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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코메디언은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용 실험대상으로 기증하시오. 특별히 하버드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내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요, 내 부모님의 평생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 밖에는 없소”라는 웃지 못할 유언과 함께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웃을 수 없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오면,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처럼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로 죽음을 미화하려는 종교와 철학들이 있습니다. 자살을 예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죽음에게서 도피해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인생에게 죽음의 절망은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거나, 준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사람은 “나는 책에서 예수라는 사나이가 분주히 돌아다닌 이야기를 읽었다 선한 일을 위하여 분주히 돌아다닌 이야기다. 나도 정신없이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를 누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추구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정신없이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산 그들에게 “과연 얼마나 성공했으며 얼마나 인생의 목적을 이루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고개를 흔듭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그렇게 바쁘게 애써 돌아다녔음에 불구하고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허무인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에 인생의 초점을 둔 농부를 향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많은 소출을 거두었을 때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만으로 인생은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창고에 있는 것이 그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시는 날, 그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인생 곳곳에는 환난과 시험과 예기치 못한 절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죽음이요, 허무요, 절망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에게 어리석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죽음과 허무와 절망이 가득한 인생의 희망은 없다는 말입니까? 요4:14절에서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죽음과 허무와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삶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로 모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 복음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창세기의 태초, 곧 히브리어 베레쉬트(bereshith)는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시점을 의미합니다. 반면 요한복음의 태초, 곧 헬라어 “엔 아르케”(en arke)는 초시간적인 영원을 의미합니다. 개념상으로 볼 때, 창세기의 태초는 요한복음의 태초 안에 포함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할 때 “Epiphany”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베일에 가려져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미 창세 전부터 이미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곧 로고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곧 로고스로 소개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① 먼저 유대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인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현실 속에 실제적으로 드러내는 살아 역사 하는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이후에도 말씀은 끝없이 역사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야 때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근이 있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시33:6a)라고 노래했습니다. 말씀이란 하나님의 결단인 동시에 명령입니다. 하늘의 모든 것들은 바로 그 말씀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또한 시107:20절은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험 속에서 건지신 무기 역시 말씀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렵고 힘겨운 순간, 우리는 무엇을 통해 힘과 용기를 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병은 약만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강력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말씀만 하셔도 사망의 군대는 즉시 물러갑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무덤으로 내려가는 사람까지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종 문제와 질병 속에서 고통하고 있는 사람들은 말씀의 능력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은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진 영혼뿐만 아니라,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최악의 고통과 환난에 빠진 영혼까지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또 시147:15절은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곳에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 말씀은 본질상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엄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과녁에 꽂히기 전까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날아갑니다. 그리고 지체없이, 확실하게, 속히 이루어집니다. 이 두 과정은 눈 깜짝할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말씀이 즉시 성취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8:3절은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고 말씀합니다. 치료는 말씀이 선포됨과 동시에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막10:52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소경 역시 말씀이 선포됨과 동시에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속히 빠르게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랠프 로빈슨은 “어떤 화살도 그리스도의 말씀의 화살처럼 목표된 과녁을 지체하지 않고 명중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병든 영혼에게 말씀하시자 마자 그 영혼은 소생하고, 위로 받으며, 빛을 보게 된다. 이 일은 즉시 일어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상처 입고 절망 속에 빠진 영혼들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익숙했던 유대인들은, 말씀을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능력이요, 살아 역사 하는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굳이 말씀으로 소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② 헬라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 문화에 젖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②-1. 그들은 “로고스”를 종교적이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B.C. 6세기경 에베소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투스(Heracleitus)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변화를 혼돈과 무질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정한 법칙과 질서에 따라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법칙과 질서를 유지하는 힘을 “신적인 이성, 곧 로고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②-2. 그들은 또 사람들이 이성적일 수 있는 이유 역시 로고스의 힘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로고스가 사람들의 마음에 빛과 깨달음을 주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②-3. 또 그들은 인간이 신과 교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로고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여러 가지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헬라 문화에 젖은 이방인들에게 말씀, 곧 로고스라는 단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입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① 말씀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려는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자신의 주장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라는 말은 “곁에서 동행했다, 면전에, ....향하여”라는 뜻입니다. 또 빌2:6a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본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페”(morpe)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을 의미합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모든 속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b)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10:30)라고 거듭 말씀하심으로 이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결국 함께 계셨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요8:24b절을 통해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삶은 죽음뿐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 모심으로 영원한 영생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또 말씀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공동번역은 “그로 말미암아”를 “말씀을 통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8:30a절은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단어에 주의 할 필요가 있습니다. ① 먼저 “내가 그 곁에 있어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② 또 “창조자”는 원어 상으로 볼 때 “능숙한 숙련공”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한 창조주이십니다. ③ 그리고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는 “내가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기쁨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탁월한 창조주이신 예수께서 스스로의 창조사역을 크게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창1장에서 거듭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골1:16-17절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원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만물은 창조주이신 예수께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주께서 명하시자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물고기들이 베드로의 빈 그물로 몰려들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학자 고데는 “곤충 하나, 풀잎 하나라도 하나님의 만드심이 없이는 된 것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만물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세상 어느 것 한가지라도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주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은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인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종교도, 학문도, 음악도, 가정도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3:8절을 통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습니까?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종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말씀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4a절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지식적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근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 역시 주님을 “살려주는 영”(고전15:45)이라고 말했고, 예수께서도 친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원망하는 마리아를 향해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b-26)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나사로 향해 “무덤에서 나오라”(요11:43b)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첨단 과학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려 하지만,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모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4b절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은 만물을 소생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빛은 생명을 자라게 하고, 튼튼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36:9)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생명은 비참하며, 생명이라기보다는 죽음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생명을 밝고 빛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토머스 애덤스가 “자연의 빛은 불똥과 같고, 복음의 빛은 등불과 같고, 은총의 빛은 별과 같지만, 영광의 빛은 태양 그 자체다”라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온 인류를 위한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을 통해 죄악을 밝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시험 중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은 결코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합니다. 5절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생명이 빛이라면, 어두움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는 것을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빛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① 모든 인생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 앞에서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허겁지겁 달려온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자유, 삶의 보람, 재물이 한줌의 흙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인 생명의 문제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성취도, 성공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는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빛을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② 또 사람들이 빛을 거부하는 이유는 죄에서, 어두움에서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도덕적 어두움입니다. 이는 세상이 극도로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흔히 21세기는 문화 전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 문화의 핵심 코드는 불륜과 폭력과 거짓말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사단이 문화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된 문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어두움을 생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쉬운 예로 영화 친구는 이 땅의 많은 청소년들에게 폭력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세계 수십 만 편의 영화 중에 삼십 몇 위에 든다는 올드 보이는 남매와 부녀간의 근친 상간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프로가 다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중에는 현실적이면서 정말로 교훈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프로는 그 내용이 아무리 건전하고, 교훈적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자극적인 소재를 뿌리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사단의 강한 유혹입니다. 이 땅의 문화는 어둠의 세력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덕적인 어두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루하루 문화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오늘 그와 같은 드라마나 영화에 마음이 끌린다면,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어두워져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 지적인 어두움이 있습니다. 현대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많은 정보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절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른 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진리요, 가치요, 철학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다할지라도 바른 가치관과 인생관과 철학을 갖지 못한 지적인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인 어두움이 있습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온갖 우상을 다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예를 등산하러 산에 가시면 돌 단이 쌓여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돌을 하나 던져놓으면 그 뒤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돌을 던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돌무더기가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그 앞에 음식이 차려져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람은 영적으로 암흑 가운데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제압하다, 이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어두움은 결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께서 오셨을 때, 어두움의 세력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도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두움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 곳곳에 숨어 있는 모든 절망과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빛이십니다. 요10:10절에서 예수님은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신 예수께서는 참 목자로서 양들의 진정한 유익을 구하십니다. 영적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장성케 하십니다. 또 엡3:20절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소개합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 그리고 건강의 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