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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묵상 진행자 노트
본문: 창세기 24장
실존적 신앙의 정수
-문턱에 서서, 들을 가로질러 오는 자를 바라보며-
서론: 구애 이야기 너머의 문제의식
창세기 24장은 성경에서 가장 긴 단일 내러티브 중 하나다. 표면적으로는 이삭의 아내를 찾는 구애 이야기처럼 보인다. 늙은 종이 낙타 열 마리를 이끌고 먼 길을 떠나고, 우물가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고, 그녀를 데리고 돌아와 주인의 아들과 결혼시킨다.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혼인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내가 볼 때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삶 전체가 상징하는 원복을 중심으로 ‘떠남과 부름’의 핵심이며, 기독교 인간상이 언제나 목말라 찾는 '실존적 신앙'의 정점 중 하나이다. 그 구체적 이야기라는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고뇌와 아픔, 두려움과 결핍의 시간성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온전성의 실재인 하나님을 향한 인간 의식의 종교적 삶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의미 추구의 단어들에 대해 갑자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평범한 구애의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의 상징들에 대해 깊은 경외와 감탄을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에는 놓칠 수 없는 곳곳에 박혀 있는 단어들이 나타난다. 즉, 바라크(축복), 샤바(서원), 말라크(천사), 헤세드(인자), 에메트(진실), 나하(인도), 카라(우연히 일어남), 바흐르(선택), 요트(표징), 키도(경배), 레크(가다)와 같은 단어들은 실존적 신앙의 근본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 파편화된, 살짝 드러나는 단어들은 두 문장에 의해 수렴되고 질서를 형성하면서 이 모든 것을 관통하여 그 너머의 현존을 개시한다. 놀라운 일이다. 그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왜 이렇게 밖에 서 계십니까?"(24:31, 공동번역)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시는 저분은 누구입니까?"(24:65, 공동번역)
내가 멈추어 놀라 듣고 있는 이 두 문장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문턱에 서 있는 인간의 영적 물음이다. 이 두 질문의 문을 넘어 인간이 그 안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 두 질문은 에덴 동산에서 순진했던 인간의 원형인 아담과 이브에게 한 질문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었더냐?”,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의 신적 실재의 질문과 더불어 근원적인, 다가오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질문들을 만나는 순간(사건으로 경험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역사성속에서 응답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의 생존의 의미는 그 자신에게 ‘영원의 순간’으로 화하여 그를 실존의 땅위에 서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1. 문턱에 서다: "왜 이렇게 밖에 서 계십니까?"
① 레크(לֵךְ): 가다, 길을 열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명령으로 시작한다.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לֵךְ, 레크)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24:4). 레크는 ‘가라’이다. 이 단어는 아브라함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동사다. 창 12:1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령하신 말씀도 "레크 레카"(לֶךְ-לְךָ)였다. "너는 가라, 너를 위하여 가라."
레크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올바른 길을 여는 행위다. 익숙한 것을 떠나 낯선 곳으로, 알려진 것을 버리고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실존적 신앙은 항상 '가는 것'이다. 멈춰 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움직이고 나가면서 그는 또한 자신의 흔들림을 안다. 변방에서 ‘중심’을 잡는 것도 이 움직임을 통해 배우게 된다. 나아가면서 중심을 잡는 것이다.
놀랍게도 주인공은 평범하거나 그 이하인 ‘종’이다. 종은 간다. 그는 낙타 열 마리에 주인의 온갖 좋은 것을 싣고 아람 나하라임으로 향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레크를 대리한다. 그러나 그는 두렵다. "그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 하지 아니하면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온 땅으로 인도하리이까?"(24:5). 인간의 원형이자 종교와 교육, 사회의 역할의 좋은 점이라는 ‘옷’을 벗어 벗긴 인간으로서 ‘종’은 나아가며 ‘계약’의 의미와 그 연결을 가슴에 새긴다.
실존적 신앙의 여정은 항상 이러한 전라의 두려움을 동반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만약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면? 만약 신적 실재(여기서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그럼에도 종은, 소수의 인간은 가기를 택한다. 레크. 그래서 길을 연다.
② 샤바(שָׁבַע): 서원, 생사를 건 약속
아브라함은 종에게 맹세하게 한다. "내 허벅지 아래에 네 손을 넣어라"(24:2). 이것은 고대 근동의 가장 엄숙한 서약 의식이다. 생식기에 손을 대는 것은 생명의 근원 앞에서, 자손 대대로 유효한 약속을 맹세하는 것이다. 인간은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으로 시간을 산다. 그 구체적 자각은 상징적 의례를 행함으로 현실이 되고 중요함이 된다. 그 문화의 한 전형으로서 종은 ‘서원’의 표현으로 비밀스런 그 장소에 손을 넣음을 자각한다.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이, 그 구체적인 현실이 자각되어 시간의 흘러감과 생의 목적이 눈앞에 보이게 된다.
샤바(שָׁבַע)는 ‘맹세하다’이다. 이 단어는 브엘세바(בְּאֵר שָׁבַע, 맹세의 샘)와 같은 어근이다. 아브라함이 이방인이나 낯선 그러나 선한 타자인 아비멜렉과 평화를 맹세했던 그곳. 샤바는 일곱(שֶׁבַע, 쉐바)과도 연결된다. 완전한 서약. 깨질 수 없는 약속을 뜻한다. 그것은 마음의 정향이다.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결합과 방향을 말한다. 그래서 의지와 뜻이 생긴다. 그 결단이 그를 그 되게 한다. 구체적인 행동의 존재감을 옷입힌다.
실존적 신앙은 샤바를 요구한다. 생사를 건 헌신. 되돌릴 수 없는 결단. 종은 맹세한다. 그는 이제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다. 그는 언약을 짊어진 자다. 남의 눈에는 좋건 나쁘건, 작건 크건 당사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일한 삶의 목표와 방향이 이것으로 설정되고 그것이 그를 감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적인 의무(shoulds)를 띄기도 한다. 곧 그는 아브라함의 계약(베리트)을 대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사적인 임무를 넘어 계약의 순수성과 진실의 객관성이라는 역사의식을 부여받는다. 그는 달리 무엇을 할 수 없이 이것이 그의 온 가슴을 휘잡는다. 그렇게 해서 헌신이 발해진다.
③ 카라(קָרָה): 우연히 일어나다, 사건의 성육화
‘종(우리의 보편적 인간성)’은 우물가에 도착한다. 저녁때,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오는 시간. 그는 기도한다. "오늘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사 내게 카라(קָרָה)하게 하옵소서"(24:12). 우리는 의미없던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연히, 혹은 기대밖에서 어느 ‘우물가’(샘)을 만난다. 무의미의 시간이 깨지거나 단절되는 ‘깊이’의 순간이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나 보인다. 그럴 때, 인간은 그 ‘순간’에 영원의 옷을 입히고자 한다. 그 순간을 음미하며 온 존재가 일어서서 반응한다. 그 순간은 그동안의 사막의 흐름이 아니라 샘의 새로운 기운을 길어 올리는 깊이의 시간이 된다.
카라는 ‘우연히 일어나게 하다. 만나게 하다’의 뜻이다. 이 단어는 역설적이다. 종은 우연을 새로운 순간의 의미가 되도록 기도한다. 그는 신적 존재에게 자신이 원하는 "우연히"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실존적 신앙에서 우연은 섭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매번은 아니나 특별한 시간에는 달리 할 수 없는 자신 내면의 응답으로서 기도 형태를 취한다.
"내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네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할 때에 그가 말하기를 마시라 내가 네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는 자가 곧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여자라"(24:14-개역).
이것은 치밀한 계획이 아니다. 그것은 표지(יוֹט, 요트)를 구하는 것이다. 우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려는 시도다. 종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카라를 믿는다. 사건이 성육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것을 믿는다. 표지는 그러한 위임에서 일어나는 위험한 증표요, 그 헌신에서 실재와 자신의 상호교류에 대한 참됨을 알아보는 인식의 상징이다. 그것은 제 3자에게는 말이 안되는 불합리성을 띄고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내면의 진실이다. 그리고 사건은 정말로, "말을 마치기도 전에"(24:15) 리브가가 나타난다. 카라가 일어났다. 우연이 필연이 되었다. 사건이 계시가 되었다. 보이지 않게 감추어져 있던 약속은 이제 현실이 된다. 그의 선택은 참이 된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자신의 의지나 논리를 넘어서서 우주나 실재의 섭리가 된다.
④ 헤세드와 에메트(חֶסֶד וֶאֱמֶת): 언약적 사랑과 진실
계시의 한 구체적 응답으로서 리브가는 물을 긷으러 우물가에 나온다. 종에게 마시게 하고,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 마시게 한다. 종은 놀라움 속에서 그녀를 본다. 그리고 묻는다. "네가 누구의 딸이냐?"(24:23). 실재의 우연한 응답은 인간으로 하여금 여전히 순수한 응답 이전에 찬찬히 그것을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주 바라보는 ‘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바라봄을 넘어 말걸음도 일어난다. 그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녀가 대답한다. 다행히고 그녀의 응답은 종의 기대안에 질서화한다.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24:24). 아브라함의 친족이다. 그래서 종은 경배한다(키도, קָדַד).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한다. 그의 의미있는 선택과 방향에 대해 초월적 실재는 종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 영역 안에서 그의 순간이 의미있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그의 응답은 가장 근본적이고 절실한 삶의 표현으로 신적 실재에게 절한다. 눈에 펼쳐지는 일이 사건(encounter)이 되고 이제는 그 사건 속으로 자기 삶이 포함되어 정렬된다. 의미는 뜻있고, 삶은 생생해지며 그의 생은 전체의 온전성(wholeness)을 받아들여 빛나게 된다. 자기 내면의 빛을 만났으므로 그는 더 이상 외형의 ‘종’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종됨이라는 사회적 면모들을 벗고서 스스로 ‘귀인’이 되어 경배를 배우고, 눈을 하늘로 향하게 된다. 비로소 그의 입은 새로운 존재의 언어를 얻는다. 즉, 찬양의 언어를 배운 것이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헤세드(חֶסֶד)와 에메트(אֱמֶת)를 버리지 아니하셨사오며 나를 인도하사(나하, נָחָה) 내 주인의 형제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24:27).
헤세드란 ‘언약적 사랑, 인자, 신실함’을 뜻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베리트)에 기반한 변함없는 충성이다. 이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그것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리고 에메트는 진실, 성실, 신뢰할 수 있음. 윤리의 근본.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 약속과 성취가 하나인 것을 말한다.
헤세드와 에메트는 항상 함께 온다. 사랑 없는 진실은 냉혹하고, 진실 없는 사랑은 감상적이다. 그러나 헤세드와 에메트가 만날 때, 초월적 실재의 구체적인, 성육화된 성품이 드러난다. 그래서 인간은 본다. 거기 있음(Is-ness)을 인간은 안다. 그러길래 실존적 신앙은 이 두 가지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응답이다.
인간의 보편적 가능성으로서 전라의 ‘종’은 이제 안다. 이것은 이제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카라이지만 동시에 나하(인도하심)다. 신적 실재가 이끄신 것이다. 이런 경우 윤리적 경지는 떨어져 나가고 오로지 실재의 ‘온전함’만이 그에게 비추어진다. 인간이 무릎을 꿇을 수 있고, 새 존재의 언어로서 입이 열려 찬양을 하늘에 하게 된다.
⑤ 나하(נָחָה): 인도하다, 실재의 안내
나하는 “인도하다, 이끌다”란 뜻이다. 리더십으로서의 실재 안내이다. 자신의 본래성으로서 참됨과 더불어 삶의 구체적 요구에 대한 효율성이 응답한다. 둘 중 하나가 아니다.둘이 함께 협력하며 자신의 참됨은 이제 역사적 구체젓의 효율성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자신의 움직임과 나아감이 의미를 갖는다. 인도하심이 그 리더십을 온전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은 고백한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사(나하) 내 주인의 형제 집에 이르게 하셨다"(24:27).
실존적 신앙에서 ‘나하’는 결정적이다. 인간은 길을 알지 못한다. 종은 아람 나하라임으로 가는 길은 알았지만, 어느 집으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그는 우물가에서 멈췄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하를 구했다. "인도해주소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자아가 시작되어 움직이지만 영혼의 섬광을 통해 돌파(breakthrough)해 들어간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명에 대해 리더십을 통해 의지를 발휘해 나갔지만 이제 돌파를 통해 자아가 아닌 영혼을 접촉하며 인도함이 아니라 인도되심을 경험한다.
따라서 나하는 강제가 아니다. 그것은 초대다. 신적 실재는 인간을 밀지 않으신다. 그분은 앞서 가시고, 인간이 따라오기를 기다리신다. 종은 표지(요트)를 구했고, 궁극적인 실재는 리브가를 오트로 보내셨음을 그는 알았고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나하다. 부드럽지만 확실한 인도받기이다.
현대 지성인은 이것을 가장 어려워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시는가?" 우리는 명확한 지침서를 원한다. GPS처럼 정확한 안내를. 그러나 나하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물가에서 기다리는 것이고, 카라를 신뢰하는 것이고, 헤세드와 에메트를 기억하는 것이다.
종은 인도받았다. 그리고 이제 문턱에 선다. 이제 ‘우리’ 인간성의 대표자 종은 문에 선 것이다. 즉 더 해야 할 일이 존재한다.
2. 문안으로의 초대: "어서 들어가십시오“
리브가가 집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한다. 그녀의 오빠 라반이 나온다. 그는 종의 손에 있는 금고리와 팔찌를 본다(24:30). 그리고 우물로 달려가 말한다.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바라크, בָּרַךְ)여 들어오소서. 어서 들어가십시오. 왜 이렇게 밖에 서 계십니까? 내가 집을 정돈하였고 낙타들을 위한 자리도 준비하였나이다"(24:31)
이 문장은 심오하다. "왜 이렇게 밖에 서 계십니까?" 표면적으로 이것은 환대의 표현이다. 고대 근동의 관습. 손님을 집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읽으면, 이것은 실존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질문이기도 하다. 에크하르트의 돌파의 경계선이기도 하다.밖과 안을 가르는 경계선에 다가 온(come) 자에게 이제 자아에서 영혼의 길이 앞에 있는 것이다.
종은 문턱에 서 있다. 안과 밖의 경계. 이방과 약속의 경계.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경계. 그는 레크로 여기까지 왔다. 샤바를 짊어지고, 카라를 신뢰하며, 나하를 경험하며. 그리고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들어가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사유나 이성, 논리의 추상성을 내려 놓고 경험의 세계에 초대됨을 뜻한다.
"왜 이렇게 밖에 서 계십니까?"
이 질문은 모든 실존적 신앙인에게 주어진다. 당신은 왜 문턱에만 서 있는가? 왜 경계에서 머뭇거리는가? 왜 들어가지 않는가?
실존적 신앙은 문턱을 넘는 것이다. 안전지대를 떠나는 것. 알려진 것을 버리고 신뢰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윽고 종은 들어간다. 그는 낙타의 짐을 풀고, 발을 씻고, 음식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먹기 전에 말한다. "내 일을 말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24:33).
사명이 먼저다. 환대보다, 편안함보다, 심지어 생존보다. 종은 자기 현실에 대한 좋음을 내려놓고 자기 가슴에 있던 숨겨진 이야기를 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레크와 샤바의 이야기를. 카라와 나하의 이야기를. 헤세드와 에메트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그는 그 말함의 언어 속에서 사적인 것을 넘어 공적인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공적인 사명이 주어져 있었다. 그가 잊기 쉬웠던 눈에 보이지않던 공적인 진실/언약이 그의 입을 통해 튀어져 나온다. 그렇게 해서 평소에 쓰지 않던 새 존재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 머물며 말한다. 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넘어 인간의 본래성에 닿을 수 있었다. 비록 아브라함의 이야기이지만 그의 잊었던 생존의 깊이이자 샘을 퍼 올린 것이다.
⑥ 바흐르(בָּחַר): 선택, 인간의 길 열기
종의 이야기를 들은 후,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한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를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24:50-51).
이렇듯 최종 선택은 리브가의 몫이다. 다음 날 아침, 종이 떠나려 하자 리브가의 가족이 만류한다. "소녀가 우리와 함께 며칠이나 열흘을 머물게 하라"(24:55). 그러나 종은 급하다. "나를 지체하게 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 길을 형통하게 하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24:56). 그들은 리브가를 부른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24:58). 리브가가 대답한다. "가겠나이다"(אֵלֵךְ, 에레크).
에레크는 “나는 가겠다”이다. 레크은 1인칭 미래형이자 개인의 주관적 표현이다. 리브가는 자신의 레크를 선언한다. 이것이 바흐르(선택)다. 인간의 길을 여는 것 그리고 그 열린 길에 대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비록 그 결과가 눈에 안보일지라도 모호한 현실이라 할지라고 열려진 길에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 바흐르이다.
실존적 신앙에서 선택은 결정적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지만(나하), 인간이 선택해야 한다(바흐르). 카라가 일어나지만, 인간 개인이 응답해야 한다. 리브가는 종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아브라함을 만난 적이 없고, 이삭을 본 적도 없다. 그녀가 아는 것은 우물가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그의 간절한 눈빛뿐이다. 그리고 그 종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그녀는 선택한다. "가겠나이다." 이러게 말함으로써 그녀는 이제 그녀에게 아브라함처럼 익숙했던 아비, 친척, 본토를 떠나는 ‘부름’을 붙잡는다. 그녀는 자지우지하는 운명에 대해 모호하지만 선택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한다. 그게 내 삶이라고. 내게 주어진 길이면 나는 간다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모든 것을 알고 나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도 신뢰 속에서 선택하는 것. 리브가의 바흐르는 아브라함의 레크를 반향한다. 창 12:1에서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났듯, 리브가도 지금 떠난다. 과거가 어떠했더지 ‘지금 여기서’ 그녀는 새로운 선택을 한다. 물론 한 가지 추측은 그녀가 평소에 듣지못한 타자 아브라함을 통해 전해들은 ‘계약(covenant)’과 그의 아들 이삭에게 주어진다는 약속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새로운 이야기에 자신을 내놓는다. 아무런 안전의 보장없이 새 길을 낸다.
⑦ 바라크(בָּרַךְ): 축복, 흘러넘치는 생명
리브가가 떠날 때, 가족들이 축복한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가 그 원수의 성문을 얻을지어다"(24:60).
바라크(בָּרַךְ)란 ‘축복하다’의 뜻이다. 이 단어는 창세기 전체를 관통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창 12:2),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며(창 12:2),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창 12:3).
바라크는 단순한 좋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력의 전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흘러들어와, 인간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것. 축복받은 자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리브가는 축복받는다. 그녀는 이제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그녀는 아브라함 계약의 연속이다. 이삭을 통해, 야곱을 통해, 열두 지파를 통해, 결국 온 세상을 축복할 생명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 모호한 약속은 이세대인 이삭의 파트너로서 그녀가 함께 생을 걸고 지켜야 할 보이지 않은 약속이다. 제물이 될 뻔한 이삭에만 아니라 아내가 되는 리브가에게도 낯설은 ‘약속’이다. 더군다나 정작 그 당사자 아브라함은 이제 홀로된 노인이 되지 않았는가? 늦었어도 한 참 늙은 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삭을 배우자로 선택하며 그 모호한 약속을 ‘가보’로 가슴에 품는다.
우리의 실존적 신앙은 바라크를 추구한다. 자기만의 행복이 아니라, 타인을 축복하는 생명.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는 것으로 흘러가는 존재. 리브가는 가면서 현실화되지 않은 축복을 짊어진다. 그러면서 이제 그녀는 깨닫는다. 남에게 ‘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무엇을 품었는가가 중요한 것임을. 나를 심판하는 자는 결국 남의 의견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알기에 자신의 내면 깊이에 숨어있던 자기 ‘진실’에 응답하며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3. 들을 가로질러: "저분은 누구입니까?"
⑧ 말라크(מַלְאָךְ): 천사, 선의 대리인
종과 리브가의 일행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긴 여정이었다. 낙타를 타고, 광야를 건너고, 강을 건너고. 그렇게 시간은 천천히 흐름을 만들었고, 그 시간의 흐름속에서 ‘돌아옴’을 익힌다. 그 모든 ‘돌아옴’의 시간 동안 리브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녀는 선택했다. 바흐르. "가겠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 선택의 무게가 실감난다. 낯선 땅, 보지 못한 남편, 알지 못하는 미래. 두려웠을까? 설레었을까? 후회했을까? 성경은 침묵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종이 함께 있었다는 것. 종은 단순한 안내자가 아니다. 그는 말라크(מַלְאָךְ)처럼 기능한다. 천사. 하나님의 사자. 선의 대리인.
말라크(천사/사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종은 이름도 없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주인 아브라함과 하나님만을 증거한다. 그녀는 그 종을 당시 문화였던 ‘물건’이 아니라 인도의 중재자로 설정한다. 그녀는 그를 높이 고양시켰다. 현실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그렇게 해서 단순한 인간 여성 리브가도 그 고양시킨 눈으로 인해 자신도 변한다. 천사라는 말라크가 자기 주변에 실재하기에 그녀도 천사의 품을 지니게 되었다.
실존적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말라크를 만난다. 때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때로는 사건의 형태로, 때로는 내면의 음성으로. 그들은 우리를 인도한다(나하). 그들은 우리의 선택(바흐르)을 확인해준다. 리브가에게 종이 그랬듯이. 더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그 고통과 고난이 심하고 위험한 순간에 더욱 뚜렷이 말라크가 우리 옆에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그 위험한 순간으로 인해 평소 보지 못했던 말라크의 존재함을 비로소 선물로 얻었다(눈떠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⑨ 요트(אוֹת): 표징, 체험으로서의 삶
이제 여정이 끝나간다. 돌아옴의 사건도 그 끝에 다다른 것이다.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더라.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려고"(24:62-63).
히브리어 수아흐(שׂוּחַ)는 놀랍게도 ‘명상하다, 기도하다, 걷다’란 뜻이다. 이삭은 들판을 거닌다. 저물 무렵.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 그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보낸 종을. 알지 못하는 신부를.
"그가 눈을 들어 보니 낙타들이 오는지라"(24:63).
그리고 리브가도 본다.
"리브가도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24:64).
두 사람이 동시에 본다. 서로를. 들을 사이에 두고. 아직 가깝지 않지만 분명히 보이는 거리에서. 그리고 리브가가 종에게 묻는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시는 저분은 누구입니까?"(24:65, 공동번역).
저분은 누구입니까?는 영혼의 궁극적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하다. 저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이었다. 종이 대답한다. "내 주인이니이다"(24:65). 그러나 영적으로 읽으면, 이것은 모든 신앙인의 궁극적 질문이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시는 저분은 누구입니까?"
들. 광야. 비어 있는 공간. 알 수 없는 영역은 인간 실존의 불확실성을 나타낸다. 그 들을 가로질러 누군가 온다. 리브가는 그를 본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 저분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진정 몰라서 묻는 질문이었는가? 아닐 것이다. 그가 그녀가 돌아옴의 시간 여정 속에서 비로소 이제는 실재로 눈앞에 보이는 이삭을 두고 저분은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궁극적인 확인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 깊이에서 그 질문은 오히려 이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리브가를 향한 질문이었다. 이제 이것이 너의 현실이 될 것이다라는 각오의 표현이다.
그는 약속의 화려함 앞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들이라는 사막의 없음, 작음, 그리고 모호함의 벌판속에서 자신에게 운명이 되고자 앞에 펼쳐져 있다. 그녀도 화려한 침대의 생활을 꿈꾼 것은 아니지만, 막상 들판의 앞에 서서 막막한 들의 시간이 전개되는 앞날을 보면서 그녀는 ‘들어옴’의 새 시간, 새 존재의 나아감을 새롭게 각오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인생의 들판을 가로질러, 시간의 광야를 건너,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분은 누구인가? 우리는 표지(요트)를 본다. 흔적을 감지한다. 카라를 경험한다. 나하를 느낀다. 그러나 여전히 묻는다. "저분은 누구입니까?"
실존적 신앙은 이 질문을 품고 산다. 쉬운 답을 거부한다. "내 주인"이라는 종의 대답은 사실적이지만 불충분하다. 리브가는 이삭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와 결혼하고, 함께 살고, 아이를 낳고. 그러나 그 "앎"은 점진적이다.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들을 가로질러 오시는 그분"—하나님—을 아는 것도 평생의 여정이다. 우리는 표지를 본다. 헤세드를 경험한다. 에메트를 발견한다. 그러나 여전히 묻는다. "저분은 누구입니까?" 과거의 습관은 비록 약간의 떡고물이 있었을지언정 그 과거의 습관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새롭게 선택한 지금의 눈앞도 막막함은 여전히 남는다. 그 막막하고 모호한 들판 속에서 우뚝 서서 건너옴이라는 다가감을 일으키는 당신-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를 새롭게 일어서게 한다. 이 질문은 절망이 아니다. 그것은 경외다. 신비 앞에 선 겸손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신뢰 속에서 어찌되었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⑩ 키도(קָדַד): 경배, 가장 숭고한 응답
리브가가 듣는다. "내 주인이니이다." 그리고 "장막을 가져다가 얼굴을 가리더라"(24:65).
얼굴을 가린다. 겸손의 표현이다. 신부의 면사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거룩함 앞에 선 인간의 자세인 것이다. 종이 우물가에서 했던 것처럼(24:26, 48), 리브가도 이제 보이지 않는 분 앞에 선다.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말하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잃은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24:66-67).
종은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레크와 샤바와 카라와 나하와 헤세드와 에메트와 바흐르와 바라크를. 그리고 이삭은 리브가를 맞는다. "사랑하였으니"(אָהַב, 아하브).
그 모든 종의 언어가 이제는 하나로 향한다. 그의 말을 믿고 신뢰하며 행위로 나아간다. 그것은 아내를 맞이함 그리고 실재의 궁극성으로서 ‘사랑’속으로 들어감이다. 삶의 다양성과 낯설음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헌신과 결단을 통해 융합과 통합의 길이 열린다. 이것이 키도(경배)의 완성이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선택으로서 신적 실재에 대한 응답이다. 경배는 무릎 꿇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이다. 신뢰하는 것이다. 헌신하는 것이다.미완성이 인간으로 보이지만 그 미완성을 이 경배, 키도에 의해 변화되어 신비로 향한다. 이렇게 리브가는 아브라함을 새롭게 한다.
이삭과 리브가의 새로운 만남은 두 인간의 사랑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반영한다. 들을 가로질러 오시는 분을 맞이하는 것. 알지 못하면서도 신뢰하는 것. 얼굴을 가리면서도 나아가는 것을 경배를 통해 사랑의 궁극성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에필로그: 들판 사이에서
창세기 24장은 다시 한번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왜 이렇게 밖에 서 계십니까?"(24:31)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시는 저분은 누구입니까?"(24:65)
첫 번째 질문은 초대다. 문턱을 넘으라는. 머뭇거리지 말고 들어오라는. 실존적 신앙은 문턱에 서 있지 않는다. 그것은 들어간다. 레크. 바흐르. 결단한다.
두 번째 질문은 경외다. 들을 가로질러 오시는 분 앞에 선 겸손. 알지 못하면서도 바라보는 것. 실존적 신앙은 모든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질문하며 나아간다. "저분은 누구입니까?"
이 두 질문 사이에 우리의 신앙이 있다. 우리는 문턱에 초대받는다. 문턱이라는 경험 앞에는 모호함과 복잡함 그리고 알수없음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목의 인간성으로서 ‘종’인 우리는 몇 가지 보이지 않지만 삶에서 중요한 삶의 의미영역을 전해 듣는다. 즉, 삶 속에서 샤바(서원)를 맺고, 레크(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우리는 카라(우연)를 경험하고, 나하(인도하심)를 발견한다. 헤세드(언약적 사랑)와 에메트(진실)를 증거한다. 그리고 바흐르(선택)한다. "가겠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들판을 가로질러 오시는 분을 본다. 아직 가깝지 않지만 그 모호함속에서도 흐릿하게 보이는 상징들을. 우리는 요트(표징)를 감지하고, 말라크(천사)의 인도를 받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움직임 속에서 묻는다. "저분은 누구입니까?"
답은 평생에 걸쳐 주어진다. 키도(경배) 속에서, 아하브(사랑) 속에서, 함께 사는 삶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깊이 안다. 그러나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실존적 신앙은 완전한 지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충분한 신뢰를 요구한다. 문턱을 넘을 만큼의 용기를. 들판을 가로질러 오시는 분을 맞이할 만큼의 열린 마음을.
"어서 들어가십시오. 왜 이렇게 밖에 서 계십니까?"
들어가라. 헤세드와 에메트가 기다린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시는 저분은 누구입니까?"
바라보라. 그분이 오신다. 우리를 향해. 바라크를 가지고. 생명을 가지고.
그리고 우리는 응답한다. 리브가처럼.
"가겠나이다."(אֵלֵךְ)
레크. 나는 간다. 문턱을 넘어. 들판을 가로질러. 알지 못하는 미래로. 그러나 혼자가 아니다. 말라크가 함께하고, 나하가 인도하고, 헤세드가 동행한다.
이것이 실존적 신앙이다. 고뇌와 아픔, 두려움과 결핍의 시간성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온전성의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것. 복잡한 사건, 미숙한 존재의 미완성을 융합시키며 신비로 나가게 하는 온전성으로서 엘레크. 문턱과 들판 사이에서, 질문과 신뢰 사이에서, 인간 의식의 종교적 삶이 창조적으로 형성된다. 아무런 증거없이 내면이 열리며 인간성의 길이 열린다.
우리는 모두 리브가다. 낙타에서 내려, 얼굴을 가리고, 묻는다.
"저분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모두 종이다. 문턱에 서서, 초대를 듣는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이 두 음성 사이에서, 신앙은 살아 숨 쉰다. 과연 이런 실존적 신앙의 암호앞에 서고자 하는 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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