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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이회영 6형제, 광복자금 600억 들고 ‘가문의 이동’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한 사회의 지배층이 권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도덕성과 정신으로 일반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처럼 건강한 사회는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지배층의 존재는 그 사회의 가장 강한 힘이다. 게다가 온 가족이 모든 것을 바쳤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혹한 속 집단망명. 우당 이회영은 1911년 정월 6형제 일가족 60여 명을 이끌고 횡도촌에 도착했다. [그림=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미대 교수]
절망을 넘어서
⑥ 일가 망명
여류 독립운동가였던 정정화는 자서전
정정화 여사의 이 말은 구한말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남작의 작위를 받았던 시아버지 김가진(金嘉鎭)이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한 뒤 일제의 선전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만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사대부들의 횡도촌 집단 망명은 더욱 큰 가치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이상설·이회영·이동녕 등은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했던 경험을 횡도촌 건설에 되살렸다. 이은숙 여사는 이회영이 이때 ‘이병삼에게 식량과 김장도 미리 준비하라고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런 준비를 마치고 귀국한 이회영·이동녕은 이은숙 여사가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고 회고한 대로 집단 망명을 실행했다.
또한 이회영은 집안 형제들을 설득했다. 이관직의
“지금 한·일 강제병합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라고 설득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은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는 것이 “대한 민족 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면서 함께 만주로 가자고 설득했다.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로서 위로 이건영·석영·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시영(초대 부통령)·호영이 있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명가 출신들에게는 봉건적 구습 타파에 앞장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회영은 첫부인 달성 서씨와 사별한 후 한산 이씨 은숙(恩淑) 여사와 재혼하는데 이 여사의 자서전
이회영과 같이 활동했던 권오돈(權五惇)은 “(이회영이)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놓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고 전한다. 횡도촌에 합류하는 석주 이상룡(李相龍)의 연보인
이상룡의 사돈이기도 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도 마찬가지였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軍師長)으로서 의병들의 서울진공작전을 총지휘했던 허위는 1904년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자 제출한 10가지 개혁안 중에 아홉 번째가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신분제, 남녀차별 같은 봉건적 인습이 조선 사회를 낙후시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는 뼈아픈 반성이 담긴 행위였다.
이정규는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방매(放賣)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大家)의 범절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여 하속(下屬)의 입을 막을 수 없는 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
급매하다 보니 제값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가가 전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40여만원으로 당시 3원 정도이던 쌀 한 섬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돈으론 대략 600억원의 거금이 된다.
일가가 이런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둘째 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이은숙 여사가 “영석장(潁石丈:이석영)은 우당 둘째 종씨(從氏)인데, 셋째 종숙(從叔) 댁으로 양자(養子) 가셨다. 양가(養家) 재산을 가지고 생가(生家) 아우들과 뜻이 합하셔서 만여 석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에게 출계(出系)해 상속 받은 1만여 석의 재산을 내놓았던 것이다.
1911년 발생하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의 자금 모금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이회영 형제의 재산이 주요한 ‘광복 자금’이 되었다.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급히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은숙 여사는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酒幕)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타인 보기에는 주막’이 이건승·홍승헌 일행이 달포 이상 몸을 숨겼던 신의주 사막촌(四幕村)이었다. 이은숙 여사는 압록강 도강 장면에 대해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가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세 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강빙(江氷:얼어붙은 강)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李宣九)씨가 마중 나와 처소(處所)로 간다”고 묘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망명객들은 안동현에서 이동녕의 매부 이선구의 안내를 받아 횡도촌으로 향했다. 횡도촌에서는 이동녕의 친족 이병삼이 망명객들을 맞이했다.
이회영 일가는 워낙 대가족이었기에 여럿으로 나누어 각각 압록강을 건넜다. 이은숙 여사는 “우당장(이회영)은 며칠 후에 오신다고 하여 내가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하여 몇 시간 머물다가 새벽에 안동현에 도착하니, 영석장(이석영)께서 마중 나오셔서 반기시며 ‘무사히 넘어 다행이라’ 하시던 말씀을 지금도 상상이 되도다”라고 회고했다. 이은숙은 “12월 27일에 (이회영이) 국경을 무사히 넘어 도착하시니 상하 없이 반갑게 만나 과세(過歲:새해 맞이)도 경사롭게 지냈으나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이 있으니요”라고 회고했다.
1910년에 나라는 빼앗겼지만 1911년 새해는 망명지에서 맞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1911년 정월 9일 6형제 일가족 40~60명은 말과 마차 10여 대에 나누어 타고 안동현을 떠나 횡도촌으로 향했다. 이은숙은 “6~7일 지독한 추위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요. 그러나 괴로운 사색(辭色)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면서 “종일 백여 리를 행해도 큰 쾌전(快廛:큰 가게)이 아니면 백여 필이 넘는 말을 어찌 두리요. 밤중이라도 큰 쾌전을 못 만나면 밤을 새며 가는 때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6~7일을 달려 이회영 일가는 횡도촌에 도착했다.
횡도촌에는 먼저 도착한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소론계 강화학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작은 마을 횡도촌에서 상봉한 것이었다. 강화학파의 행적을 추적한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망국에 무한책임을 느끼는 선비들로서 망명지에서 상봉한 것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순탄하지 못할 앞날도 감정의 표출을 자제케 했다.
훗날 민족단일전선 신간회의 회장이 되는 월남 이상재(李商在)는 이회영 일가의 망명 소식을 듣고,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라고 평했다. 그러나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에게는 이후에도 시련의 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회영(李會榮)
이회영(李會榮, 1867년 3월 17일[1] ~ 1932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고려, 조선의 양반가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익재 이제현과, 조선 선조조의 정승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1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였다.[2]
출생과 가계 배경
우당 이회영은 1867년 3월 17일 한성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 1835~1906)[3]이다. 7형제 중 넷째 아들로서. 위로는 세 형인 건영, 석영, 철영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인 시영과[3] 여동생 2명이 있었고, 이복 동생으로는 소영, 호영이 태어났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바로 밑의 동생이었다.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이었으며 일찍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거나, 나아가 남의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3]
이회영의 집안은 경주 이씨로 그의 가계는 신라, 고려와 조선에서 대대로 문무관료를 배출한 양반 가문이었다. 신라의 개국공신 이알평의 후손이자 통일신라 소판 이거명의 34대손이었다. 고려의 문하시중 이제현과 이항복의 후손으로, 조선 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소론의 지도자 이광좌는 그의 6대 방조(傍祖)였고, 이시영의 7대조 이세필(李世弼)은 형조참판이었고, 6대조 이태좌(李台佐)는 소론의 중신이자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5대조 이종성(李宗城)은 의정부영의정을 지냈고, 노론일색의 조정에서 사도세자의 몇안되는 후견인이기도 했다.
외교관으로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지낸 당대 정치거물이며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변절한 이하영(李夏榮), 국문학자 이준영(李準榮) 형제[4]는 이시영의 12촌 종형이었다. 이하영·이준영 형제의 아버지인 증 내부대신(贈內部大臣) 이유수(李裕脩)는 그의 아버지 이유승과 10촌 종형제간이었다.
외가 역시 벌족으로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으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이었다.
당색으로는 소론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이유승은 정치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여동생은 동아일보의 기자와 상해 임시정부의 복무원을 지낸 평산 신씨 신재희에게 시집갔는데, 신재희는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여섯째 형이자 동복 형이었다
결혼과 개화 사상
그뒤 이회영은 결혼식을 교회에서 신식으로 올렸고, 여성의 재가를 꺼리는 당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잃은 누이 동생은 거짓으로 부고를 낸 뒤 다시 결혼시켰다. 그뒤 1906년 부친 이유승이 사망하자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 해방시켰다.
양반가의 자제로 유년기에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그는 유교 성리학에서 기독교 감리회로 개종한다.
1885년에 달성 서씨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1907년 1월 중순에 사망하였고, 1908년 10월 20일 이은숙과 상동 교회에서 재혼했다.[3] 먼 족친인 이상설(李相卨)과 절친했던 그는 그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계몽, 강연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그는 여준(呂準)·이강연(李康演)·윤치호(尹致昊)·남궁억(南宮檍)·이상재(李商在) 등의 인사들을 만나 접촉하였다.
독립, 계몽 운동
독립협회에 참가하고 장훈학교를 설립하는 등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장훈학교의 교사 외에 공옥학교의 학감으로도 초빙되었다. 공옥학교의 학감으로 있을 때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그는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김홍량, 이동휘, 신채호, 최광옥, 이시영 등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 조직하여 신민회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했고, 신민회 회원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차츰 가시화되자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여 1906년 10월,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였다.[3] 한편 그는 서전서숙의 교장으로 이상설을 초빙하여 동지획득과 교포교육에 주력하게 했다.
1907년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조약 체결의 억지,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였다.[5] 고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지만 일본의 조선통감부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는 고종의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만주로 파견했다.[5] 그러나 자금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서전서숙은 1907년 10월경 문을 닫고 말았다.[3] 1908년 이상설과 운동방책을 협의하여 이상설은 국외에서 활동하고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는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 등 각 학교에 파견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
망명
1909년 그는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 이동녕, 주진수(朱鎭洙), 안태국, 양기탁, 윤치호, 이승훈, (李昇薰),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김도희(金道熙) 등과 함께 신민회 간부총회의를 소집하여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를 후보지로 결정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12월, 6형제는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겨울에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였던 이회영이라 한다.
이때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였으며, 대가족이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이상룡, 허위의 집안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온 가족이 독립 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가문이다. 이회영 일가는 지린에 정착하여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독립 운동을 위한 기반 닦기에 들어갔다. 당시 위안스카이가 이회영 일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한인 토지 매매를 후원했다고 한다.[3]
그러나 그가 출국한 직후 신민회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만주의 군관학교로 보내기로 결의한 사실이 일본의 정보망에 접수되고, 자금을 모금하던 안명근의 행보가 탄로나면서)안악 사건 참조) 무관학교 설립에 차질을 빚게 된다. 만주 통화현 광화진의 합니하 강가에 일시 정착하며,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주변 황무지를 개간하며,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활동 등을 하는 등 독립운동가 양성 기지 건설에 매진했고, 1911년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최초의 재만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신흥무관학교 활동
1912년 경학사를 만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반(哈泥河畔)으로 옮겼다가, 경학사를 모체로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여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해 흉작으로 경학사를 해산하고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진력했다.
1913년부터 1919년까지 이회영은 극비리에 국내에 잠입하여 여러 인사와 접촉하였으나 극비리에 추진된 탓에 현재까지 이 기간동안 그의 자세한 행적이 전해져 내려오지않고 있다.[3] 1917년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고종황제의 조카딸과 신부례를 올리는 기회를 엿보아 고종 망명을 시도하였다. 비록 망국이기는 하나 궁중의 신부례는 매우 장엄하고 절차가 복잡하여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3] 이 기회를 틈타 고종과 비밀리에 접촉하는데 성공했고 민영달은 이 거사에 5만원의 자금을 내 놓았으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나게 되자,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에게 신흥무관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하였으며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소식을 접하고 자극, 이때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그는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망명을 계획한다.[5] 그는 시종(侍從)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승락을 얻었으며[5] 그뒤 김가진 등과도 비밀리에 연락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하지만,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국내에서 가지고 온 자금이 바닥나면서 가족들은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이회영은 블라디보스토크,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돌며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
임시의정원 의원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때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내에 지휘를 놓고 서로 다투거나 분쟁이 일어날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에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3] 그러나, 이회영의 예상은 적중하였고 이때부터 이미 독립 운동단체 사이에 내분과 조직간의 알력이 심화되고 있었다.
1921년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이해 4월에 유자명은 이회영을 만났는데, 이미 이회영은 일본의 유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의 저술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였다.[3] 임정이 창조파, 개조파, 임정 고수파로 나뉘자 그는 임시정부를 떠났다.[6]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한수이 현(漢水縣)에 토지를 매입하고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했다.
아나키스트와 이후
1925년에는 비밀 결사 조직인 다물단을, 1931년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합작으로 독립 운동 단체인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행동대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활동,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1924년 4월 20일에 베이징에서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구파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창립하였다.[3]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7]
1928년 5월 상하이에서 이을규, 정규 형제 및 정화암, 류기석등의 동지와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1928년 6월 1일에 정의공보를 복간하는 의미로 탈환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고 더 적극적으로 아나키즘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3][8]
1927년 9월 하순, 시야 김종진은 북만으로 떠나기전 톈진에서 이회영을 찾아가 사상적인 담화를 하였는데 그 대담의 기록이 남아있다.[3][9] 이 대담에서 크게 감화를 받은 김종진은 그의 사촌인 백야 김좌진 장군을 설득하여 신민부와 아나키스트와의 연대를 받아들였다.[3] 김좌진 장군은 철저한 대종교신자이자 민족주의자이므로 아나키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아나키스트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3]
1928년 7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 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체포와 옥사
1930년 4월 20일에 유자명, 장도선, 정해리, 유기석 등은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8] 만주 사변 이후에 이회영, 정현섭, 백정기 등의 주요 아나키스트 거물들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8][3] 이 단체는 기관지인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이회영은 1931년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초 상해 사변이 일어나자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을 찾아아 교섭, 자금과 무기지원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1932년 11월 만주의 연락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 아나키스트의 활동범위를 넓히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이동을 결심하였다. 당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영향아래에 있어 대단히 위험했으므로 주위의 동지들이 말렸으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3]
그러나 일본 밀정의 제보와 그와 사상이 달랐던 조카 이규서 등의 밀고로 이동중 상하이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이미 65세였던 그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사망 원인
보통 그의 죽음 원인은 고문치사에 의한 죽음으로 알려져 있다.
사망 당시 일본 영사관 당국은 체포된 노인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발표했으나, 서둘러 그의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수상한 정황 때문에 고문 치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의 유해에는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다고 한다. [3] 또 다른 설로 중국 항일 운동가인 김소묵의 보고서에 의하면 1932년 11월 17일에 일제가 뤄순 감옥에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이회영을 교수형에 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후
일본경찰의 이회영 체포 과정에서 4등선실의 수많은 중국인 중 정확히 이회영을 지목한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은 마지막으로 이회영이 상하이를 떠날 때 만난 인물인 이규서와 연충렬을 의심하였고[3], 증거를 가지고 그들을 추궁하여 일본 경찰에 밀정행위를 한 것을 확인하고 처단하였다.[3] 일제의 밀정들의 밀고 외에 사상의 차이 역시 그를 밀고하여 옥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1945년 해방 되자 그의 6형제 중 다섯째 동생인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생존하여 귀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현재 그의 묘소는 국립현충원에 있다.
2000년 중국 정부는 그에게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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