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대왕 : 명종(1534-1567년.재위 : 1545년7월-1567년6월. 집권 22년.34세일기로 죽음.)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대윤 -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
소윤 -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 일파
● 을사사화- 1545년 윤원형 일파는 윤임일파 등을 제거하기 위해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 이를 구실로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세력들을 유배시켰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윤원형 일파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 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시대'가 도래 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자 그 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했다.또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척 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긴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불러 면상에다 대 고 반말로 욕을 해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빰 을 때리기도 했다. 왕의 권위가 이 처럼 땅에 떨어지고 조정 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었기에 사회는 어수 선하고 민심은 병들 수 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다.
백성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나라 구석구석 마다 도적 떼가 난립하였다. 이시기에 임꺽정이 나타난다. 이같은 조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마침내 1565년 그녀가 죽자 조선은 급속도로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자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에서 밀려 나고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윤원형 역시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 되었다가 자살 하였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했다.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순회세자를 얻었으나 13세에 죽었다. 때문에 후사를 남기지 못해 중종의 9째 아들 덕흥군의 3째 아들 하성군(선조)이 이어 받았다. 하성군의 즉위로 조선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얼출신인 방계혈족이 왕위 를 잇는 상황에 처해졌고 이 때문에 왕의 권위는 한층 떨어지게 되었다.
● 작서의 변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왕의 총애를 받은 경빈 박씨는 자기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마침 1527년 2월 세자(뒤의 인종)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 등은 이것을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경빈의 짓이라 하여, 경빈과 복성군의 작호(爵號)를 빼앗아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다.
1533년에는 모자(母子)를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1541년에 이 사건을 조작한 자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라는 것이 밝혀져,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 인순왕후 심씨(1532-1575년) -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의 나이로 요절 했고 더 이상 후사를 잇지 못했다.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순회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