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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골로새서 3장 18-21절
주께 하듯 하라(가정)
바울은 앞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생활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골3:10)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고(골3:12), 나아가 용서하며 사랑으로서 온전해지도록(골3:13-14),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 마음을 주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골3:15).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열매를 위하여 항상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그리고 하나님께 찬송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골3:16-17).
물론 이런 열매들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일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어야 하는가? 또한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의 역사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바가 무엇이냐? 열매가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이지만, 관계적인 면에서 보자면 좀 더 구체성을 띤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와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그리고 사회로 보자면 상사와 직원과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오늘은 가정과 관련해서만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부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을 보면 18절에서 아내를 향한 권면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이것은 단순히 주종관계 속에서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남자에 비해 여자가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실 때 거기에는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도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창1:27). 그러니까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코 주종관계일 수 없고, 동등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종하라고까지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질서상의 문제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1절 이하 14절 말씀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분명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누가 먼저 지음을 받았는가? 아담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누가 먼저 속아 넘어 갔느냐? 하와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8절과 9절을 읽어드리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실제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난 뒤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2:22). 한편으로는 자신의 갈빗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아담은 하와를 보면서 마치 그 자신과 같은 대상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창2:24) 창조를 통해서도 결코 주종관계 혹은 남자보다 여자를 열등하게 만드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남자를 돕기 위해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는데(창2:18) 이런 측면에서도 보자면 남자 혼자서는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서로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돕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그렇게 해서 완성해 가도록 하실 목적이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질서로서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먼저 만드셨는가? 남자를 먼저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가 남에게 속한 것이지, 남자가 여자에게 속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심지어 누가 더 연약한가? 여자가 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유혹에서 먼저 넘어진 자가 누구냐? 하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자의 머리를 남자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고전11:3). 뿐만 아니라 창세기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형벌을 주실 때 어떤 말씀까지 하느냐?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는 말씀까지 더하셨습니다(창3:16). 창조의 질서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난 뒤 형벌 속에서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도록 분명히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전체적인 의미에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 안에서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내 된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은 뭐냐 하면 남편에 대한 복종을 우리나라 식으로 하자면 유교적인 사고방식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보면 여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남녀평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까지 폐하는 방식으로 엇나가는 경우도 있는데,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단적인 예이지만 오늘날 여자 목사들이 참으로 많고, 또 그것을 찬성하는 교단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저희 교단의 경우 아직까지 여자 목사에 대해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남녀평등이라고 할 때 이런 여자 목사의 문제까지 성경은 열어놓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디모데전서를 읽어드렸지만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딤전2:12).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이 말씀과 비교해 보자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의 자격과 관련해 디모데전서 3장 2절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남녀평등이라는 입장에서 이런 말씀이 폐해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 말씀이 과거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오늘날 시대에는 불필요한 말씀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 속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결코 과거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듯 동일한 말씀을 과거에도 주시고, 오늘날에도 주시며, 장차 올 미래에도 다르지 않는 말씀을 계속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유교적인 사고, 혹은 남성 우월적인 사고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말씀입니다. 때문에 모든 아내들은 분명히 남편에게 속한 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남편에게 속한 자로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특히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교회가 마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입니다(엡5:24).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따르며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아내 역시 그러한 복종을 하는 것이 유익하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도 복종해야 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내의 복종은 언제나 주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원리로 있기 때문입니다(행5:29).
어쨌든 이런 이해 속에서 본문과 관련하여 좀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JS 참고). 베드로전서 3장 1절과 2절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여기 보면 당시 복음이 증거 될 때 부부 중 한편이 먼저 믿게 된 자들이 있었는데, 그때 믿는 자로서 아내 된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혹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가 있다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줄 수 있다. 역으로 생각하자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내는 그 외형이 아무리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미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체가 복음을 가리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믿지 않는 남편을 두거나, 혹은 믿지 않는 아내를 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 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거나, 혹은 오늘 본문 속에서 남편에게 말씀하시는 아내 사랑을 통해서 참된 믿음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행실을 보면서 판단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굳이 가정 안에서만 이해될 부분이 아니라 사회 속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특별히 이런 비판을 통해 반드시 생각해야 될 것은 열매가 없기 때문에 비판을 한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행실이 그리스도인답지 않기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3장 3절과 4절도 보시면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 쉽게 말해 아내들은 검소하고 단정하게 자신을 단장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소위 외모지상주의입니다. 그러다보니 얼굴이나 몸매를 따지게 되고, 성형이라는 것이 대수롭지 않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은 그 심각성에 있어 너무 지나칠 정도입니다. 성형대국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경쟁 시대 속에서 외모 자체가 실력이 되고 엄청난 경쟁력으로 평가가 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온 세상이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온통 감각적이고 퇴폐적인 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런 문화 가운데 있으면서도 아무도 이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라는 사고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문화가 이미 TV에서부터 낯설지 않으며, 어른들만이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아무렇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인터넷에 올라온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이런 외모지상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람의 내면을 보지 않을 정도라고 말하는 것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베드로전서에서는 이렇게 꾸미는 것 자체에 대해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아내 된 자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썩어질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것에 관심을 가지란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종류의 몸단장을 비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헛된 죄악에 매이는 것을 책망하려는 것이다. 옷을 입는 데는 실용성과 단정함, 이 두 요소가 있어야 한다. 단정함은 절제와 겸손을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과도한 단장과 사치스러운 장식, 요컨대 모든 지나친 것들은 부패한 마음에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야망이나, 자만심이나, 과시의 허식 등은 제외하고라도 이러한 유행에 속한 기타의 것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외모를 꾸미고 옷을 입는 문제에 있어서도 단정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 강론이라는 책에서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제7계명을 해설하면서 외적으로 저지르는 범죄와 관련해 화려한 의상에 대한 부분도 설명하는데, 거기 보면 이런 말도 합니다. 남자가 여자의 의상을 입는 것 또는 여자가 남자의 의상을 입는 것과 같이, 만약 의상이 다름 아닌 성에 속한 것이라면 그렇게 바꿔서 입는 것도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보면 남자가 여장하는 것, 또 여자가 남장하는 것을 교회조차 재미라는 것으로 쉽게 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성경 해석으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옷이 우리의 상태나 능력보다 지나친 것일 때도 제7계명을 위반하는 것이고, 어떠한 옷들은 성령께서 음탕하다고 하신 것과 같이, 그 옷에 경솔함이 배어있을 때도 그렇다고 말합니다(잠7:10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인이 그를 맞으니”). 오늘날 TV를 보시면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의 의상들이 많습니다. 굳이 기생이 입는 옷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경솔함이 배어 있는 그런 옷들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모습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제7계명을 어기는 것! 심지어 어떤 문답도 있느냐 하면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옷으로 그들의 남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아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들은 합법적인 수단으로서, 즉 맑은 정신을 가지고 흉하지 않은 옷을 입음으로서, 남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여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정직하지 않은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숙한 옷을 가지고도 능히 남편들이 아내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지켜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신뢰를 두어야 한다(벧전3:5).”
오늘날 문화적인 측면이나 사람들의 인식으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내용을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세상 문화에 접목이 되어 들려질 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도 스스럼없이 말 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부패해가고 있는 현실인 겁니다.
베드로전서 3장 5절을 보십시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내용입니다. 자기를 단장할 때 지금 주께서 말씀하신 이 내용으로서 단장했다는 겁니다. 그저 외모만을 가꾼 것이 아니라 내면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꾼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남편에게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내 된 자들에게 있어야 할 순종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것, 그리고 남편을 존중하는 것! 그러나 아내 된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 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가?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의 경우 더더욱 외모를 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혹 지금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외모지상주의적인 사고를 빨리 버리셔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가꾸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셔서 19절을 보시면 이제는 남편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에베소서 5장에서는 아내 사랑하기를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엡5:25).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은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인성을 취하시고, 친히 그들을 위하여 대신해 죽으신 사랑입니다. 목숨을 내어놓은 사랑, 희생적인 사랑, 그것이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더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요15:13),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런 사랑을 친히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누구에게 요구하느냐 하면 남편에게 요구하십니다.
특히 계속되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놓으신 그 일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 한 마디로 말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죽으시고 희생하신 것은 교회로 하여금 거룩해지도록 하는 데 있고, 궁극적으로는 영광스럽게 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할 때 그 방향 역시 다르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셨다고 할 때 그 사랑의 내용은 세상의 어느 남편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은 감히 인간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도 큰 사랑이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내에게 요구하는 복종보다 남편에게 요구하는 사랑이 이런 의미에서 더 무거운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무거운 요구를 누구에게 하시는가? 여자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남자에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고,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를 아끼며, 보호하고, 또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자를 무엇으로 비유하느냐? 연약한 그릇으로 비유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조심해서 한다는 것이고,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머리이기 때문에 폭군처럼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더욱 중요한 것은 머리로서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방향은 항상 거룩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남편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아내를 비롯하여 그 가정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바르게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실 때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엡5:26).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것처럼 남편 역시 아내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방향은 거룩의 방향이어야 되고, 그런 의미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가정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도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이 진리에 있어서 남자는 머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남편 된 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 걱정 근심을 덜어주느냐 여기에만 있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아내를 그리고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모습으로 잘 인도하는 것, 그것이 남편의 첫 번째 의무 그리고 가장의 첫 번째 의무입니다.
오늘날 보면 그것이 역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니 남편이 그리고 가장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에는 관심 밖의 일로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보면 남자보다는 여자 쪽에 열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가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명령을 교회가 순종해야 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반면 남편의 경우 하나님의 질서로서 머리이고, 머리로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다스리느냐? 자기 생각 혹은 자신에게 갖춰져 있는 것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서만 다스려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편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남자라면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노동에 대한 형벌을 남자에게 지우셨기 때문에 분명 경제적인 책임이 남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책임이 뭐냐? 영적인 책임입니다. 이것은 단지 남편 된 자만이 아니라, 남편이 될 모든 남자들이 준비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라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좀 괜찮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 자체를 뭐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좀 괜찮다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으로 부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직업을 고민하면서 찾아가는 것도 분명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에 있어 무엇이 먼저인지를 항상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노력하지만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등한시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아내를 그리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로 아내를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을 믿음으로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러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남편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있을 때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천을 더욱 더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물론 아내 사랑과 관련해서 좀 더 실천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하는 것처럼(벧전3:7) 아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아내의 정서가 어떤지, 또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남편 된 자신의 성품도 생각해야 합니다. 언어 사용은 어떤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성품이나 언어 사용이 아내로 하여금 사랑을 받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괄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며,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영적 권위에 있습니다. 즉 남편 된 자가 말씀을 따라 사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내를, 그리고 자녀들을 이끌고 있느냐 이 문제인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할 때 이 사실을 결코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저 세상이 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근본적으로는 영적인 권위가 세워지면서 영적인 권위 아래 사랑의 표들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시면 자녀들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에베소서에 보면 ‘주 안에서’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엡6:1) 골로새서 역시 주 안에서 모든 일에 대하여 순종하라고 명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혹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자녀가 있다면 믿지 않는 부모가 예수를 믿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런 부분까지 다 순종하라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있어서 아무런 해가 없다면, 그리고 죄악 된 어떤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말씀하시든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에 보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는데(엡6:1),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와 권위로서 마땅한 바라는 겁니다.
사실 성경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죄로 말합니다. 제 5계명을 통해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말씀하시는데, 공경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로 지적되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고 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순종인데, 순종하지 않는 것 자체도 죄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을 때(롬1:28) 행하는 행동 가운데 한 가지를 부모에 대한 거역이라고 말합니다(롬1:30). 뿐만 아니라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딤후3:1) 나오는 것이 자기 사랑, 물질에 대한 사랑과 함께 부모에 대한 거역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녀 된 자들은 주님 안에서 마땅히 순종해야 할 부분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는가? 21절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우리의 죄악 된 모습으로 보자면 질서나 권위로서 위에 있다면 아랫사람에게 좀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부모가 질서나 권위로서 위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가? 낙심하게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모습은 온화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결코 거칠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분을 품고 대해서도 안 되며, 가혹하거나 매정하게 행사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성경은 자녀에 대해 징계할 것을 말씀합니다. 잠언 13장 24절에 보면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분명 말씀하십니다. 잠언 22장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심지어 어떤 말씀도 있느냐? 잠언 23장 13절과 14절입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채찍을 들지 않는 것, 그래서 죄의 열매를 방치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도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잠언 19장 18절입니다.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그러니까 징계를 하는 것은 자녀에게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미련함을 벗어버리고 그 영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러나 죽일 마음, 즉 분에 못 이겨서 징계를 하는 그런 마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징계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징계는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고, 자녀로 하여금 낙심케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에베소서 6장에서는 어떤 말씀을 덧붙이느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교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훈계하며 그렇게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까지 하시기 때문에 말씀보다 더 좋은 교훈과 훈계는 없다고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내 분에 못 이겨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훈계의 방식과 내용과 그 모든 방향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 그렇게 오래 참지 못하고 뭔가 터지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하셔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나 에베소서나 ‘아비들아’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많은 부분 아버지가 분을 참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부모든 분명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반적인 은총으로 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매우 미숙하고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분을 내기도 하고, 자녀들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로 하여금 분노를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 억울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부부와의 관계 속에서 내면을 살피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영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할 때 부부가 먼저 부모 된 자로서 거룩해져야 하며, 그런 모습이 가정에서부터 비춰져야 합니다. 그래서 분명 부족하지만 말씀 안에서 부모의 권위가 세워져야 하고, 또한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그런 부모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골3:12).
오늘 본문 이후에는 종과 상전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23절에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종과 상전에 대한 말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사회생활 할 때만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에베소서는 아내에게 말씀하실 때부터 그런 말씀을 사용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그러니까 사회생활만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부터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정의 경우 허물이 없어도 너무 없는 관계에 있다 보니 자칫 사회생활보다 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은데, 적어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가정,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을 받고 있는 자라면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부터 더욱 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 5월이고, 5월 하면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데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부터 주께 하듯 하는 이 원리가 실제로 실천이 되어 믿음의 가정의 모습이 세상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 오히려 본이 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세워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