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13> 이덕진
“욕망의 불꽃 못다스리는 수행은 무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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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사진은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불태우는 다비식 장면. |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 즉 ‘고(苦)로부터의 해탈’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이란 우리가 현세에서 당하고 있는 많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절대 자유의 경지’ ‘절대 평화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할 뿐 초자연적이나 우주론적인 심오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초기불교적인 의미에서 깨달음(열반)은, 버마의 우티틸라에 의하면, 탐욕과 미움과 무지의 소멸이다. 이때 깨달음을 무(無)나 단멸(斷滅)의 상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맹인이 볼 수 없다고 해서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적당하게 표현할 말은 없다. 깨달음은 만들어지지도 않고 형태를 이루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것은 환상과 무지의 감각적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하고 행복한 최상의 가치를 지닌 삶의 목표이다. 동시에 깨달음은 어느 장소에 위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 자아가 머무는 천국의 종류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만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깨달음, 다시 말해서 열반은 산스크리트어로 ‘등불을 불어 끄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불어서 꺼지는 것은 사람마다의 욕망의 불꽃이다. 갈망은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난다. 따라서 열반은 사물에 묶이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외부세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깨달음은 인간의 갈망하는 경향을 꺼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환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환경들에게 자신을 속박시킨 족쇄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허깨비’임을 깨닫는 ‘인식의 전회’있어야
환경.분단 등 이 시대 화두도 극복하려는 노력 필요
‘내게 오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껏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사람은 자유롭게 된다. 자유란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의해서 노예로 만들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무것, 아무 사람도 깨친 이를 노예로 삼을 수 없다. 그는 개인의 욕구나 원한, 분노, 자만심, 공포, 자만심, 공포, 조급함 등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선불교적인 의미에서 깨달음(열반)은, 스즈키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정신 활동이 이제 열쇠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제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보다 더 평화로워져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만함 속에 살게 된다. 그 결과 ‘삶의 색조’가 바뀌어져서 봄날의 꽃들은 더 아름답게 보이며, 계곡의 시냇물은 더 신선하고 맑게 흐르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결국 깨침은 일종의 ‘평안한 상태’ ‘행복한 상태’이다. 이때 이 평안하고 행복한 상태란 우리가 자기애(自己愛)를 극복한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즉 열려서 반응적으로 되고, 감수적으로 되고, 각성되고, 공(空)으로 되는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한 상태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정의적(情意的)으로 충분하게 연결지어져, 분리와 소외를 극복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개아(個我)를 버려, 탐(貪)하는 것을 중단하고, 개아를 보존하고 확대하려는 끊임없는 추구를 그만두며, 단지 자기를 보존하고 탐욕하고 이용하려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활동 속에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깨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신이나 혹은 절대자의 도움 없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화장실에 가서 스스로 소변을 보는 것과 같아서, 붓다마저도 화장실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일종의 안내자에 불과하지 대신 소변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이 질문을 선사들에게도 한번 던져보자.
선불교에서 우리의 해탈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라고 볼까. 대답은 번뇌이다. 그렇다면 그 번뇌는 어디서부터 연원한다고 보고 있을까. 선사들은 ‘마음[心]’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잘못 이해해서 생기는 존재에 대한 근거 없는 연루가 번뇌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 깨침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또한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마음을 설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도구인 언어에 천착해서 생기는 언어에의 집착도 깨침의 장애가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우선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분리와 소외를 극복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나 자신과 타인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반응을 나타내고 응답을 하되, 있는 그대로의 전인(全人)으로서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의 현실성에 반응하고 응답하여야 한다. 이 진실한 반응으로서의 행위에는 창조성의 영역이 존재한다.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나의 창조적인 이해를 통해서 창조되고 변용된 세계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가 저 너머의 낯선 세계가 아닌, 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때 지성이나 논리의 세계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성이나 논리로부터 궁극적인 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요구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아래에 깊숙이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 일 것이다. 이것을 파내어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의지의 가장 근본적인 진동’ 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진동을 느낄 때, 자각의 문은 비로소 열리고, 새로운 세계가 현전(現前)하게 될 것이다. 몰록 깨침은 별안간에 부처가 됨이 아니라, 한꺼번에 이 세상이 허깨비임을 깨닫는, 말하자면 생사와 열반을 한통속에 몰아넣고 동시에 이해하는 인식방법이다. 부처가 됨이 아니라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한세상 일대사기연을 확 깨닫는 ‘인식의 전회’가 바로 깨달음의 정체인 것이다.
선불교의 목적은 시종 자아가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내외 양면에 있어서의 괴리를, 즉 자아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진실로 알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계로부터 자아를 분리하고 소외시키는 괴리를 극복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선불교의 경우,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작용이 요구되어진다.
첫째, 자아의 심층에 매몰되어 있는, 쉽게 파헤칠 수 없는 근원적인 관심사를 그 심연에까지 뚫고 들어가 그것을 밑바닥에서부터 환기시키는 것이다. 둘째, 이 근원적인 열망과 탐구를 각성시키면서 그것에 대하여 올바른 방향을 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열망이나 탐구는 단지 환기하였다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약화되고 미혹될지도 모르는 많은 기만적인 망상의 함정에 빠져 들어가지 않기 위하여 보다 신중하게 지도되고 육성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불교는 개인의 완성뿐만 아니라 불국토의 건설을 주요한 목적으로 여기고 있다. 개인의 완성이 깨침에 이르는 것이라면, 불국토의 건설이란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소외됨이 없는 그러한 사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은 채 사회의 구원을 말한다면 그 구원은 비어있을 가능성이 많다. 다른 한편 개인적 깨달음이 사회의 구원 자체라고 보는 것은 자기기만,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깨달음이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의식의 혁명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 삶과의 관계가 이기주의적 삶의 자세가 아니라 전체와 더불어 하나 됨의 상태를 지향할 때, 마침내 다다를 수 있는 드높은 고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깨달음은 우리에게 많은 보림을 요구하며, 그것들은 또 하나의 다른 화두가 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새천년에 접어든 우리나라에서, 불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시대의 정체를, 화두로 삼고, 제대로 깨달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분단의 의미를 ‘깨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만일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 깨달음은 또 다시 새로운 화두가 되어 우리를 깨달음의 보림으로서의, 분단의 극복이라는 수행의 길로 가게 만들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통일’ 이외에도, ‘민주화’, ‘인권’, ‘양성의 평등’, ‘반외세자주화’, ‘환경’ ‘반핵’ 등 화두가 아주 많다. 그 모든 화두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고(苦)로부터의 해탈(解脫)’이라는 명제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깨달음’ 자체가 우리의 ‘참 삶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 우리의 일그러진 삶의 모습’들이 결국 깨달음의 화두이자 참 수행의 지남이 될 수밖에 없다.
이덕진/ 창원전문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51호/ 7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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