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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 마지막 겨울방학 때에 혼자서 여행한 기록이 저장되어 있는 것을 여기에 옮겨 보면서 여수에서의 생활 기록을 마감하려 한다.
★78년 겨울방학 여행일지(1월 30일-2월 3일)
방학이 되면 의례히 어딘가 여행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탓이라고 해야 할까, 금년 겨울방학도 그대로 집에서만 지낼 수 없다는 심사에서 한번쯤 가 봐야 될 필요성이 있는 서울 누나 집을 향하는 것을 시발로 해서 며칠 돌아다니고 온 것을 여기 정리해 봅니다. 방학이 가까워 올 때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방학 중에 반드시 1회 이상 여행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여수보다 가급적이면 큰 도시로 혼자서 여행을 하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해 보고 보다 발전된 곳에서의 학생들과 접해 보라는 권고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여행을 생각했고 방학이 끝나면 여행이야기를 함께 해보자고 했습니다.
여행은 즐거운 것이요, 아마 내 생활에서 여행은 취미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혼자 하는 여행의 경우는 해방감, 자유 등을 더 만끽할 수 있는 것 같았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에서의 행동은 정말로 거리낌 없는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것 같은 것이 이번 여행에서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았습니다.
1월 28일에 서울행 고속버스표를 예매했고, 30일 9시 출발버스로 서울로 향했습니다. 비교적 따뜻했던 전날들과는 달리 출발하는 날 아침에는 눈도 제법 많이 싸여 길이 미끄러웠고 추운날씨였습니다. 터미널까지 걸어가면서 3번이나 하마터면 넘어질 번 하기도 했습니다. 고속도로에도 눈이 쌓여 불안감을 주기도하고, 또 누나 집에 가는 것이 당신도 알다시피 매우 무거운 마음이었습니다. 작년 겨울방학 때 서울과 상률이가 근무하던 전방지역을 방문하는 여행을 하면서 은숙이 집에서 지껄인 말이 화근이 되어 누나로부터 원망스런 편지를 받았고 가족들에게도 심려를 끼친 것 같아 사죄하는 것이 주목적으로 되어 있는 여행인지라 무거운 마음 감당키 어렵고 가기 싫은 발걸음이었습니다. 또 출발 전날 밤의 전야제가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지요. 아버지께서 형제간에 의좋게 지내라고 당부하면서 기형이도 형을 원망한다는 말씀에 당신은 서운한 마음이었든지 상당시간 흐느껴 울기도 했지요. 남편의 여행 전날이기에 그러 안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신은 달래도 듣지 않고 그동안의 쌓였던 설움이 복받친 것처럼 계속 흐느꼈고, 피곤했던 나는 그냥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호남고속도로 눈 위를 달리는 버스는 눈에 지장 없이 잘 달렸습니다. 버스 안에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당신과 함께 여행하지 않은 것을 새삼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전남북을 경계 짓는 사남 터널을 지날 때 안내양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터널이라는 차내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1시간 30분쯤 지나 전주를 통과하고 전주에서부터는 유료도로였습니다. 여남 휴게소에서 버스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밖에 나와 바람도 쐬면서 봉지 우유1개를 사 먹고 다시 버스에 올라와 앉아 있는데 승객 중 한 청년이 인사를 하기에 누군가 했더니 백수중에 있을 때 가르친 제자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시험을 봐서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간다고 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하고만 가는 줄 알았는데 아는 사람이 나타나서 반가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버스가 충청도에 접어드니 눈이 거의 없었습니다. 11시경 대전을 지나면서 경부고속도로 4차선에 접어드니 버스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습니다. 내가 탄 버스의 기사가 매우 차를 빨리 모는 것 같았고 예정시간보다 40분 빨리 도착하여 12시 40분에 서울 터미널에 내렸습니다. 강남으로 터미널이 옮겨진 뒤 처음이어서 터미널부터 여기저기 구경했습니다.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인 데가 많고 한쪽에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어 한번 들어가 볼가 하다가 그냥 갔습니다. 돌아올 때 결국 한번 들어가 보았는데 주로 술을 팔고 있고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없어 그냥 나왔습니다.
터미널 구경을 대략하고 누나가 사는 삼양동행 23번 시내버스를 타니 1시간 반 정도 걸려 누나집 근처에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누나집 근처는 1년 전과는 달리 도로가 확장되고 변화가 있어 누나 집을 찾는데 약간 헤매기도 했습니다. 배가 고파 도로변 중국집에서 짬뽕을 사 먹고, 귤 1봉지를 사 들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누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난희가 문을 열어 주고 뒤따라 누나가 나오면서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냉대하려나한 것은 기우였고 허물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형제간의 오해는 쉽게 풀릴 수 있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에 들어오신 자형과의 이야기도 화기애애하게 작년의 잘못을 사과할 수 있었고 상경목적을 쉬게 달성한 셈이었습니다.
다음날은 인모가 서울대학에 시험 본 것 발표 날이라 해서 함께 서울대학교도 구경할 겸 가보았습니다. 인모는 고3을 거치지 않고 고3 나이에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본 시험이었기에 기대하기 어려웠고 떨어진 것이 당연했습니다. 서울대 학생식당에서 햄버거와 커피로 점심을 대신하고, 인모는 집으로 보내고 나는 여관을 하는 은숙이 집으로 갔습니다. 여관에 가니 마침 박서방도 있어서 같이 이야기하며 놀다가 저녁까지 얻어먹고 다시 누나 집으로 왔습니다. 은숙이와 누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탓인지 내가 들어가니 누나 집의 식구들이 좀 냉랭한 것같이도 느껴졌습니다. 양쪽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조심을 많이 했습니다. 은숙이 집에서는 여관으로 성공해서 3년 동안에 천만 원을 벌었다는 이야기며, 새 여관을 2천백만 원에 사 왔는데 3개월 만에 3천5백만 원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지만, 4천 5백만 원에 팔 작정이라는 등 여관에서 일어나는 여러 불륜의 얘기들만 듣고 온 셈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양심도 없는 삶의 모습들이 답답한 인생들이지만 나름대로의 취미와 보람을 가꾸는 것에는 누구 못지않은 열심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누나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다음 날은 일찍 서울을 떠나고 싶었으나 누나 집의 아침식사가 10시에 이루어져서 아침을 얻어먹고 나오느라고 출발이 늦어 12시가 다 되어 터미널에 나왔습니다. 누나가 유행이라고 당신과 제수에게 주라는 쇼올과 어머니 털모자를 가져다주라고 하는데 내가 집으로 바로오지 아니하고 여행을 할 거라 짐이 싫다고 다음에 전해주라고 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무슨 덕을 보는 것 같이 무엇인가 주는 것을 받아 들고 오기가 싫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실용성도 없는 것이기에 덕을 보지 않는 것이 당신과 내 생활에서 더 떳떳한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덕을 보기보다는 가난한 생활일지라도 덕을 베풀면서 살도록 합시다. 그런 것이 삶의 보람이 될 거니까요.
터미널에 도착해서 다소 망설이다가 13시 출발 부여행 표를 구입했습니다. 출발시간이 여유가 있어 포장마차에도 들어가 보고 주택복권도 한 장 사면서 이곳저곳을 일 없이 둘러보았습니다. 오후 4시경 부여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조용하고 시골 냄새가 물씬 나는 거리풍경에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근처에서 자장면으로 시장기를 메우고 곧 박물과에 갔습니다. 국립 박물관은 건축양식이 특이한 건물이고 웅장하였으나 내부에 진열된 것들은 내 눈에는 쇠붙이와 돌조각 얼마를 전시해 놓은 것에 불과하여 문외한으로서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내부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덕분에 추위에 언 몸을 녹이고 나왔습니다. 박물관에서 나와 부소산에 갔습니다. 눈으로 덮인 부소산의 등산로는 사자루가 있는 정상까지 많은 발자국이 있어 걷기에 좋았습니다. 내 뒤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여행 백 하나 들고 따르고 있었고, 산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신혼여행인 듯한 한 쌍, 그리고 연인사이 같은 또 한 쌍 외에는 사람이 없어 호젓한 눈길 위를 혼자 터벅터벅 걷는 마음이 쓸쓸하면서도 자유와 해방감 같은 기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산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 바빴습니다. 천천히 생각을 하며 여유를 가지고 걷고 싶은 곳인데 그렇게 못했습니다. 사자루에서 낙화암까지는 층층대를 많이 내려가는 길이기에 진주 진양호가 연상되었고 당신과 용만이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다시 한 번 함께 손잡고 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란사는 밖에서 안이 다 보이는데 입장료를 별도로 받기에 진주 촉석루를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매표소 사람이 그냥 돌아서는 나를 보고 웃었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고란사 내려가는 길은 눈을 잘 쓸어 놓아서 다니기에 좋았고 고란사에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그 길을 걸어갔다 온 것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기념 책을 파는 아줌마가 반가운 듯 집 안에서 뛰어나와 하나 사 달라고 따라다니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 하나 사 줄까하다가 그 아줌마가 방학 중이라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온다고 해서 사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나 혼자뿐이었지만 사람들이 계속 오니까 괜찮다는 뜻인 것 같아 필요 없는 것이라 사지 않았습니다. 사자루, 낙화암, 백화정, 고란사, 군창지, 영일루, 삼층사 등을 차례로 구경하고 다니면서 청포 알사탕 한 봉지를 사서 하나씩 입에 넣고 다니면서 인생도 사탕같이 달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7시경 부소산을 나와 버스를 타고 논산으로 갔습니다. 볶음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시내구경을 좀 하다가 9시가 넘어 한남여관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내가 논산거리를 배회할 때 마침 홍 수환이가 일본에서 권투시합을 하고 있었고 거리 중간 중간에서 TV를 보는 사람들의 함성소리에 이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관을 택하는 데에도 조금 신경을 썼습니다. 군청과 다른 관공서들이 위치한 곳에 있는 여관이 비교적 깨끗하리라는 생각에 그곳을 택했습니다. 서울에서 여관이란 곳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탓으로 여자와 밤을 함께하지 안 해도 자연스러운 곳이 어딜까 하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여관에서 아침밥까지 사 먹고 거리에 나오니 중고생들이 등교하느라 거리를 메우고 있어서 한 학생에게 물어 보았더니 방학이 끝나고 개학해서 학교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명절을 고려해서 방학을 했기에 아직 개학을 안 하고 있는데 논산은 명절도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에게 길을 물어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에 갔습니다. 동향하고 있는 은진미륵 앞에 서니 마침 방금 떠 오른 아침햇살이 커다란 돌부처 전체를 깨끗하게 비쳐주고 있어서 시간을 참 잘 택해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오래전 사람들의 예술솜씨를 밝은 모습에 현혹되어 상당시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38년간의 공사로 완공된 것이라 했고 돌 둘을 연결해서 만든 불상이 그대로 거대하다는 말만으로 전부가 될 것 갔습니다. 관촉사 옆으로 층층대가 있어 따라 올라가 보니 긴 잔디밭이 있고 제법 높은 곳에 허술하긴 했지만 반월성 전망대가 있었습니다. 잠시 머물다가 바로 아래로 논산 시내가 보이기에 길은 모르지만 시내를 바라보면서 하산했습니다. 숲속 길을 혼자 오르고 혼자 내려오면서 대통령은 이러한 길을 혼자는 못 다닐 거라는 생각을 하며 새삼 내 처지가 너무도 자유스럽고 좋아서 대통령 부러울 것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활짝 한번 켜 보았습니다. 산길을 내려 올 때는 사람도 없고 길도 제법 멀어서 예정된 기차시간에 늦을까봐서 초조하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시간을 맞출 수가 있었습니다. 다소 피곤했지만 다음 행선지를 생각하고 이리까지 표를 사서 이리로 향했습니다.
이리 역은 얼마 전에 있었던 폭파사고로 100m정도의 파괴된 모습이 남아 있고, 뒤쪽에서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으며 다른 지역과 별다름 없는 시가지 모습이었습니다. 전주행 열차를 기다리느라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젊은 엄마가 아기를 등에 업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고 옆에 있던 나이든 아줌마가 가서 도와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기 엄마는 첫아이로 두어 달 된 아기를 업으려 한 것이고 그 모습이 서투르다는 것을 본 아줌마가 도와 준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골 역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리에서 전주까지 동차로 한 시간이 못 걸렸고, 곧 전주 누나 집에 갔더니 누나와 자형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누나 집은 어딘가 살림이 어수선한 것 같고 차분하지 않아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점경기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앞으로 보면 남은 것 같은데 뒤로 보면 밑지는 것이 장사라 한 것이 실감난다는 누나의 말이었습니다. 1년 6개월의 장사를 정산해 보니 빚만 60여만 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형제들 중에 현재는 전주 누나가 가장 부유하게 생활하는 것 같고 생활에 활기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다음날은 정읍에 가서 처제인 현희 집에 갔습니다. 잠시 들렸다 오려고 갔는데 유서방이 없어 점심을 얻어먹고 기다린 것이 많이 지체했습니다. 곧 오겠다고 했는데 마침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늦었다고 하면서 네 시가 다 되어 나왔습니다. 처제 흉을 좀 볼까요? 처음으로 처제가 차려 준 밥을 먹었는데 음식 맛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꽁꽁 얼어버린 김치는 먹을 수가 없고, 찌개를 해 준 것이 너무 맛이 없고 국도 그런데 겨우 밥 한 그릇을 먹었습니다. 밥에도 바위(?)만한 돌이 있어 입에서 굴러다녔지만 씹지는 않고 가려내어 다행이었습니다. 당신의 음식솜씨가 좋다는 것을 새삼 생각했습니다. 나는 집에서 먹는 음식이 가장 맛이 있어서 다른 곳에서는 먹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까요. 음식솜씨가 좋은 아내와 같이 사는 것이 큰 행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희 집에 살림살이는 좋았습니다. 이불장, 찬장, 책장 등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전축 TV, 등이 잘 갖추어져 있고 집도 넓어 우리보다 훨씬 생활이 좋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서방이 터미널까지 배웅을 해주고 잠시 찻집에서 대화도 하고 고창까지 표도 사 주어서 고창에 와서 바로 연결된 영광행 버스로 바꾸어 탈 수가 있었습니다.
고창에서 영광까지는 아스팔트도 아니고 눈이 와서 빙판길이었습니다. 손님도 거의 없고 그나마 대마에 오니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 영광읍에 내려 이모 집에 전화해 보고 당신이 만곡에 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도 많이 오고 또 당신이 오기 싫어한 것을 알기에, 와 있다는 소식은 반가웠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저녁 7시가 넘어 만곡 집에 들어가니 용만이가 제일 반가와 한 것 같았고, 당신의 표정은 별로인 것 같아 혹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을 순간 했습니다.
많이 쓴 것 같네요. 손가락이 좀 아프니까요. 기록하면서 다시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여행은 계속되어야겠지요. 내일 광주에 갔다가 다시 여수 우리가 살고 있는 방에까지 가야 되니까요. 인생 나그네 길에서 당신과 나의 여행길은 어느 곳이 종점이 될는지 예측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우리는 함께 인생길을 여행 할 것이므로 좋은 여행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번 나 혼자 여행하면서 겨울 나그네라는 말을 가끔 생각했습니다. 박 목월 시인이 겨울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요. 내용은 모르면서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인생 나그네 길도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지만 늘 새롭게 계획하고 노력하면서 알찬 여행길이 되도록 꾸려나갑시다. 우리의 여행길에는 하나님이 함께해 주심을 믿고 또 늘 간구하면서 그렇게 살아갑시다. -78. 2. 4. 영광 만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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