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쪽 섬 시칠리아
- 시칠리아는 200년간 아랍인의 지배하에 있다 프랑스 북부에서 온 노르만 왕조에 의해 정복 되었다.
- 그리스도교 왕 굴리엘모 시대에 지은 치사의 여름 별궁은 아랍식으로 지어졌다.
- 프리드리히는 세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네 살때 어머니를 여의어 시칠리아의 왕이 됨.
- "붉은 수염"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의 직계 손자로 1196년 독일 왕으로 선출됨.
- 1218년 부터 호노리우스 교황으로 부터 황제의 관을 미끼로 십자군 참전 요청을 받고 있었슴.
(2) 황제 즉위
- 1220년 5월 자기 아들을 독일 왕으로 선출, 즉위식을 가짐.
- 1220년 11월 22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가짐.
(3) 원정은 언제?
- 국내 안정을 핑계로 원정을 연기하고 있던 중 1221년 8월 제5차 십자군은 종전되어 버렸고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변화가 없어 한동안 평화가 기대되고 있어 새로운 십자군은 지연될 수 밖에 없었슴.
(4) 사라센 거류지
- 프리드리히가 황제 취임을 위해 시칠리아를 비웠던 1221년 겨울 이슬람교도 농민들이 봉기했다.
- 1223년 4월 사라센인들을 교황청령 몬테키시노 수도원에서 가까운 지역인 이탈리아 남부 루체타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이로 인해 교황의 심기르 건드리게 됨.
(5) 나폴리 대학
- 1224년 나폴리에 그리스도ㅛ가 금기시하는 고대의 로마법을 가르치는 새로운 대학을 창설함.
- 당시의 명문 대학은 파리아 이탈리아 중부 볼로냐에 있었다.
(6) 살레르노 의학교
- 살레른 의학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교로 후원자인 아말파가 쇠퇴하자 곤경에 처함.
- 프리드리히가 이를 부흥시키는 일에 적극 나섬.
- 순수한 의학을 연구하는 곳이라 종교나 민족을 전혀 따지지 않는 특성이 있어 교황이 못마땅해 함.
- 이 살레르노 의학교는 프리드리히가 죽자 쇠퇴의 길을 걷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볼로냐 대학에 대항해 세운 파도바 대학의 의학부로 남게 된다.
(7) 예루살렘 왕으로
- 프리드리히의 아내 콘스탄체를 잃은지 3년이던 해 예루살렘 왕국의 정통 후계자인 브리엔의 딸 욜란데와의 결혼설이 급부상.
- 1225년 11월 9일 브린디시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거행.
- 1223년 프랑스왕 필리프 2세 사망, 루이 8세가 뒤를 이었으나 3년만에 죽고 1226년 12살의 루이 9세가 왕위에 올라 있었고 영국은 내란으로 혼란스러워 십자군 원정을 갈 수 있는 사람은 프리드리히 밖에 없었다. 교황은 프리드리히를 계속 압박했다.
(8) 적과의 접촉
- 프리드리히와 알 카밀은 문화 교류로 접촉을 계속하고 있었다.
- 1227년 1월말 알 카밀은 마마스쿠스의 동생 알 무아잠이 카이로 타도에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젊은 태수 파라딘을 포자에 있는 프리드리히에게 특사로 보냄.
- 예루살렘은 물론 나사렛을 포함한 예루살렘 왕국의 옛 영토를 모두 반환하겠다고 함.
- 프리드리히는 팔레르모 대주교 베라르돌,ㄹ 파라딘을 배웅한다는 명목으로 카이로에 특사로 보냄.
(9) 교황 그레고리우스
- 1227년 3월 교황 호노리우스 사망.
- 그레고리우스 9세가 즉위하자 바로 프리드리히에게 십자군 원정을 독촉하고 파문의 경고를 보냄.
- 1227년 8월 21일 브린디시에서 출발하기로 정해짐.
- 역병이 돌아 튜턴 기사단장 헤르만에게 병력을 맡기고 그는 포푸올리에서 몸 상태를 회복코자 함.
(10) 첫번째 파문
- 1227년 11월 18일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십자군 원정의 약속을 어겼다며 프리드리히를 파믄에 처한다는 교서를 성 베드로 성당에 붙혔다.
- 로마 교황청이 지원 덕분에 프리드리히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교황의 교서 내용에 프리드리히가반박을 하며 1228년 봄에 출발 하겠다고 회신.
(11) 두번째 파문
- 1228년 1월 23일 교활 그레고리우스는 프리드리히가 로마 교황에 대한 복종의 마음이 없다는 이유로 거듭 파문을 공고했다.
- 파문에 덧붙은 고시 내용
① 파문 당한 자가 체재하는 지역 또는 그 자가 들르는 모든 지역에서는 성무를 금지한다.
② 파문 당한 자에게 복종할 의무를 면한다. 세금 납부나 징병에 응할 의무가 없어진다.
③ 파문 당한 자가 이끄는 군대는 더 이상 십자군이 아니다. 따라서 행군을 방해하고 물자를 빼앗아도 된다.
※ 세번째 항목으로 교황이 십자군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여 일반 시민들로 부터 의혹을 삼.
- 상황 변화
① 1228년 4월 아내 욜란데가 아들 콘라트를ㄹ 추산하며 모숨을 잃음으로써 예루살렘의 왕에서 왕의 후견인 자격으로 변함.
② 알 무아잠이 다마스쿠스에서 자연사 함으로 인해 실아의 반란이 소멸되어 이슬람 세계가 통일되어 가고 있었다.
-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헛수고가 될 것이 뻔한 십자군 원정 출발 계획을 강행.
(12) 출발
- 1228년 6월 28일 제6차 십자군이 브린디시에서 출항
- 지난해에 앞서 출발한 튜턴기사단장 헤르만과 기병들은 항구를 정비 성채 개조를 완료.
- 병력 기병 700~1,000명, 보명 3천~4천, 40척의 갤리선과 100척의 수송용 범선
프리드리히의 부장 헤르만과 엔리코
- 1228년 7월 21일 키프로스 섬 남쪽 리마솔항에 입항
- 키프로스섬에 내란의 조짐이 보여 이를 수습하느라 오래 머물게 되어 9월 3일에야 키프로스를 떠나 9월 7일 아코에 상륙
(13) 아코 도착
- 아코에 도착한 프리드리히는 아코 주민과 순례자들의 대 환영을 받았고 이에 동행했던 바리 대ㅔ주교와 해군 장수 엔리코를 시켜 교황 그레고리우스에게 서한을 보냈다.
- 반면 교황의 명령서를 지참한 수도사 2명이 바로 아코에 도착, 프리드리히ㅣ가 두번이나 파문 당했음을 알리고 특히 종교 기사단은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 것도 황제의 깃발 아래 싸우는 금한다고 함.
- 이에 프리드맇는 튜턴기사단 단장 헤르만을 제6차 십자군의 명목상 총 사령관 자리에 앉혔다.
- 로마 교황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있는 템플 기사단과 병운 기사단은 고심 끝에 교황에게 황제에게 협력하는 것은 당분간이며 황제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과 그리스도 교도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실행하는 것이라고 보고하고 프리드리히에게 협력하기로 결정.
(14) 접촉 재개
- 프리드리히가 나블루스에 있는 알 카밀에게 교섭 재개를 요청하는 밀사를 보냄.
- 알 카밀은 동생 알 무아잠이 죽자 다마스쿠스와 그 주변 시리아 전역을 자신의 지배 영역으로 편입시켰으나 이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또 다른 동생 알 아슈라프가 불만을 품고 대항해 옴.
- 알 아슈라프의 항쟁을 교섭을 통해 거의 해결해 가고 있던 시기에 적군이 들이 닥친 셈이다.
- 이에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의 교섭 재개 요청을 일단 받아 들이고 1228년 가을 아코 교외에 있는 황제의 막사에 태수 파라딘을 보냄으로써 교섭이 다시 진행되게 되었다.
(15) 텔아비브와 가자 사이에서
- 1228년 11월에 접어들자 동생 알 아슈라프와의 문제를 타결한 알 카밀이 카이로로 돌아가는 길에 가자에 있는 술탄의 별궁에 머물게 되자 프리드리히는 아코를 떠나 야파(현 텔아비브)로 이동했다.
- 1229년으로 해가 바뀐 뒤에도 가자에 머물면서 교섭을 계속하였다.
(16) 강화 체결
- 1229년 2월 교섭이 타결 되었다.
① 이슬람 측은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 측에 양도한다. 단, 금빛 돔을 가진 술탄 오마르가 세운 모스크 알 아크사 사원이 있는 동쪽 1/3은 비무장 이슬람 교도가 관리하는 이슬람 지구로 한다.
② 예루살렘 시는 그리슫교 측에 양도 되지만 예루살렘 주변 일대는 이슬람측 영토로 남는다.
③ 이슬람 측은 그리스도교 측이 베이루트에서 야파까지의 항구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여유하는 것을 인정한다. 이래서 안티오키아에서 트리폴리를 거쳐 야파까지 그리스도교 영유지가 이어지게 되었다.
④ 순례와 통상이 목적인 사람들의 왕래를 양측이 완전 보장하고
⑤ 억류하고 있는 포로를 전원 교환한다.
⑥ 유효기간은 서명과 날인 후 10년간으로 한다.
(17) 반대의 소용돌이에서
- 아코의 예루살렘 대주교 제라르도가 격렬하게 반대함.
- 템플 기사단은 구 본부인 알 아크사 사원을 이슬람 지구로 정한데 대해 격렬하게 반대.
- 프리드리히는 반대와 비난의 목소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그리스도교 측 안전의 핵심인 각지의 성채를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인위 마지막 반란을 진압,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를 추방하고,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만은 쉽사리 흥분해 말썽을 일으킨다고 판단 도시 이름을 Aelia Capitolina(하드리아누스가 세운 신들의 신전)라고 개명.
- 알 카밀도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는 한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열기를 식히지 못하고 앞으로도 계속 십자군을 조직해 침공해 올 것이라고 판단한 듯.
(18) "성도" 방문
- 1229년 2월 18일 강화에 서명 날인.
- 1229년 3월 17일 각지의 성채를 시찰하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함.
총독 알 가우지가 황제에게 성문의 열쇠를 헌정
- 1229년 3월 18일 성묘교회에서 거행된 예루살렘 왕의 대관식을 가짐.
프리드리히는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왕관을 주교가 아닌 자신의 손으로 씀.
- 예루살렘 대주교 제라르도가 카이사레아 주교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이 성도를 성무금지에 처한다고 통보했다. 아무도 예루살렘을 빠져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줄지어 들어왔다.
(19) 교회와 모스크
- 프리드리히는 예루살렘에 일주일간을 머물면서 성지 순례가 아닌 관광객 처럼 사적을 둘러 보았다.
- 3월 25일 아코로 향했다.
- 프리드리히를 맞은 예루살렘 대주교의 냉대가 이어졌고 주민들 마저 적대시 했다.
(20) "그리스도의 적"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프리드리히를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단정 짓고 전 예루살렘 왕 브리엔에게 군대를 보내 프리드리히 영토인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짐. 프리드리히는 성채의 네트워크화를 단기간에 끝내기 위해 아코에 3대 종교 기사단 단장과 봉건 제후들을 불러 모아ㅓ 지시를 했다.
(21) 귀국
- 아코에서 한달을 보내고 1229년 5월 1일 프리드리히는 아코를 떠났다.
- 키프로스 섬에 머물렀다가 브린디시로 직항해 6월 10일에 상륙.
- 7, 8월을 성채에서 반격 준비를 하며 보내다 9월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 브리엔이 제일 먼저 군대를 내 팽개치고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쳐 버림.
- 이탈리아 북부의 자치 도시들이 교황의 군대에 참여하기를 거부.
-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를 거쳐 카우아까지 북상 10월에 접어들 무렵에는 교황의 군대와 일전도 벌이지 않고 침공당한 모든 영토를 회복했다.
(22) "평화의 키스"
- 1230년 9월 1일 교황이 아나니에 있는 생가를 방문할 때 황제가 문안 인사를 가고 교황이 프리드리히를 맞이하는 성명을 발표함. ("모든 신도의 어머니인 로마 교회는 순종적이지 않은 아들의 귀환일지라도 진심어린 자애의 정으로 맞이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프리드리히가 서로 어깨를 안고 키스하는 것으로 "화해"의 의식이 이루어짐.
- 1238년 알 카밀 사망 후에는 프리드리히는 그의 장남, 차남과 계속 서신 교환을 함.
- 1248년 8월 프랑스 왕 루이9세가 제7차 십자군 원정을 떠남.
- 1250년 여름 프랑스 왕 루이가 포로가 됨.
- 1250년 12월 13일 프리드리히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