그래서 그동안 틈틈이 동화를 써왔다.
솔직히 원고료도 쏠쏠하고 해서 한때는 여러 곳에 발표도 했었다.
그 원고들을 모아 동화집을 엮은 것이다.
제목 ‘아빠의 훈장’은 내가 담임을 했던 반에 어떤 아이의 실제 이야기를 동화로 엮은 것이다.
당시엔 동화가 잘 안팔렸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 재판까지 찍었다.
25. <시집> 원미동 닭집. 1988, 황석두루까 출판사.
열두 번째 시집.
한때 원미동 사우촌이라는 동네에서 살 때였다.
출퇴근하며 오가는 길목에 닭집이 하나 있었다.
여자가 주인이었는데 이따금 보면 살아있는 닭의 목을 비틀어 무참히도 잘 잡았다.
그 이야기를 쓴 시집이다.
잘난 척하고 초판 2,000부를 찍었다가 재고만 남긴 시집이 되었다.
안 팔렸다는 이야기다.
26. <시집> 장미 빛 당신. 1989, 민훈당.
열세 번째 시집.
천주교 신자 지인이 출판사를 차렸다.
그 기념으로 시집을 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신작은 없고 해서 부랴부랴 이미 출간 된 시집에서 몇 편을 뽑아 정리를 했다.
그런데 굳이 선집이라고 쓰고 싶지가 않았다.
여기서 ‘장미’는 꽃이 아니라 천주교애서 기도 할 때 쓰는 묵주 즉 ‘로사리오’를 말한다.
27. <시집> 사랑이 깊으면 아픔도 깊다. 1991, 문학공간사.
열네 번째 시집.
이 시집도 새로 쓴 작품이 아니다.
역시 출판사 측에서 나름대로 뽑아 만들어진 ‘문학공간’ 시선 17번으로 출간된 시집이다.
이 시집 해설을 쓴 최광호 시인은 ‘고향의 참모습을 그리워하는 연가’라고 평을 했다.
덕분에 팔리기는 좀 팔렸지만 출판사 농간(?)에 정작 내 손에 들어오는 인세는 푼돈에 불과했다.
28. <수필집> 그대 복사골을 사랑 한다면. 1991, 믿음출판사.
그동안 여러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원고들을 모아 출간한 두 번째 수필집이다.
머리글에 이런 말이 있다.
‘지난 20년간 부천에 살면서 남달리 많은 애정을 쏟았다.
흩어진 역사의 조각을 모으려고 나름대로 애도 써보았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부천에 살면서 부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부천사람들이 책을 많이 사주었다.
29. <연구서> 소사본당 반세기. 1991, 상록문화사.
학교에 근무하면서 여름,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10년간
부천은 물론 전국을 돌며 찾아낸 ‘부천 천주교회 100년사’이다.
그런데 부천 소사성당이 반세기를 맞이해 책을 내고 싶은데 자료가 부족했다.
이 원고를 300만원의 고료를 받기로 하고 넘겼는데
100만원만 받고 25년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나머지 고료는 못 받은 책이다.
30. <시집> 눈 내리는 날은 역곡동으로 가자. 1992, 믿음출판사.
열다섯 번째 시집.
부천에 좀 오래 살다 보니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내 시에 원미동, 복사골, 소사, 등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고향은 여주지만 유년을 서울서 살았기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다.
역곡, 조선시대 때 인천을 오갈 때 말을 갈아타던 곳이라고 하지만
눈만 내리면 일명 안동네를 무작정 달려가곤 하였다.
31. <시집> 그리움 깊은 강. 1994, 민훈당.
열여섯 번째 시집.
지금까지는 자비로 책을 출간 하다시피했다.
어쩌다 책이 좀 팔리면 다행이지만 그것은 하늘에 별따기다.
그래도 책 출간의 행진은 계속 되었다.
그런데 부천시에서 처음으로 문예진흥기금이라고
작가들에게 제작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는 일이 생겼다.
그 기금을 처음 받고 출간 한 첫 시집이라 기뻤다.
32. <시집> 당신은 별 이십니다. 1997, 산과들.
열일곱 번째 시집.
그동안에 시 아닌 시(?)를 더러 썼다.
새해 아침에 쓰는 시, 신문 창간, 또는 기념일 등 다시 말하자면 축시라는 것이다.
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쓰는 것이 흠이지만 쓰다 보니 한권 분량의 원고가 모였다.
그것을 한데 모아 엮은 시집이다.
버리고 싶지 않은 유산이기 때문이다.
표제작은 부천대학 도서관 현관 벽에 걸려있다.
33, <시집> 어머니, 얼마나 좋으신지. 1998, 성 요셉 출판사.
열여덟 번째 시집.
내 어머니는 일찍이 입센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로라’가 되었다.
틈틈이 간간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어린 시절은 그리움만 가득했다.
청소년이 되었지만 통곡의 벽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내 앞에 나타났지만
흘러간 세월은 모두를 그냥 두지를 않았다.
34. <점자시집> 어머니, 얼마나 좋으신지. 1999, 부천점자도서관.
열아홉 번째 시집.
소문을 듣고 사랑의 교회 목사님이 찾아왔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이 시집을 점자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처음으로 3판까지 찍어 받은 인세를 몽땅 쏟아부어 전국 시각장애인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가슴이 저렸다’는 독자도 있었고, 단숨에 읽고 펑펑 울었다는 독자도 있었다.
책을 만지면 가슴까지 간질간질하다.
35. <산문집> 안나 히야친타의 향기. 2000, 황석두루까 출판사.
6개월만 있겠다고 부임했던 ‘소명여고’에 몸담은 지도 30여년,
정년은 아직도 멀었건만 미련 있이(?) 명예롭게 퇴직을 했다.
흔히들 퇴직을 하면 기념으로 자기 이야기를 쓴다.
그러나 내가 오늘날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이끌어준 분이 계셨는데 돌아가셨다.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으면서 나는 그 분 영혼의 향기를 남기기로 했다.
36. <동화> 햇님 나라 구경 간 채송화. 2001, 산과들.
30년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려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사업을 하시면 잘 하실 거예요”
이 한 마디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어린이집을 차렸다.
그리고 그 이름을 대한민국에서 제일 긴 ‘햇님 나라 구경 간 채송화 어린이집’이라 하였다.
어릴 적 신춘문예에 낙선한 동화 제목이 한국 기네스북에까지 등재가 되었다.
37. <연구서> 문학으로 만나는 복사골 부천. 2004, 산과들.
부천시 승격 30주년 기념과 부천문단 50년을 정리하면서 출간한 책이다.
내 문학의 시작은 서울이지만 꽃피운 곳은 복사골 부천이다.
처음 부천에 와서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변영로, 이상로, 정지용, 최은휴
그들이 오르던 계단이 없었으면 오늘의 복사골문학회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부천문학의 대 서사시이다.
38. <시집> 복숭아꽃 필 무렵. 2005, 산과들.
만화가 있는 시집.
한국카툰협회 회원들과 복사골문학회 회원들이 함께 엮은 시집이다.
“시가 있으면 카툰은 노래를 했고, 소설이 있으면 카툰은 술을 마셨습니다.
카툰이 슬퍼하면 수필은 카툰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문학과 카툰의 만남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냈습니다.”
조관제 만화가의 아름다운 머리글이다.
39. <수필집> 똥 기저귀 빠는 남자. 2006, 산과들.
세 번째 수필집이다.
어린이집, 어린이만 잘 돌보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루는 산 너머 산, 하루는 강 건너 강이 있었다.
큰 아이들과 함께 놀다 작은 아이들과 하루 종일 보내다보니
똥 기저귀도 빨아야 하는 별의 별, 좌충우돌 현상이 발생했다.
그 이야기를 어느 유아잡지에 3년여 연재를 했다.
그 원고를 다시 정리해 엮은 수필집이다.
40. <시집> 복숭아꽃이 피었습니다. 2006, 산과들.
차왕명의 사진이 있는 시집.
어느 날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사진작가를 만났다.
그 인연으로 10여 년간 복사골문학회 작가들의 프로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 표정들을 모아 작품전을 열었다.
그것을 다시 묶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필름으로 남겨진 사진이 골동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41. <연구서> 최은휴 연가. 2007, 산과들.
최은휴, 나이는 한참 연배지만 늦깎이 공부를 하여 같은 대학 같은 학과 2년 선배였다.
처음 만난 것은 1975년경,
그때 그는 이미 ‘허탕 맹탕’ 시집을 출간하여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문학의 불모 부천을 사랑하는 풍월주인(風月主人)이었다.
그러나 생각의 차이가 많았다.
작고한 지 10년, 사죄의 뜻으로 영전에 바치는 책이다.
42. <시집> 복숭아꽃 피는 마을 이야기. 2007, 산과들.
송연옥의 도예가 있는 시집.
작가는 제자다. 학교 다닐 때 그림을 잘 그렸다.
내가 ‘미술을 전공 해보라고’ 했단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훌륭한 도예가가 되어 나타났다.
그 인연으로 다시 만났다.
이 작업을 하는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작가는 의연하게 전시회를 마쳤다.
그리고 어머니께 고백을 했다. 사랑한다고~~
43. <시집> 복숭아꽃 피는 언덕에서. 2008, 산과들.
성용부의 연과 함께한 시집.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
어느 날 내가 근무하던 학교 운동장에서 연을 날리고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연을 만들기 시작한 그는
손가락 끝에 대나무가시가 하루라도 찔리지 않으면 서운할 정도라고 한다.
그림도 그려야 하고, 글씨도 써야 한다.
그는 말한다. 연 만드는 일도 종합 예술이라고.
44. <시집> 복숭아꽃 곱게 물들이고. 2009, 산과들.
이상덕의 수채화와 함께 한 시집.
그가 누구인가. 부천에서 태어나 평생을 부천에서 살다간 한국 수채화의 대가다.
그의 작품을 한 권의 시집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이 가을 나는 또 꽃씨를 따러가야겠다.
내년 봄 내 할 일 때문에' 이 책 서문에 있는 그의 독백이다.
천상 그는 화가였다.
45. <만화> 털보 아저씨. 2009, 전시회.
내 문학의 효시는 동화다.
그러다가 시로 전향했지만 훗날 원고료(?) 때문에 동화를 다시 쓴 적이 있었다.
발표된 작품 중에서 한편을 만화로 만들어 전시회를 했다.
김승동 시인이 이끄는 부천예술포럼에서 ‘동화와 만화의 만남전’을 했을 때 일이다.
동화는 어른들의 고향이고, 만화는 아이들의 고향이다.
그림은 윤교석 화백이 그렸다.
46. <시집> 깊은구지 세탁소. 2010, 산과들.
스무 번째 시집.
10년 만에 출간한 시집이다.
한때는 다작의 시인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1년이 멀다고 시집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 성격에 아무 일도 안할 리 없었을 덴데,
그간 이런저런 책을 출간 해봤지만 그래도 시집만 하랴,
책 말미에 유영자 선생님의 평론 ‘하얀 낮 달, 미완의 사랑’이 빛을 더했다.
47. <연구서> 변영로 연구. 2011, 산과들.
부천이 낳은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 그는 조선의 혼마저 위태로웠던 일제 강점기 속에서도
이상향으로 시의 세계를 선택하였고 저항의식을 끈질기게 내면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커녕, 단 한 줄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았던 민족시인이요 저항 시인이다.
흩어져있는 그의 자료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한 3년여 걸렸다.
48. <연구서> 그대 영혼 속에 핀 목련. 2013, 산과들.
신 성우 마르코 신부님의 이야기다.
6.25 전쟁 때 폐허가 된 소사 땅에 문명 퇴치를 위해 야학을 세우셨고,
교육의 불모지에 소명 학교를 세우셨다.
소사 사람들을 위해 빈민운동도 하셨다.
그런가하면 보육원, 양로원, 병원을 세우는데 앞장을 섰다.
2013년, 그가 태어 난지 120년, 내게 정신적 지주였기에 작은 점을 하나 찍어보았다.
49. <연구서> 진달래꽃, 김소월. 2014, 산과들.
유년시절 숙제로 베껴 간 김소월의 ‘금잔디’가 내 생애를 바꾸어 놓았다.
대학시절 시화전에 발표한 시가 죽은 ‘소월이 돌아온 것 같다’고
혹평을 하신 교수님 때문에 반전이 되었다.
그 후, 틈틈이 세상을 돌고 돌며 미친놈이 되어 소월을 찾았다.
한도, 끝도 없이 나타나는 소월의 자료 1,200점을 한데 모아 전시회도 하고 책도 엮었다.
50. <연구서> 변영로의 조선의 마음. 2014, 산과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수주 변영로 시인의 불후의 명작 ‘논개’는 반세기 동안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 되어 우리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한 지 어언 90년,
그 누구도 기억 해주는 사람이 없다.
‘아~ 수주의 마음을 어디서 찾을까? 조선의 마음, 설은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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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리하고 나서
옛날에 나이만큼 책을 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욕심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보다시피 나는 세상에 뵈는 것이 없다.
눈이 나빠 언젠가는 장님(?)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이 오늘의 50권의 책이 되었다.
자축하면서 복사골문학회 카페에 올리는 바이다.
2015년 1월 아침
구 자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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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경합니다 선생님^^
저는 언제쯤 글을 쓰다 눈이 멀고
가슴까지 간질간질한 글을 쓸수 있을런지요ㅠ
선생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노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부럽습니다.
오랜 세월을 글에 잡혀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으니 여한이 없으시겠습니다
부러운 인사글을 이렇게 남겨 봅니다
이제 걸음마 하는 초보 글쟁이의 부러운 시선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말 대단하십니다. 문학에 산 역사의 증인이십니다.
선생님의 문학 역사를 보았습니다.
읽어내려오면서 한번 펼쳐보고 싶은 책도 있네요. 문학도서관에 가면 볼 수 있습니까?
'잘 하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이 낫고,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즐기는 사람이 낫다는 말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구자룡선생님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입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여러해 선생님과 같이 했지만 아직 보지 못한 책이 여럿입니다. 우리들에게 좋은 본보기 입니다.
구자룡 선생님의 대단한 기록을 봅니다.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늘 부지런하신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저서가 많은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역시 우리들의 대부 이십니다.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것 아시지요?선생님의 바람데로 살아온 햇수만큼 좋은 책 출간하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의 시화집 "에필로그 시몬" 이라는 책은 저도 구매하여 읽어봤습니다.
굵은 안경테 역시 아주 돋수높은 안경너머로 보이는 선생님의 모습이 아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