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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잠언 3장 21-26절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라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세상 학문의 뛰어남이 아니라 언제나 여호와 경외와 맞물려 있습니다. 즉 그가 지혜롭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 혹은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잠9:10, 1:7). 이런 지혜와 지식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지키라, 떠나지 말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21절을 보시면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잠언 앞부분을 설교할 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내 아들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혹은 성도를 염두 해 둔 표현입니다. 솔로몬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향하여 그리고 성도를 향하여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르치는데, 그런 부성의 마음으로 볼 때 교회와 성도는 아들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라, 이것들이 네 눈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완전한 지혜와 근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용하는 단어는 hY:viTu[투쉬야]란 단어입니다. 적절한 지식 혹은 유용한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신이라는 단어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지만 원문은 목적 분별 계획 이런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분별이라는 뜻을 번역할 수 있는데, 지금 솔로몬은 교회와 성도를 향하여 너희를 유용하게 하는 지혜와 분별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이것들이 네 눈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설명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를 유용하게 하는 지혜 그리고 분별을 지키라고 할 때 유용하게 하는 지혜 그리고 분별은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본래 우리는 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시편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요, 부패한 마음과 가증한 행실로 선이라고는 하나도 내놓지 못하는 자입니다(시14:1).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게 한 것이 무엇인가? 적어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과 가증한 행실까지도 고쳐 선을 내놓을 수 있도록 만드는데,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유용하게 하는 지혜요 분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분별의 기준을 자신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사 안에서 보자면 가톨릭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교황을 사도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 후계자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교황의 말이 곧 교회의 법이 되도록 합니다. 교황의 말이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 교황의 말이 성경 위에 있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사람이 마치 무엇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별하라고 할 때 분별의 기준은 오류투성이인 사람,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오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주신 진리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유용한 지혜를 배우는 것이고, 바로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바르고 틀린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기뻐하지 않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분별 혹은 근신을 지키라고 할 때 우리는 다른 곳에서 완전한 지혜, 다른 곳에서 분별 혹은 근신을 배우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배우고자 해야 합니다. 동일하게 이것들이 네 눈앞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고 할 때 우리가 항상 주목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들을 봅니다. TV도 보고 인터넷도 봅니다. 컴퓨터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있는 핸드폰을 통해서도 봅니다. 수없이 많은 것들을 보고 듣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들 가운데 유익한 정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익한 것들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무익한 것들도 있고, 해로운 것들도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사상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는 그런 사상들이 얼마나 많이 녹아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말미암은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보다 일상을 살면서 보고 듣는 것들이 사실은 더 많은데, 말씀으로 말미암은 분별이 없다면 일상을 살면서 보고 듣는 것이 우리의 사고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완전한 지혜를 배우고 분별과 근신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것들이 내 눈앞에서 떠나지 않도록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가르침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되 시간을 내어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또한 공적 예배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 일을 위하여 주일을 제외하고 여러분에게 주신 시간 속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주일은 주의 날이고 그 외에는 나에게 주신 날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상 주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하는데,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지혜롭고 분별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주의 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말씀의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지키고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할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가? 오늘 본문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영혼의 생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 생명을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기 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본래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육체로는 살아 있으나 영혼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다, 단절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할 때 그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골로새서 1장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1:21)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죽었던 자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다시금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 육체도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 양식을 먹는 것처럼 영혼 역시 양식을 먹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며, 이 말씀이 우리에게 분별을 주어 근신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지혜를 얻고 분별을 얻는 자들은 말이나 행동에 있어 삼가고 조심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은 끊임없이 죄를 향해 가도록 하지만, 또한 사탄 역시도 그렇게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붙드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듭니다.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얻고 분별하게 함으로 그렇게 합니다.
시편 19편에 보면 말씀의 속성과 함께 말씀이 주는 유익을 언급하는데, 7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19:7-9)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하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그가 주신 율법도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율법을 배우는 자는 영혼이 소성케 되는데, 의미로는 회복케 되는 것을 말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율법에 녹아져 있고 그런 율법은 결국 어디까지 우리를 회복시키느냐 할 때 완전함까지 회복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죄와 악에서 떠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향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어지는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증거의 기능을 합니다.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그만큼 진실하다, 신실하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진실하시냐? 일체 거짓이 없으실 정도입니다. 사탄의 경우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거짓이 본성으로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거짓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율법의 가르침을 받을 때 하나님은 어둔한 자로 하여금 지혜롭게 합니다.
물론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말할 때, 또한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할 때 이 땅에서 죄가 전혀 없는 그리고 선만을 행하는 그런 완전함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완전함으로, 온전히 알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고 할 때 창세기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잠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잠언 3장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지혜와 명철, 지식 등은 하나님의 속성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속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준다고 할 때 말씀이라는 도구가 주체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 다시 말해 그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는가?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베드로후서 1장 10절의 성격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자로서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주 앞에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 그리고 우리를 영원 전에 택하신 것을 더욱 굳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열매 없는 자가 아니라 열매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벧후1:8 참조), 열매를 맺기 위하여 무엇에 전념해야 하는가? 진리의 말씀입니다(벧후1:12 참조).
다시 오늘 본문 22절로 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지혜와 분별은 네 영혼의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네 목에 장식이 된다고 말씀하는데, 이때 장식은 단순히 외적인 화려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유아교회를 향해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고, 잠언 역시 그런 방식으로 말씀할 때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외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약속하실 만큼 무엇에 우리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입니다.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참고로 장식이라는 단어는 은혜 혹은 호의라는 의미가 있는데,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네가 말하는 모든 것에 은혜를 주입할 것이며, 마음에 드는 말을 네게 공급해 주리라. 이 말들로 인해 너는 신앙을 얻게 될 것이다.” 말씀으로 말미암은 완전한 지혜와 근신, 분별은 우리의 말, 언어 가운데서도 은혜의 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3절 이하는 22절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지키고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생명이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23절을 보시면 “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지키고 떠나지 않는 자에게 영혼의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네가 가는 모든 길에 평안히 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32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한 지혜와 분별을 가지고 근신한다는 것은 결국 공의를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의 열매는 무엇인가? 평안과 안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증거는 성경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신명기 29장 9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장 8절에서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열왕기상 2장 3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할 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시1:1-2).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
그러나 여러분, 평안을 말하고 안전을 말하고 평탄을 말하고 형통을 말한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항상 이런 모습으로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고난의 원인 가운데 많은 부분은 오늘 본문 21절과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들이 내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안이 아니라 불안, 안전이 아니라 위험, 평탄과 형통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고난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된 지혜를 배우고 분별할 수 있게 됨으로 근신한다고 해서 항상 평안과 안전과 평탄, 형통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에 나타난 내용으로 볼 때 요셉의 고난, 그리고 욥의 고난 등이 이것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 고난과 어려움과 위협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혼의 생명은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셉에 대한 내용을 보면 그가 점점 어려우지는 가운데서도 형통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의 형통은 외적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외적 환경과 상황은 점점 어려워질지라도, 그래서 형들로부터 팔리고 애굽의 종으로 있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인이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이상 그에게 주시는 형통은 빼앗아갈 수 없었던 겁니다. 한 마디로 어떤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형통을 빼앗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자에게 주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된 지혜를 배우고 분별하여 근신하게 하는 자, 그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고 그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참된 지혜와 분별, 근신이 아니라 다른 것이 내 눈 앞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외적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평안이 아니라 불안함이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불안함이 있는 것입니다.
23절 하반부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다는 말씀도 동일한 뜻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겠다.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게 하겠다. 어떤 자들에게 이 말씀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참된 지혜를 배우고 분별하여 근신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자, 바로 그에게 이런 평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가는 길이 고속도로와 같은 길로만 있지 않습니다. 잘 닥이지 않은 그런 길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가는 길이 넓은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길을 가면서도 걸려 넘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혜가, 그의 분별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 안에서 볼 때 넘어지기도 합니다. 넘어져서 다치기도 합니다. 한참을 넘어진 상태로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분별이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다윗이 그러했고, 사도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경우 주를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로써 주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지혜를 배우며, 무엇이 참과 거짓인지를 분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분별을 통해 말과 행동에 있어 삼가고 조심하게 됩니다. 이런 자는 평탄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평탄하지 않음으로 넘어지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24절을 보시면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근심과 걱정이 있으면 잠을 평안히 잘 수 없습니다. 염려로 인해 잠을 설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누울 때 두려움이 없게 하시고, 누운즉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만드신다고 말씀합니다. 역으로 잠을 평안하게 자지 못한다? 잠을 자면서 설치는 일들이 있다? 방금도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완전한 지혜와 분별, 근신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현실 문제 앞에서 좀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세상을 더 크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 하나님을 의뢰하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 그래서 그의 말씀으로부터 완전한 지혜를 배우고 분별을 배우는 자에게 영혼의 생명이 되십니다. 방금 읽어드린 말씀으로 하자면 그의 영혼만큼은 지옥에 멸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혼의 문제보다 우리는 현실 문제를 더 크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등바등 거립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분별을 버리고 세상의 이치를 따릅니다. 마음으로는 주의 지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 앞에서 타협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무슨 평안이 있으며, 여기에 잠을 달게 자는 일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이런 우리를 자극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6일 가운데 하루를 따로 떼어 주의 날로 정하시고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 무엇이 참된 지혜인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분별하게 하십니다. 근신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날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세상을 향하고 싶고 세상과 타협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주께서, 주의 말씀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25절도 보시면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갑작스러운 두려움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황스러운 일이 갑자기 생겨서 두려워할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의 예로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이 있을 수 있는데, 노아 시대 홍수 사건이나 아브라함 시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구체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두 사건에서 노아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결국 구원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라 할지라도 재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있어 신실한 자라 할지라도 갑작스런 어떤 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생명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시116:1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워야 할 지혜와 분별이 이것입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재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큰 고통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마치 멸망한 것처럼 죽음에 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향해서는 공의의 심판으로 그 일이 있다면, 의인을 향해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통해 완전한 성화를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갑작스러운 두려움,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 앞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누구만을 의지해야 하는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6절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결국 21절에서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너희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킴으로 복을 받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하며, 또한 그의 말씀을 통해 분별하여 근신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을 지켜주시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