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극지(權克智)[1538~1592]는
1558년(명종 13) 사마시를 거쳐,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춘추관의 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봉교·전적을 거쳐 예조·병조·형조의 좌랑을 지내고
충청도사·직장·사예·사성·직제학·지평 등이 되었다.
1589년(선조 22)에 대사헌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온 뒤
1591년 형조참판 및 동지경연·예조판서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으로 침식을 잊고 국사에 몰두하다가 병을 얻었고,
국세가 날로 위급해가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었다.
천성이 강직하여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였다.
특히, 표(表)·책(策)에 뛰어나 문신들이 치른 정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권극지(權克智)[1538~159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택중(擇仲),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공조참의 권령(權齡)이고,
할아버지는 개성유수를 지낸 권홍(權弘)이다.
아버지는 종묘서령 권덕유(權德裕)이고,
어머니는 우찬성 조계상(曺繼商)의 딸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부인은 경상도병마절도사 이이수(李頤壽)의 딸 완산이씨(完山李氏)이다.
권극지는 1538년(중종 33) 익산에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3등 21위로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 병과 18위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예조·형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후 충청도도사를 거쳐 직장, 사예, 사성, 직제학, 지평 등의 관직을 거쳤다. 158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사은사로 지목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형조참판, 예조판서 등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비변사 유사당상(有司堂上)을 맡고 있었는데, 격무에 시달리다가 사망하였다. 이정귀(李廷龜)의 시문집인 『월사집(月沙集)』에 따르면 선조의 어가가 도성을 떠나기 하루 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