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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과 금강을 나누는 고개, '미시령'
7번 국도에 다시 눈이 내린다. 외설악의 설악동 들머리를 지날 무렵 동쪽 바다에 내리는 눈송이마다 어둑스레한 땅거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바다는 그저 죽은 듯이 낮게 엎드려 검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속엣 것을 토해내듯 고통스럽게 몸을 뒤챘다. 문득 박성룡의 시 '바다는 지금 그의 궤도를 벗어나려는 지구의 괴로운 바로 그 몸부림'이란 구절이 생각났다. 왜 뜽금없이 그런 시가 떠올랐을까. 참으로 아득한 곳에서 멀리 달려온 것을, 정작 바다에 닿지 못하는 눈송이처럼 행여 오늘은 저 바다도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멀미를 하는가. '아무래도 바다 어딘가가 아프다.'
날이 저물어 절집으로 가려는 발길을 슬그머니 꼬드겨 바다가 가까운 포구로 갔다. 속초(束草) 들목 대포항(大浦港). 헐값에 방을 내준 민박집 할머니는 "시방 난리두 요런 난리가 읎다"면서 한창 금새 좋던 시절을 마냥 그리워했다. 일제 시대 의 대포는 동해의 포구 가운데 손가락을 꼽을 만큼 컸다. 속초항이 열리고 횟집 촌으로 팔자를 바꾼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바야흐로 나라 살림이 결딴이 난 터라 횟집도 민박도 그저 스산하다. 그깟 돈 몇 푼에 기죽지 말자고 비릿한 갯내음을 다독이며 방파제로 나가 보았지만 포 구의 불빛도 왠지 예전의 밝음을 잃었다. 지금 바다가 많이 아프다.
속초, '눈꽃 축제'는 열리고
옛날의 속초는 다만 양양도호부를 따르는 작은 어촌이었다. 조선 시대 청초호(靑 草湖)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두어 일찍이 쓰인 바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영화는 속초항이 개발되는 일제 시대 무렵부터가 그 시작이다. 산천 또한 명산 설악을 등에 업고 창창한 동해 바다를 더불었으니 더 아쉬울 게 없고, 아래위로 청초와 영랑같은 호수까지 거느렸으니 더 부러울 게 없는 곳이다. 나라에서 살기 좋은 곳을 꼽을 적에 경주, 김천과 더불어 으레 차례를 다툰다.
속초의 이름 내력에는 몇몇 전설이 뒤얽혀 있다. 바다에 나가 영금정(靈琴亭)의 솔산을 바라보면 소나무와 풀을 묶어 놓은 꼴이라 하기도 하고, 풍수의 눈으로 보면 지형이 소가 누운 형국이라 풀을 뜯어먹기 좋게 묶어주어야 했다고도 한다. 설악의 울산 바위와 함께 얽힌 이야기는 한층 전설답다. 울산의 수령이 자기 고을의 바위라 하여 해마다 울산 바위에 대한 세금을 받아갔는데 신흥사의 한 동자승이 꾀를 내어 이젠 소용없으니 도로 가져가라 했단다. 울산의 수령도 지지 않고 재(灰)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 가마고 맞장단을 쳤다. 동자승은 속초 땅에 지천으로 널린 속새 풀로 새끼를 꼬아 바위를 묶고 불에 태웠다. 속초의 이름 또한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연구로는, 속초 역시 속새 풀과 관련되어 나라 산천에 흔하게 널린 '속사'라는 이름과 다를 바 없는 지명이란 게 거의 정설이다. 평창의 용평이나 휴전선 북쪽의 지명에 유달리 많은 속사라는 지명은 한결같이 속새(덕욱새) 풀이 잔뜩 우거진 탓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속초시지』에는 속초를 그저 속새로 불렀음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아직 더러 속초에 남아 산다고 했다.
포구의 물회로 아침을 먹고 청초호를 돌아 속초 시내로 들어갔다. 속초의 거리에는 올해로 세 번째가 되었다는 '설악눈꽃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한창 손님을 맞고 있었다. 미시령 가는 길에 그냥 지나치기 섭섭하여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안내 책자를 하나 얻어보니 오늘은 팽이치기를 하는 날이란다. 나흘 동안의 축제는 연날리기, 눈사람 만들기, 팔씨름, 하얀 산길 걷기, 빙벽 오르기 같은 것들로 짜여져 있다. 으레 '콩쿠르'나 '미인 대회'가 고작인 여느 축제와는 달리 '설악눈 꽃축제'는 아주 정감어린 놀이판이다. 아름답게 빚어놓은 눈조각 사이를 거닐면 서 그만 아침 햇살을 다 써 버렸다.
미시령 고개의 들머리 원암(元岩)
속초의 모든 도로 표지판은 한결같이 미시령으로 통한다. 행여 처음 가는 이라도 미시령 찾는 일만은 좀 여유를 부려도 괜찮다. 눈꽃축제가 열리는 종합운동장에서 울산바위 아래로 미시령 길을 접어들면 금세 속초시 노학동의 학사평(鶴沙坪) 과 고성군 토성면(土城面)의 원암리가 나뉜다. 학사평은 본래 '딱사벌'이라 하여 도무지 농사가 잘 안되는 딱한 들판이라 얻은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고, 원암은 조선 시대 원암역(元岩驛)이 그 근원이니 아마도 울산바위에서 따온 이름일 터이다.
지금의 원암은 설악의 '콘도' 마을이 되어 버렸다. 대충 몇 개 유명한 콘도의 객실만 합쳐도 그 수가 무려 1300여 개가 넘는다. 콘도 역시 나그네가 잠시 와 묵어 가는 곳이니 원암 땅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고개 아래 마을이란 으레 오가는 이들의 잠자리가 되기 마련이지만 옛날의 역이나 지금의 콘도나 여느 민생들의 푼수로는 함부로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고 보면, 그 땅에 보통의 백성으로 사는 일이 그제나 이제나 왜 아니 어려우랴. 역이 들면 관리가 오고, 관리가 오면 민생이 고달프고, 콘도가 서면 행세가 오고, 행세가 오면 촌놈은 그저 늘 풀이 죽는 법.
원암이여! 그러나 노여워하지 말라. 무릇 세상의 수많은 발품이 거기 허름한 그대의 구들로 밤이슬을 피하고, 거기 깔깔한 그대의 피죽으로 허기를 달랬으니, 슬 퍼하지 말라 원암이여! 아주 많은 이들이 늘 그대 품의 하룻밤을 잊지 않고 여태 추억하는 것을. 원암이여! 그리하여 부디 울지 말라. 때로 그대를 홀로 남겨두고 그 모든 길들이 총총히 떠나간다 하여도. 세상의 길이란 게 본시 두고 가는 일보다 보내고 남는 일로 말미암아 더욱 길다워지는 것을 그대가 어찌 모르랴마는.
조선 중기 양양, 간성의 나랏길
미시령 길이 역로(驛路)가 되는 내력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 편에는 " 고을 서남쪽 80리쯤에 있다. 길이 있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 하였고,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저술인 『수성지(水城 誌)』에는 "옛날에 소로가 있었으나 없어져 지금은 행인이 없다. 계축년에 양양부에서 소라령(所羅嶺)이 좁고 험한 까닭에 다시 이 길을 열어 양양, 간성 양읍의 관로(官路)로 하였다."고 적었다.
무렵에, 한양에서 관동으로 통하는 길은 원주를 지나 대관령을 넘는 길이 '큰길' 이고, 경기도 양평 땅인 지평(砥平)에서 큰길과 갈라져 홍천과 인제를 지나 설악산을 넘는 길이 '작은 길'이었다. 큰길은 강릉과 삼척을 지나 남쪽의 평해에 이르렀고 작은 길은 북쪽의 양양과 간성이 그 목적지였다. 그 작은 길이 인제에 닿아, 원통역과 신원을 지나 오색역으로 넘는 소동라령 길을 버리고 인제 북쪽의 남교역(嵐校驛)을 지나 원암역에 이르는 미시령으로 길을 바꾼 것이 바로 성종 24년(1493)년의 일이다.
『수성지』에 또 이르기를, "원암역은 군 남서쪽 60리에 있는데 미시파령(彌矢坡 嶺) 입구에 처음 개설했다가, 양양의 오색역으로 옮겼다가 다시 상운역(祥雲驛)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성종 24년에 미시령으로 옮긴 역로를 훗날 소동라령으로 다시 옮겼다가 종당에는 해안을 따라 강릉으로 통하는 상운역으로 옮겨 갔다는 얘기다. 『수성지』는 이식이 간성현감으로 부임한 이듬해의 저술이니 적어도 1632년 이전에 이미 미시령은 역로의 쓰임새를 잃고 다시 풀숲에 묻히는 신세가 되는 모양이다.
미시령의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岩寺)'
속초에서 바라보면 미시령 길은 내내 울산 바위와 함께 오른다. 태초에 조화옹 (造化翁)이 금강산을 빚을 적에 울산에서 금강을 향해 가다 그만 설악에서 멈추었다는 바위. 옛이름은 천후산(天吼山)이니 이름 그대로 '하늘이 우는 산'이다. 울타리를 두른 듯 10리나 된다 하여 울산(鬱山)이라는 말도 있지만 벼락치고 천둥 우는 여름이면 마치 하늘이 우는 듯 산이 우는 까닭에 울산(吼山)이라 하였음이 옳다. 발음이 같기로 경상도 땅 울산을 불러다가 꾸민 전설이야 아마 그리 오래 묵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미시령 길을 사이에 두고 울산 바위 건너편에는 또 수암이라는 바위가 솟아 있다. 옛글에는 수암(水岩)이고 지금 글에는 수암(秀岩)이다. 웅장함은 비록 울산바위에 견줄 바 아니지만 수암 또한 예사로운 생김은 아니다. 금강산 화암사는 바로 그 수암 아래터를 잡은 지 이미 천년이 넘은 옛절이다. 택당의 글에는 절이 수암 아래 있어 그렇게 부른다 하였는데 본래 신라 혜공왕 5년 (769) 율사 진표의 창건이다.
화암사가 그 모산(母山)을 설악산에 두지 않고 금강산을 따르는 까닭은 '미시령 북쪽은 금강'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영주의 부석사가 비록 소백산에 있으나 '고치령 동쪽은 태백'이라 하여 '태백산 부석사'로 쓰는 것과 같다. 미시령 길에서 5리 남짓한 화암사는 그러나 거의 옛 모습을 잃었다. 일주문에서부 터 법당과 요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새 건물 아닌 것이 없고 다만 골물 위에 놓인 돌다리와 법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더러 희미한 옛 빛이 남았을 뿐이다.
『수성 지』는 화암사가 겪었던 수난의 기록을 대를 물려가며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멀리는 광해군 14년(1622)에 불길이 일었고, 가깝게는 철종 11년(1860)에 흡곡( 谷)에서부터 강릉, 정선에 이르는 큰 불길에 휩싸여 화암사 역시 잿더미가 되었다. 산도 옮기고 바다도 바꾸는 현대의 문명으로도 불과 몇 해 전 큰 산불을 당했을 때 그저 속수무책이던 기억이고 보면, 예전의 산불이야 그만한 재앙이 더는 없었을 터이다.
겨울이면 맨 먼저 끊기는 고개
큰 눈 내린 지가 이미 달포는 지났는데 미시령에는 아직도 폭설의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다.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고갯마루 휴게소에는 자동차 한 대 겨우 들고 날 정도의 길만 빼고는 마치 본래부터 그렇게 생긴 설산(雪山)의 협곡이라도 있었던 듯 어른 키보다 높게 흰 눈이 쌓여 통문(通門)을 이루고 있었다. 전에도 더러 눈 내리는 미시령을 넘은 적이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쌓인 눈은 이 번이 처음이다.
미시령 길은 한계령이나 진부령과는 달리 폭이 좁고 비탈이 심하여 지금도 겨울 이면 으레 서너 번씩 길이 끊긴다. 『수성지』에도 한 해에 대개 네댓 명이 목숨을 잃고 열 마리 정도의 말이 죽는다고 했다. 선조 27년(1594)에는 관리 열 사람이 눈사태에 깔려 죽었고, 인조 9년(1631)에는 눈 속에 묻힌 군인 서른 명을 가까스로 구했다고 적었다. 눈 쌓인 고갯길을 무리하여 넘을 적에는 항상 산마루를 살펴야 한단다. 눈덩이가 계란처럼 뭉쳐 굴러 내리기 시작하면 이미 눈사태의 조짐이다. 그러나 눈사태의 기미를 미리 알았다 해도, 또는 용케 앞으로 달려나가 눈무더기를 피했다 해도 이미 사태를 만나면 목숨 보전이 어렵다고 한다.
휴게소에서 당귀차 한 잔을 호호 불면서 도적 폭포 길을 물으니 모두들 정신 나간 사람 대하듯 눈을 치켜 뜬다. 휴게소 한 켠에서 목판에 불그림을 그리던 총각인 듯한 사내는 아예 인두를 내려놓고 다가와 "눈은 1m밖에 안 왔지만 골짝 안 에는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모른다"며 아예 내려갈 꿈도 꾸지 말란다. 미시령 고갯마루에서 불과 서너 구비 아래 골짜기에 걸린 도적 폭포는 옛날 미시령의 도적들이 오가는 이들의 재물을 빼앗고 빠뜨려 죽였다는 곳이다. 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허리춤까지 쌓인 눈도 눈이지만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깎아지른 벼랑이다. 길을 돌아 도적 폭포 산장 쪽으로 가 보니 그 곳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폭설 에 묻혀 운신이 어려운 트럭 한 대가 서있는 폭포 들머리에서 한참 동안 그저 입만 헤 벌리고 섰다가 미련을 버리고 돌아섰다.
미시령은 고개 중의 별종(別種)
미시령은 참 이름도 많다. 그 중에도 오래인 기록의 이름은 『신증동국 여지승람』의 미시파령이고 오늘날은 다만 미시령으로 통한다. 5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또 무슨 까닭으로 미시파령이 미시령에 이르렀는지 알 길은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부르기에 크게 다름이 없으니 다만 미시령은 아직도 본명을 따르는 셈이다. 어떤 이는 농담 삼아 미시파령(彌時坡嶺)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고개'라 하는데 그도 어차피 뜬구름 잡는 일에 다름 아니다.
도적 폭포에서 진부령 길이 시작되는 용대 마을의 '바람도리'까지는 10리 남짓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옛 글에 "동류동해(東流東海) 서류서해(西流西海)"라 하였다. 말 그대로 미시령 동쪽의 물은 동해로 가고 서쪽의 물은 서해로 간다는 뜻이다. 고갯마루에서 서쪽으로 운명을 바꾸어 도적 폭포로 떨어지는 골 물은 장차 소양강이 되고 북한강이 되어 서해로 흘러간다. 미시령 동쪽의 물이 불과 30리 어름에서 동해와 만나는 일에 견주면 물경 천리 길의 절반이 넘는 머나먼 여정이다.
백두대간의 고개로 걸려 매칼없이 녹록한 고개가 몇이나 되랴마는 미시령은 유독 깐깐하고 쟁쟁하다. 굳이 초목의 생리를 따른다면, 비록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결코 휘지는 않는 대쪽같은 성정을 품었다. 그런 품성은 늘 밖으로는 모가 나되 안으로 둥글고, 겉으로는 거칠되 그 속내가 뜻밖으로 여리다. 산천에 그런 고개 하나쯤 걸려 무릇 전범(典範)을 업수이 여기는 바 있다 해도 별다른 뒷탈은 없다. 행여 미시령에 가거들랑 여느 세상에서 쓰던 마음은 단단히 동여매고 허튼 상식의 문은 아예 닫아 거는 게 편하다. 그러나 상피와는 멀다. 미시령은 아무래도 꽤 아름다운 별종일 뿐.
출처: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3월호) | 사진: 미시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