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그리스’는 195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머리에 바르는 포마드 기름, ‘Grease’에서
그 제목을 따왔다. 전후, 미국의 청년들은 포마드를 통해
자신의 젊음과 패기를 표출해냈다. 2015년, 대한민국에서는
레트로, 이른바 ‘복고’ 열풍의
기세가 대단하다. 반세기 전에 유행했던 포마드가 남성들의 핫 아이템으로 다시금 떠올랐다. 트렌드를 아는 남자라면 포마드를 이용해 2대8로 곱게 빗어 붙여줘야 한다.
포마드뿐 아니라, ‘응답하라 시리즈’,
‘토토가’ 열풍 등으로 대변되는 복고 감성이 문화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십 여 년 전 방송됐던 드라마의 출연자들이 재회하여 당시를 추억하는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이 호응을 얻었고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불러지는 노래의 팔할은 8-90년대에 유행했던 가요들이다. 멜빵이 ‘잇 아이템’으로
재등장한 것을 보면 앞으로도 한동안 이 기세가 꺾이지 않을 것 같다.
왜 복고 문화가 열풍, 더 나아가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익숙함이 안정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라 주장하는 평론가도 있고 기업들의 감성
마케팅이 그 시작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분석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가장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그 시절로 자신을 도피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우울적 기재의 결합 효과의 결과가 레트로의 유행이라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아 옛날이여’. 요즘
세상이 ‘살기 힘들어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해석이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몸집이 한창 커지고
있던 80년대와 그 결실을 누렸던 90년대 초반, 즉 IMF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까지는 그야말로 ‘찬란’했다고 한다. 서울에
살 집이 넘쳐났고, 4년제 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대기업이고 공공기관이고 골라갔다 하니 천국을 묘사하는
건가 싶다.
분명 천국에 살았건만 정신 차려보니 지옥으로 향하는 루비콘 강 한 가운데를 떠다니고 있었던 걸까. 할 수만 있다면 있는 힘껏 헤엄쳐 강을 거슬러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그 시절의 옷을 입고, 노래를 들으며 정신이라도 과거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이 ‘그리움-도피 결합 이론’이다. 경쟁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자란 요즘 20대, 우리 세대에게는 요즘
세상이 그저 언제나처럼 분기마다 전∙월세 대란으로 시끄럽고 취업 재수는 당연한 ‘정글’정도겠지만, 황금기의 빛을 쬐 본 윗세대는 지금의 현실이 더 춥고
어두울 것도 같다. 달콤함은 맛 본 사람에게만 단 것이므로.
‘그리스’라 불렸던 포마드의 유행,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다 보니 또 다른 ‘그리스’가
문득 스친다. 유럽의 끝, 지중해를 낀 해양국가. 지금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 스타일의 머리 모양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만큼이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거다.
올림픽 개최식의 참가국 입장은 알파벳 순이지만 예외인 국가가 하나 있다. 바로
그리스다. 올림픽이 처음 시작됐던 곳,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국가와 사회를 논했던 곳,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곳. 찬란하다 못해 그 빛으로 세계사의 시작을 밝혔던 그 곳. 제 몸으로
빛을 내 비춰준 그리스에게 인류는 존경과 감사를 표해왔다. 고대 올림픽과 지금의 올림픽이 많은 부분
다를지언정 여전히 그리스는 첫 번째 입장국가였다.
그토록 위대했건만, 그리스가 요즘은 구박 데기로 뉴스에 등장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디폴트 사태’
때문이다. 국가 부채가 무려 300 여 조. 돈을 빌려준 채권국들은 돈을 갚거나 갚지 못 할거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라 압박한다. 언론은 그리스가 국가 부도의 상황까지 간 것을 두고 원인이 무엇이냐에 대해 연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기형적 연금 구조, 공무원들의 부정부패, 조기 은퇴 문화, 세수 부족 등을 꼽는다.
왜 국가 부도를 맞을 수 밖에 없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등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리스 국민들이 안타깝다. 단
맛으로 치자면 레트로 열풍을 주도하는 3-40대가 맛보았던 과거의 맛은 감히 그리스 사람들에겐 댈 것도
아닐 거다. 실제로 아테네 거리는 ‘무너진 그리스의 자존심’에 대한 한탄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인류사에 기여한 민족이며 전 세계에서
앞다투어 찾는 고대 유적의 땅, 관광 대국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찬 채 수천, 수 백 년의 세월을 지내 온 그들일 테다. 절망과 좌절은 빛났던
시절의 높이만큼이나 깊을 것이다.
누가, 왜, 우리나라의 중년
세대로 하여금, 그리스 국민들로 하여금 현재를 피해 과거로 돌아가고 싶게 만들었는가. 그들은 피해자다. 기나긴 경제 불황과 잘못된 정부 정책에 얻어 맞은. 더 이상 맞지 않기 위해 그들은 ‘좋았던’ 과거의 시간으로 몸을 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