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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1998]石門先生5율=上愚伏先生[상우복선생]
上愚伏先生(상우복선생)
우복선생께 올림
石門(석문)鄭榮邦(정영방)
秋風動高興。추풍동고흥
落日滿空城。낙일만공성
樹古蒼煙重。수고창연중
川長白鳥輕。천장백조경
遙尋方外去。요심방외거
蹔向此中行。잠향차중행
始信箕山客。시신기산객
逃堯不爲名。도요불위명
가을바람 불어와 흥은 높아지고
석양은 텅빈 성안에 가득하네
오래된 나무에는 푸른 안개가 덮히고
긴 시내에는 하얀 새가 가볍게 나네
멀리 방외의 땅을 찾아가다가
잠시 이곳을 향하여 길을 잡았네
비로소 기산위 길손에게 부탁하니
요임금 피해 명예를 좇지 말게나.
愚伏先生=우복 정경세(鄭經世)
蒼煙창연=푸른 연기=푸른 안개。
遙尋요심=멀리 찾아
方外방외=세속(世俗)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
(2)(기본의미) 갈라놓은 지역이나 범위의 밖.
(3)중국의 밖이라는 뜻으로 오랑캐의 땅을 이르는 말.
(4)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
(5)유가(儒家)에서, 도가(道家)나 불가(佛家)를 달리 이르는 말.
蹔잠=잠깐 잠(다른 표현: 잠시 잠) 동자(同字)暫
箕기=키. 곡식을 까부르는 데에 쓰는 기구.
2.28수(宿)의 하나.成是南箕 詩經 성시남기
3.쓰레받기.凡爲長者糞之禮 必加帚於箕上 禮記
범위장자분지례 필가추어기상
4.두 다리를 뻗고 앉다.立毋跛 坐毋箕 禮記 입무파 좌무기
5.만물의 뿌리.箕者 言萬物根棋 史記 기자 언만물근기
기산(箕山)=기산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서남쪽에 있는 산.
箕山客기산객=허유(許由)
허유(許由)는 BC 2300년에 살았던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은자로
부귀와 권력을 뜬구름처럼 여겼다.
요임금이 만년에 자신의 자리를 허유에게 양보하려 하자
그는 한사코 거절하며 기산(箕山, 허난성 태강 북쪽) 아래로 도망쳐
몸소 밭을 갈며 살았다. 이후 요 임금이 다시 그를 불러 벼슬을 주려하자,
허유는 어지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영수(穎水 허난성 동부)로 가서 자신의 귀를 씻었다.
逃堯도요= 요임금으로부터 도망.
원문=石門先生文集卷之一 / 詩○五言律詩
우복 정경세 교유록
정영방(鄭榮邦) 1577년(선조 10)∼1650년(효종 1). 영양 연당
정영방(鄭榮邦) 1577년(선조 10)∼1650년(효종 1). 영양 연당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조부는 진사(進士) 정원충(鄭元忠)이며,생부는 정식(鄭湜), 양부는 정조(鄭澡)이다. 처부는 기봉 류복기(柳復起)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여 실정(失政)을 거듭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진성(眞城)에 은퇴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당시(唐詩)에 뛰어났다. 후에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의 마산리사(馬山里社)에 제향되었다. 편서(編書)로는 《석문집(石門集)》이 있다. - 공은 충신(忠信)스럽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뜻과 행실이 순후하고 정성스러웠다. 양어머니를 잘 섬겨서 효성으로 이름이 났고, 형제간에 우애롭고 친족 간에 화목하였으며, 향당(鄕黨)에 처함에 있어서 관대하고 온화하였다. 만년에 영해(寧海)의 임천(臨川)에 터를 잡음에 석문(石門)과 암지(巖池)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는데, 화초를 줄지어 심어 놓고 좌우에는 서책을 쌓아 놓은 채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였다. 일찍이 우복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몹시 아끼면서 사랑하여 집안일을 대부분 공에게 맡겨서 경영하게 하였다. - 愚伏先生文集 詩 정생(鄭生) 영방(榮邦) 이 찾아와 시를 지어 주기에 그 시에 차운하여 답하다. 산은 몇 번 둘러 있고 물은 몇 겹 감돌던가 / 山幾縈紆水幾重 다정스런 마음으로 적막하던 차에 왔네 / 多情來到寂寥中 내 알겠네 한밤중에 불 켜놓고 나눈 대화 / 明知五夜懸燈話 삼 년 동안 글 읽은 공보다 더 낫다는걸 / 絶勝三年數墨功 단지 내 맘 맑지가 않은 것이 겁나나니 / 只怕吾心澄不定 길이 멀어 통하기가 어렵다고 말을 마소 / 休言此道遠難通 그대에게 내 묻노니 저기 저 꽃과 버들 / 從君試問花兼柳 누가 푸르르게 하고 누가 붉게 하였는가 / 孰使靑靑孰使紅 書 정경보(鄭慶輔) 영방(榮邦) 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1611, 광해군3) 편지를 받아 보니 몹시 위로가 되네만, 부모님께서 편안치 못하시다는 것을 알았는바 몹시 염려가 되네. 나는 지혜가 행장(行藏)을 하는 데 어두워 신진(新進)들로 하여금 나를 표적으로 삼도록 하였네.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꾸짖어 보지만 미칠 길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스스로 밝혀 보라고 한 말은, 친구들 중에도 혹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네. 그러나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아는 자는 스스로 알 것이고 알지 못하는 자는 저절로 알지 못할 것이니, 어찌 이러쿵저러쿵 떠벌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여겨지네. 더구나 말을 하거나 침묵하거나 하는 것은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네. 지금이 어찌 우리들이 신원(伸冤)되기를 구하면서 칼자루를 잡은 자와 더불어 옳고 그름을 따질 때이겠는가. 동파(東坡)를 위하여 원통함을 송사하였으니 참으로 그대의 언외(言外)의 뜻을 알겠네. 그러나 우선은 도리가 어떠하냐를 논하지 않더라도, 말이 친한 사람에게서 나오면 저들은 필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그름을 숨겨 주는 말이라고 하면서 더욱더 심하게 노여워할 것이네. 그럴 경우 비단 아무런 도움이 없는 데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이네. 만일 혹시라도 그런 계획을 하고 있으면 당장 중지하여서 늙고 졸렬한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거듭해서 헐뜯음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네. [주]행장(行藏) : 행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고, 장은 물러나 은거하는 것으로,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등용되면 나가 행하고 버려지면 물러나 은거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 하였다. 答鄭慶輔 榮邦○辛亥 得書慰甚。第審親庭有不安節。奉慮。生。智昧行藏。使新進輩得以爲的。自訟無及。奈何。自明之示。親舊或以此爲言。以生淺見。知者自知。不知者自不知。何用喋喋。況語默有時。此豈吾輩求伸之日。而欲與爲刀者校是非耶。爲東坡訟冤。固知君言外意。姑不論道理如何。言出於親切之人。則彼以爲阿好匿非之言而怒之益甚。不但爲無益而止矣。萬一或有此計。千萬停止。無使老拙重得訾於人。至祝。 정경보에게 답한 편지 신유년(1621, 광해군13) 편지를 받아 보고 부모님을 모시는 가운데 학리(學履)가 진중하다는 것을 알았는바, 마음이 위로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나 역시 그럭저럭 보내고 있네만, 정침(正寢)을 중건하여 제사를 받드는 장소로 삼고자 해 공사를 이제 막 시작하였는데,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제대로 조처할 수가 없기에 요즈음에는 온 생각을 여기에 쏟고 있네. 주서(朱書)에 맛을 들였다는 것을 알았는바, 몹시 기쁘고도 기쁘네. 앞으로도 과연 능히 계속해서 씹어 맛보면서 중단하지 않는다면, 그 좋은 맛이 어찌 추환(芻豢) 정도에만 그치겠는가. 위 무공(衛武公)은 95세 때 억계시(抑戒詩)를 지었네. 이것으로 본다면 자네의 오늘이 바로 청양(靑陽)일 것이네. 그런데 갑자기 미칠 수가 없다는 탄식을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잡된 생각이나 잡된 술법을 말끔히 제거하고 한 달 정도 공부하되, 오로지 이 책에만 뜻을 전념해 보게. 그럴 경우 반드시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네. 나머지는 이만 줄이네. [주1]추환(芻豢) : 소나 양 등의 고기를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의리가 나의 마음에 좋기가 추환이 나의 입에 좋은 것과 같다.〔義理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 하였다. [주2]억계시(抑戒詩) : 《시경(詩經)》 〈억(抑)〉을 말한다.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95세가 되어서 억계시를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고 한다. [주3]청양(靑陽) : 청소년의 아름다운 얼굴 모습으로, 한창 기력이 왕성한 청소년 시절을 말한다. 答鄭慶輔辛酉 得書。知侍奉學履珍勝。慰豁不可言。生亦粗保。但欲重營正寢。以爲奉祭之所。工役方始而調度遽乏。日間殊覺意緖汩沒。知得味於朱書。深喜深喜。果能不輟咀嚼。其味之可嗜。何啻芻豢耶。衛武公九十五作抑戒。以此觀之。則君之今日。乃是靑陽。而遽有無及之嘆。何耶。幸掃去雜慮雜術。試用旬月工夫。專意於此書。則必有欲罷而不能者矣。不宣。 정경보에게 답한 편지 계해년(1623, 인조1) 애통한 마음을 위로해 주는 편지를 받아 보고서는 봄이 온 뒤로 효리(孝履)가 좋다는 것을 알았는바, 그립던 마음이 몹시 위로가 되네. 나는 여러 해 동안 병을 앓고 있는 가운데 외람스럽게도 은혜로운 제수를 받았는데, 이치상 스스로 힘쓰기가 어렵네. 현재는 위완통(胃脘痛)으로 한창 고생하고 있는 탓에 거의 죽었다가 겨우 살아났네. 그런데도 일이 평상시와는 달라서 감히 병이 들었다고 말할 수가 없네. 이에 장차 다음 달 초이레에 길을 떠날 참인바, 걱정스럽고 낭패스러워서 감히 무어라 말할 수조차 없네. 별지(別紙)에서 말한 바에 대해서는 간신히 하나하나 다 답하였네. 다만 손님을 대하고 있는 참이어서 몹시도 바빠 예경(禮經)을 펼쳐 볼 겨를이 없었으니, 아마 이치에 맞지 않는 곳도 더러 있을 것으로, 한결같이 송구하고 부끄러울 뿐이네. 편지에서 말한 바를 보건대, 예서를 읽은 나머지 자못 새로 터득한 것이 있음을 알겠는바, 몹시도 기쁘네. 상중(喪中)에 있는 동안에는 달리 외물(外物)에 이끌리는 일이 없을 것으로, 이는 바로 선현들께서 힘을 얻은 곳이네. 그러니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 자세하게 찾아보고 상고해 보아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다행이겠네.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네. 答鄭慶輔癸亥 承哀問。審春來孝履支勝。甚慰懸戀。生。積年病憊之中。叨此恩除。理難自力。目今方苦胃脘痛。幾死僅蘇。而事異平時。不敢言病。將以開月初七登程。憂悶狼狽。不敢爲喩。別紙所示。僅一一奉答。但對客撥忙。未暇搜閱禮經。恐有不中理處。一味悚怍而已。觀來示。知讀禮之餘頗有新得。極以爲喜。哀疚之中。無它外誘。此是先賢得力之地。幸靜處加功。仔細搜考。以爲自益益人之道。至祝至祝。 정경보의 문목에 답한 편지 〔문〕 《가례》를 보면, 삭망(朔望)에는 조전(朝奠)을 올릴 때 찬(饌)을 진설합니다. 그러니 삼헌(三獻)하는 절차가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삼헌을 올리는 예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 근거해서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퇴계 선생께서 김취려(金就礪)의 물음에 답하면서는 “《오례의주(五禮儀註)》에 의거하여 잇달아 세 잔을 올리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고, 정유일(鄭惟一)의 물음에 답하면서는 “삭망에 전을 올리는 것은, 예서를 보면 역시 삼헌을 올리는 것을 제사 지내는 예에 의거하여 한다는 글이 없다. 그러니 아마도 예서를 따라서 해야만 할 것 같다.” 운운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쪽을 따르고 어느 쪽을 버려야 합니까? 〔답〕 “잇달아서 세 잔을 올린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김취려의 물음으로 인하여 이런 답을 한 것일 뿐이지, 예에 있어서 올바른 것은 아니네. ‘듯하다’고 한 ‘공혹(恐或)’이라는 글자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네. 그러니 단지 정유일의 물음에 답한 말을 따르는 것이 예에 합치되는 것이네. 答鄭慶輔問目 家禮。朔望則於朝奠設饌。其無三獻可見。而今人家多行三獻禮。不知何所據耶。退溪先生答金就礪問云。依五禮儀註連奠三酌。恐或爲宜。答鄭惟一所問。則云朔望奠。在禮亦無三獻等依祭之文。恐當從禮云云。不知何所從違。 連奠三酌。恐是因金問而有此答耳。非禮之正。看恐或字可見。只得從答鄭之語。爲合於禮。 〔문〕 《의례》 〈사상례(士喪禮)〉를 보면, “월반에는 은전을 올리지 않는다.〔月半 不殷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혹 삭망에 아울러 거행하면서 강쇄(降殺)하는 구별이 없으며, 혹 망전(望奠)을 완전히 폐하고 거행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주(本註)를 보면, “사(士)의 경우 월반에는 삭일(朔日)과 같이 성대한 전(奠)을 다시 올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단지 성대하게 올리는 것만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지, 완전히 폐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답〕 사(士)의 상(喪)은 대부(大夫)의 상보다는 강쇄해야 하므로 월반에 은전을 올리지 않는 것이네.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단지 평상시에 상식을 할 때 올리는 찬과 같이 올리면 되는 것이네. 대개 은전은 본디 조전(朝奠)으로 인한 것이어서 밥, 국, 국수, 떡, 물고기, 고기 등의 음식이 있으므로 상식하는 예를 다시 행하지 않는 것이네. 예경에서 이른바 “하실(下室)에 다시 음식을 올리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네. 장사 지낸 뒤에는 또 상식만 올릴 뿐 전을 올리지는 않네. 그러니 망일(望日)에 은전을 진설하지 않더라도 자식 된 자의 정에 있어서 크게 서운한 점은 없을 듯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1]월반(月半) : 한 달의 가운데 날인 보름날을 가리킨다. [주2]은전(殷奠) : 희생(犧牲)과 여러 가지 제수(祭需)를 성대하게 갖추어서 올리는 전(奠)을 말한다. 士喪禮曰。月半不殷奠。今人家或有朔望幷擧。而無隆殺之別。或專廢望奠而不擧者有之。然考本註。士月半不復如朔盛奠云。則特不許其盛。非使之廢也。未知如何。 士喪殺於大夫。故月半不殷奠。據此則只得如常時上食之饌而已。蓋殷奠本因朝奠。而有飯羹麪餠魚肉等饌。故上食禮不復行之。禮經所謂不復饋食於下室是也。葬後則又只有上食而無奠。望日不設殷奠。恐無大歉於人子之情。如何。 〔문〕 3년 안에는 절일(節日)을 만났을 경우 묘에 올라갑니다. 만약 합장(合葬)하였을 경우에는 참으로 탁자를 별도로 하여 제사 지내서는 안 될 듯합니다만, 위(位)에는 신위(新位)와 구위(舊位)가 있으며, 복(服)에는 길복(吉服)과 흉복(凶服)이 있어서 아주 온편치 못할 듯합니다. 듣건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거우(居憂)할 적에 합장한 분묘에 친히 절사(節祀)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에 행한 일로서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상에도 경상(輕喪)과 중상(重喪)이 있는데, 학봉 선생이 상중에 있을 때에는 비(妣)를 먼저 장사 지내고 고(考)를 나중에 장사 지냈으니, 비록 이와 같이 해도 해로움이 없을 듯합니다. 만약 고를 먼저 장사 지내고 비를 나중에 장사 지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또 듣건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께서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선부군(先府君)의 묘에 합장하였는데, 절사는 자질(子姪)들로 하여금 대신 지내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예가 좋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답〕 자질들로 하여금 대신 지내게 하는 것이 아주 좋네. 주 선생(朱先生)께서 절사에 대해 논한 것 가운데 이미 이런 말이 있네. 三年之內。遇節日上墓。若是合葬則固不當別卓而祭。而但位有新舊。服有吉凶。似甚未安。聞鶴峯先生居憂。親行節祀於合葬之墳。此前事之可法。而但思之。喪亦有輕重。鶴峯在喪。妣先而考後。雖如此。似亦無害。若考先而妣後。則當若何。又聞西厓先生丁內艱。合葬于先府君墓。而節祀則令子姪代行。此禮似好。何如何如。 使子姪代行。甚得。朱先生論節祀。已有此語矣。 〔문〕 《예기》 〈단궁(檀弓)〉을 보면, “빈소(殯所)를 모시고 있을 적에 먼 촌수인 형제의 상을 들었을 경우, 같은 나라 안이면 가서 곡한다.〔有殯 聞遠兄弟之喪 同國則往哭之〕” 하였습니다. 이것이 내종 형제와 외종 형제를 겸해서 말한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시마복일지라도 반드시 간다.〔雖緦 必往〕” 하였는데, 그 주에는 이르기를, “친골육(親骨肉)이다.” 하였으니, 이는 동종 형제를 가리켜서 말한 것인 듯합니다. 어머니 쪽의 친족은 비록 외숙모와 이모의 상을 당하였더라도 모두 가서 볼 수 없는 것입니까? 〔답〕 예에서 이른바 형제는 동종 형제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네. 외가 쪽의 상사(喪事)에는 먼 곳에 있을 경우에는 가지 않아도 괜찮네. 더구나 외숙모에 대해서는, 예에 있어서 본디 복(服)이 없네. 법전에는 비록 시마복을 입는다는 글이 있으나, 아마도 성인의 뜻이 아닌 듯하네. 禮。有殯。聞遠兄弟之喪。同國則往哭之。此未知兼內外兄弟而言之否。雖緦必往。註云親骨肉也。似指同宗兄弟而言也。母族則雖舅妻及姨母之喪。皆不可往見乎。 禮所謂兄弟。指同宗而言也。外家喪事。在遠地則不往恐是。況舅之妻。禮本無服。法典雖有服緦之文。然恐非聖人意。 정경보에게 답한 편지 몇 조목에 대해 물었는데, 감히 단정 지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네. 다만 사리를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이미 양자를 가서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 의리는 양자를 간 쪽이 중하고 은혜는 생가 쪽이 중하네. 그런즉 기년(期年)이 지난 뒤에는 그대로 상차(喪次)를 지키기는 어려울 듯한바, 반드시 돌아와서 양부모를 모셔야 하네. 오직 삭망(朔望)에 궤연(几筵)에서 모여 곡한다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온전하게 되어 서로 방해되거나 빼앗는 것이 없을 것이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비록 정제(正祭)에서 삼헌(三獻)을 행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네. 조문을 받는 한 절차는, 상차에 있을 때에는 백씨(伯氏)와 함께 곡하면서 받아도 괜찮네. 상차에 있지 않을 경우에는 곡하고 절하는 예가 없을 듯하네.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낼 경우에는 지금 써 보낸 서식(書式)과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계(啓) 자를 쓴 것은 역시 혐의스러움이 없을 듯하네. 그러나 백(白) 자로 바꾸어 써도 괜찮네. 듣건대 심일송(沈一松)에게 계후(繼後)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 사친(私親)을 위하여 상복을 입었다가 기년이 지난 뒤에는 백의(白衣)를 입고 항상 일송의 집에 있으면서 곁에서 모셨다고 하네. 이 집안 역시 당대의 예법가(禮法家)이니, 반드시 전해 받은 바가 있을 것이네. 오직 자세하게 참작하여 잘 조처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네. 答鄭慶輔 詢及數條。不敢質言。但以事理揆之。旣已出爲人後。則義重於彼而恩輕於此。過期之後。似難仍守喪次。必須歸侍所後之親。惟朔望會哭於几筵。庶乎彼此兩全。不相妨奪。如何如何。若然則雖三獻正祭。行之不妨。受弔一節。在喪次時。則與伯氏同哭而受不妨。如不在喪次。則似無哭拜之禮矣。且與人書。如今來書式似宜。用啓字似亦無嫌。然易以白字。亦無妨矣。聞沈一松有繼後子爲其私親。踰期之後。以白衣常在一松家侍側云。此亦當代法家。必有所受之矣。惟在參商善處也。 정경보에게 답한 편지 갑자년(1624, 인조2) 지난번에 편지를 받아 보고서 날씨가 더워지는 이때 효리(孝履)가 그럭저럭 좋다는 것을 알았는바, 기쁘고 위로됨이 그지없네. 나는 병든 몸을 이끌고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기력이 다 소진된 데다가 겸하여 또 스스로 털끝만큼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네. 그러면서도 외람되이 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은 지가 지금 이미 1년이나 되었네. 이에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아먹는 죄가 쌓여 서로 간에 사랑하는 친구들이 사방에서 꾸짖고 있는바, 직에서 해임되어 한가한 곳으로 가고픈 생각이 간절하네. 그리하여 예전에 닦던 학업을 다시 닦는다면 혹 상유(桑楡)의 보람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네. 이러한 바람이 아주 절실한데, 성상께서 체차를 허락해 주시지 않으므로 매번 세 번 정고(呈告)하여 말미를 받게 되네. 이는 퇴계 선생께서 이른 바 “나라의 법제에 물러나서 돌아가는 한 길이 없다.”라는 것으로, 몹시 답답하고 답답하지만 어쩌겠는가. 노쇠한 나이에 객지를 떠돌아다니자니 모든 일이 간고(艱苦)하기만 하여 과연 이사해 살 계획을 하였었네. 편지의 말을 읽어 보노라니 느껴지는 바가 많기에 즉시 정지하였네. 이것은 나에게 달린 일이어서 신축(伸縮)하기가 어렵지 않네. 그러나 나의 몸은 이미 일찍이 성주(聖主)께 내맡겨졌으므로 자유롭지가 못한 처지이네. 옛사람이 차마 문득 영결하고 떠나갈 수 없다고 한 말은 역시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네. [주]상유(桑楡) : 해가 질 때 햇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꼭대기에 비치는 것으로, 인생의 말년을 비유하는 말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제3권에, “해가 서산으로 떨어질 때 햇빛이 나무의 꼭대기에 비치는 것을 상유라고 한다.” 하였다. *答鄭慶輔甲子 頃見書。審知向熱孝履支勝。欣慰無已。鄙生。曳病還朝。氣力憊乏。兼且自知毫無裨補。而叨忝重地已有一年。罪積尸素。知舊之相愛者四面譙責。深欲解職投閑。溫理舊業。或收桑楡之效。此願眞切。而聖意不許遞。每於三告給由。此退溪先生所謂國家法制無退歸一路者。憫憫如何。衰年旅遊。艱苦萬狀。果有搬家之計。得示語。感發多矣。卽已停止。此在自家事。伸縮不難。只是此身曾已致之聖主。不得自由。古人所謂未忍便永訣者。亦是衷曲語也。 정경보에게 답한 편지 무진년(1628, 인조6) 길고 긴 내용을 써서 보낸 그대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바, 덕으로써 남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다는 것을 잘 알겠네. 다만 이는 시세(時勢)가 그렇지 않으니, 아마도 자세하게 살피지 못한 것인 듯하네. 〈우무정(雨無正)〉 시(詩)는 떠나지 않고 있던 자가 이 시를 지어서 떠나간 자를 책한 것이네. 그런데도 또한 그 당시에는 떠나간 자는 고상하고 떠나가지 않은 자는 임금의 은총을 탐한 것이라고 말한단 말인가? 현재는 어렵고 걱정스럽기가 날로 심해지는바,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지고 흩어져 군부가 바로 위태롭고 두려운 중에 있는 때이네. 지금은 바로 신하 된 자가 목숨을 바쳐야만 할 때인데, 도리어 차마 상소를 올려 물러나게 해 주기를 구해 일신의 편안함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형편없이 못난 내가 참으로 감히 선현을 끌어대어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선현이 이러한 때를 당한다면 반드시 감히 치사(致仕)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 못할 것이네. 이른바 “중도(中道)에는 일정한 체가 없고 때에 따라서 있게 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른 말이네. [주]우무정(雨無正) 시(詩) :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흉년이 들어 뭇 신하들이 흩어져 떠나자, 그 떠나는 자를 야속하게 여기면서 하늘이 은혜롭지 못한 것을 원망하는 시이다. *答鄭慶輔戊辰 蒙君縷縷致意。極知出於愛人以德之誠。只是時勢不然。恐未細察耳。雨無正之詩。不去者作此以責去者。且道其時去者爲高致而不去者爲貪戀耶。目今艱虞日甚。人心渙散。君父正在危懼之中。此是人臣授命之日。顧忍上章乞休以圖身便耶。無狀固不敢援比先賢。然使先賢當此時。必不敢乞致仕。所謂中無定體。隨時而在者。正謂此耳。 정경보에게 답한 편지 심부름꾼을 보내 안부를 물어 주어 감사드리네. 나는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네. 지난번에 간신히 산소에 올라갔다 왔으며, 죽은 듯이 깊은 골짜기 속에 누워 있으니, 대개 이미 먼 길을 떠날 가망이 없네. 그런데 근래에 낙하(洛下)에 사는 친구들의 편지를 보니, 모두들 ‘나라에 큰 변고가 있는데 난리에 달려 나오려는 뜻이 없다.’는 내용으로 나를 책하였네. 나 역시 의리와 분수에 있어서 물러나 앉아 있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단지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는 것은 큰일이 되기 때문일 뿐이네. 재차 올리는 상소를 이미 올려 보냈으니, 만일 성상의 비답(批答)에 혹시라도 온당치 못하게 여기는 뜻이 있다면 형세상 모름지기 병든 몸을 이끌고 올라감을 면치 못할 것이네. 그러나 만약 길에서 쓰러져 죽는 데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맑은 조정의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감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스럽네. 보내 준 붉은 게는 병중에 이런 진미를 얻었으매 몹시도 기쁘네. 또한 이 게란 놈은 뒷걸음질을 잘 치기 때문에 옛사람은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을 은미하게 그 속에 담아 보냈네. 몹시도 우습네. *答鄭慶輔 專伻委問。爲感。生尙未快復。頃日艱得上墓。頹然臥深谷。蓋已無望於修途。而近見洛下知舊書。皆以國有大變而無意赴難譙責之。生亦非不知義分不當退坐。只以生行死歸爲大事耳。再疏頃已上送。萬一聖批或有未安之意。則勢須不免舁疾。然若至於僵死道路。則豈不爲淸朝之羞耶。以此不敢決。良可慮也。紫蟹。病中得此珍味。深喜。亦以此物善退步。古人贈以當歸之微意亦在其中耶。好笑。 石門先生文集卷之一 詩○五言律詩 *上愚伏先生 秋風動高興。落日滿空城。樹古蒼煙重。川長白鳥輕。 遙尋方外去。蹔向此中行。始信箕山客。逃堯不爲名。 *上愚伏先生 幽人白首卧靑山。松桂陰中閉石關。却笑浮雲飛不定。乍看東去復西還。 *上愚伏先生 甲辰 磵谷幽幽翠壁重。偶因山路入山中。鰲巖尙有擎天意。愚石還多障水功。 靈境自將塵境別。眞源應與婺源通。到來暗想巖栖樂。夢斷東華百尺紅。 附次韻 山幾縈紆水幾重。多情來訪寂寥中。明知五夜懸燈話。絶勝三秊數墨功。 只怕吾心澄不定。休言此道遠難通。從君試問花兼柳。孰使靑靑孰使紅。 *復用前韻 何秊來占翠雲重。穩卧空山水石中。囱下硏朱尋舊業。鼻端觀白課新功。 地分塵界氛埃斷。境接仙源霧雨通。留寢小齋淸不寐。碧峰初日照窓紅。 *愚伏先生赴京別章 嶺南山水名吾東。其間往往生豪䧺。先生又是嶺之秀。洛中方識深衣翁。 夙將風裁動朝端。仙鶴一下驚人寰。貧賤雖云有道恥。枳棘豈合棲祥鸞。 歸來卜築愚山下。着破藍衫出無馬。悠悠遠懷寄黃虞。坐嘆長江流不舍。 天時爰届一陽新。蟄雷初驚天下春。金門曉闢旭日昇。萬國爭賀瞻堯仁。 先生是時奉玉帛。五雲遙望連閶闔。固知周行儘英流。箇中何人爲第一。 親承天地發育恩。準擬東還布鰈域。北風蕭蕭吹五兩。龍灣八月秋波漲。 西山行吊採薇翁。柴市倘酹文承相。風霜異地節候殊。愷悌只賴神明扶。 臨歧落日獨惆悵。離魂遠逐西飛鳧。 *述行篇 乙卯○聞愚伏先生自江陵被拿命。馳往省之。途中有作。 漢道方全盛。明君繼緝煕。登庸贒夢卜。事業等皋夔。時完平爲首相 足見三階正。心知四境恞。誰敎梟獍逆。動引搢紳爲。時逆獄屢起 玉石何曾別。忠姦倂受夷。可憐愚谷老。亦被聖朝疑。腸爲憂時斷。形因戀闕衰。皇天后土鑑。卿士庶人知。白璧磨逾潤。靑銅洗益奇。緇磷非可變。燥濕不能移。夫豈斯文幸。能無至德疵。學將今日驗。道在幾時施。小子蒙深眷。嚴程敢後期。行裝惟短釰。落日太多歧。命賤浮埃重。心忙逝水遲。免隨河伯去。還戴曉星馳。至茂屹灘。落水中幾危。翌日復理裝登程。 衣薄風偏怒。驂羸路剩危。花姸逢日蘂。松老傲霜枝。觸物添雙淚。攄懷異五噫。官程槽有稅。旅舘屋無籬。不寐防飢虎。非時怯老狸。乞柴供宿爨。買草取輕資。嶺外逢來信。愁邊得展眉。途聽全失實。獄體乃如斯。昭代豈宜爾。我公誠數而。中心猶鬱抑。前路轉逶迤。去去惟看日。遑遑不計時。昔曾瞻魏闕。今又望京師。廟貌應依舊。鵷行想有儀。千門珠錯落。雙闕鳳參差。俛仰冞增感。周觀但自咨。重華元濬哲。庶政本倫彜。孝友誰能間。愚蒙自是私。流言朝著駭。致使睿情悲。逆竪譸張甚。王章岸獄宜。天威時一震。士類或橫罹。梁獄書遲報。鐘冠髮欲絲。大明幽亦照。藻鑑物無遺。哀慕均子。生成仰聖慈。會看恩雨霈。那使㤪聲滋。洛友秋霜氣。松君海鶴姿。叔京,汝涉先已赴洛。 義心俱奮發。竆厄與追隨。但有金蘭好。寧知桂玉炊。余客槖已空。而叔京,汝涉相周恤。 得醨因共啜。逢虀便同吹。顧我極狼狽。病親傷別離。歸慚魏劭義。留切狄梁思。莫慰門閭望。仍吟雨雪詩。夢中山近遠。愁裏月盈虧。久北非初計。終南奈未辭。庶聞神所相。獨自惄如飢。若乃微君故。胡爲滯漢湄。遂决意南下。待漏出門。宿于漢江。踰嶺得聞先生以是日蒙赦命。 臨江不得渡。舟子爲躕踟。 *玉果道中得一律。上愚伏先生。 行人臘月發龍州。告別萱闈涕不收。爲客十秊今日遠。去家千里幾時休。 錦城官路猶南下。玉果江波故北流。謾有歸期長入夢。靑靑春草滿河洲。 *三山觀漲 愚伏先生赴難至三山。遇雨留十數日。三山報恩別號也。 邑人爭報水生洲。爲遣羈懷急上樓。百濟地偏雲一壑。三連城古石千秋。 興亡有數寧關念。天地無竆自可愁。誰挽橫流淪賊窟。餘波分雪島中羞。 三連城新羅地三國時交戍之處。島中葢指丁卯江華事而言。 *愚伏先生輓詞 陶厓正脉國蓍龜。此是邦人所共知。身把行藏看用舍。人將出處卜安危。 班行久屈絲綸手。宵旰虛求柱石資。天意葢令寧社稷。人文猶幸屬宗師。 世間波浪終難定。天上風雲未易期。蘭被挫來香益烈。金經鍊過色逾奇。 心勞幽厲淪亡日。目覩宣光撥亂姿。扶植斁倫名義正。贊揚煕載物情宜。 旣膺堯舜君民責。要及明良際遇時。黼黻笙鏞廊廟用。準繩䂓度士林儀。 謂興禮樂猶云可。馴致雍煕所不疑。此說至公安敢諂。斯民無祿欲何爲。 未看國祚歸盤石。空使愚矇泣路歧。卿月麗天難更覿。文星入地可能追。 陽春和氣思談論。烈日嚴霜寓箚詞。獨有檢湖湖上樹。秋聲葉葉替人悲。 書 上愚伏先生問目 家禮朔朢則於朝奠設饌。其無三獻可見。而今人家多行三獻禮。不知何所據耶。謹按退溪先生喪祭禮答問。其答金而精云依五禮儀註連奠三酌。恐或爲宜。答鄭子中所問則云朔朢奠。在禮亦無三獻等依祭之文。恐當從禮。不知連奠三酌。是一時連進三酌。而恐當從禮者。乃依因朝奠設饌條只行單酌否。但金問在於辛酉。鄭問在於己巳。中晩所見。豈必盡同。且近聞臨河金門。只行單酌。喪祭從先祖。安知先正之不有所禀定。而據禮亦不過如此。則只行單酌者。無乃是乎。然世俗行三獻者多。不知何所從違。 附愚伏答 連奠三酌。恐是因金問而有此答耳。非禮之正。看恐或字可見。只得從答鄭之語。爲合於禮。 士喪禮曰月半不殷奠。今人家或有朔朢竝擧而無隆殺之別。或全廢朢奠而不擧者有之。然考本註士月半不復如朔盛奠云。則特不許其盛。非使之廢也。况常時家廟參謁之禮。朢不設酒不出主。固已有分別。而無全廢之文。據此亦知其不得全廢也。但家禮朔奠條下高氏註引禮䟽云云。唯朔奠而已。不知廢朢奠者。其或有見於此耶。然高氏所引。恐失本禮文意。今欲依禮而行之者。朢日亦設奠。而視朔奠有差則何如。 附愚伏答 士喪殺於大夫。故月半不殷奠。据此則只得如常時上食之饌而已。葢殷奠本因朝奠而有飯羹麵餠魚肉等饌。故上食禮不復行之。禮經所謂不復饋食於下室是也。葬後則又只有上食而無奠。朢日不設殷奠。恐無大歉於人子之情如何。 三年之內。遇節日上墓者。若是合葬則固不當別卓而祭。但位有新舊。服有吉㐫。今以㐫服從事於舊所吉祭之位。似甚未安。尋聞鶴峰先生在喪。親行節祀於新舊合葬之墳。此前事之可爲法者。而但思之鶴峰先生妣先而考後。故得如此。若考先而妣喪在後則尤爲未安。曾於寒食時。令子侄代行。其後始聞西厓先生丁內艱。合葬於先府君墓。而節祀令子姪代行之。然後疑惑頓釋。欲自今後凡遇節祀。皆令子姪代行何如。 附愚伏答 使子姪代行甚得。宋先生論節祀。已有此語矣。 禮有殯。聞遠兄弟之喪。同國則往哭之。此未知兼內外兄弟而言之否。若然則舅之妻之喪從母之喪。往哭之。固在乎其中矣。但以先儒以母家祭非族之祀之語推之。禮所謂兄弟。似指同宗兄弟而言也。果爾凡有喪者於母族之喪。皆不得往見否。禮雖如此。我國則待母家異於中朝。似不可以是爲拘。未知如何而可。 附愚伏答 禮所謂兄弟。指同宗而言也。外家喪事在遠地則不往恐是。况舅之妻。禮本無服。法典雖有服緦之文。然恐非聖人意。 *祭愚伏先生文 謂天有意於右文。何不憗一老而壽吾道。謂天無心於興化。何必降大任而命若人。已焉哉。天實喪斯。痛矣乎。吾將安放。恭惟先生。經天偉器。間世英材。早受知於厓門。已游意於洛建。雍容沉密之氣。蘊爲德而發爲言。凝聚斂藏之功。睟於面而盎於背。蜚英聲於朝著。仙鶴出塵。播令聞於寰區。祥麟在世。周旋揖讓之以禮。蔚然君子人儀容。消息盈虗之合時。任乎命物者處分。彼猘犬方肆其狺噬。何蘭佩必欲其芬芳。追尋故山之漁樵與爲知己。歌詠先王之德澤若將終身。那知寗武效愚之辰。遽承周宣揚側之命。修身以竢。雖欲安於桑楡。惟義所存。其敢忘乎宗社。立政則惠民無告。納約則格君非心。日三晉接之筵。動必開陳堯舜。時一燕閒之地。凜若對越神明。及至修攘之有方。益見遵晦之得力。苟可以致君澤物。又何必立言著書。第緣眷注之益隆。衆口金鑠。仍獲負荷之暫釋。天意玉成。自分與世難諧。孰若從吾所好。方將選名區而盡餘齒。遂欲竆勝事而樂淸時。痛二竪之難除。慨百身而莫贖。光明正大之氣。升爲列星。黼黻經綸之才。斂就一木。昔者去爲民望。國猶有所恃而無憂。今也沒爲世悲。道將何所依而不廢。民之無祿。天胡忍玆。嗚呼哀哉。自小子之從魚。非一朝之侍燕。牛山夜氣。豈無萌蘖之生。沂水春風。或備冠童之列。雖未能觀感而有得。或庶幾矜式而依歸。丈席生塵。摳衣請益之可再。儀形入夢。承誨侍湯之猶前。梅嶽秋容。莊重端嚴之相未改。商飈夕怒。平澹冲和之氣遽亡。事去人非。固知稅駕無所。日暮途遠。且欲擧足安之。嗚呼哀哉。卽遠之期已臨。追慕之誠倍切。佳城仍舊卜。背國師而案撿湖。近域有新塋。右翰林而左宣敎。懽侍定如平昔。疚懷可慰斯今。由往以觀。福善殆若虗說。推理以得。食報當在孤孫。吾豈妄云。天必有定。嗚呼哀哉。死生常理。在英靈其何悲。幽明異途。是愚昧之偏痛。布奠觴而永訣。衣袂將殷。秉翣紼而長吁。天日爲黑。言不盡意。聲不盡哀。不昧者存。庶歆菲薄。嗚呼哀哉。 愚伏先生遺事 乙卯以沈憬獄事。逮繫禁府。時鬻獄已成。昏朝雖知其枉。而猶不肎釋。榮邦以所聞於寒岡者。謀於同儕。蔡君樂而徑以書密通於先生。先生答曰諸君之所以愛我者。乃所以累我也。古人雖有爲之者。與今日事自不同。幸以吾言謝諸君。君子愛人以德。不以姑息。若不論道理如何。必欲爲之。勿復相見也。 余在鄕時。寒岡先生浴椒南歸。與柳季華諸同人拜於知保驛。余問曰後漢魏劭。爲其師納賂免罪。於義似無害。而時議有譏之者如何。寒岡答曰無害。古人有行之者。閎夭,散宜生是也。若有所欲爲。須及時爲之也。 時滯獄已久。冬寒斗嚴。諸宰之憂公病者。因金應箕以通于公曰日寒如此。病人必不能堪。何不呈病保放耶。李應敎溟告病出獄。此事已爲規例。若上手本。卽當白上施行矣。先生答曰李應敎自是眞病。吾則無病。何可以無病爲有病。自取欺君之罪乎。若是則入獄非罪。出獄爲罪矣。 丙辰冬。先生在栗里第。有以寒岡戊申乙卯全恩二疏來就問者。先生曰戊申疏未知如何。乙卯疏豈不善乎。曰以罪有輕重歟。曰非也。戊申則寒岡爲憲長。昔桃應問於孟子曰臯陶爲士。瞍殺人則如之何。孟子曰執之而已。今之憲長。卽古之士師也。若準之以臯陶之法。揆之以孟子之言。則臨海所被罪名。在所當執乎。在所當捨乎。乙卯則寒岡旣非治獄之官。凡可以補君德者。宜無不至。况全恩者。人君之盛德。而將順其美者。人臣之大義也。爲重臣者。孰不欲其君之盡善盡美。而無爲後世秉筆者之所訾譏也哉。曰古今得無異乎。曰世有先後。理無古今。曰寒岡不知其不可乎。曰此則未可知也。但寒岡出處。與佗人自別。此亦出於山野樸直之所爲。雖曰有過。亦可卽此而知其仁矣。 先生癸亥甲子。爲玉堂長官。初遭廢世子祬穴地將逃之變。再遭仁城及諸王子出於适黨之招。皆立異於兩司斷義之請。至被勳宰直斥。醜詆萬端。而不變不挫。戊辰逆獄之時。則先生爲都憲。因事累辭不得請。黽勉出仕。而仁城君珙又出於賊招。雖不知其罪之可死與否。而旣爲秉法之官。則佗非所敢計也。當百官廷請之日。豈不知全恩之爲盛德而將順之爲忠愛也哉。然而士師爲職。但知有法。而不知天子父之爲尊則况於王子乎。殺人之罪。猶不可捨則况名爲謀逆者乎。王法旣不可廢則惟當自盡其在我者而已。故鞠畢勘勳。自是古事。而乃至累疏乞免。此又與晦齋先生乙巳辭勳事畧同。自古贒人君子之所爲。無不異世而同符。其處事之明白痛快。雖謂之百世不惑可也。然必待傳後文字委曲備悉然後可無未盡。而竊見先生行狀中。於戊辰逆變之初。辭都憲一節。畧而不錄。使後之欲知先生事蹟者。無所考據。而同歸於沒星之秤。雖曰偶失於照勘。而其不能無憾則一也。余故不得不辨。因並錄其所聞於先生者云。 우복 선생 언행록 ○ 선생은 계해년(1623, 인조1)과 갑자년에 옥당(玉堂)의 장관(長官)으로 있었는데, 처음에는 폐세자(廢世子) 지(祬)가 땅을 파고 도망치려고 한 변고를 만났으며, 두 번째에는 인성군(仁城君) 및 여러 왕자들의 이름이 역적 이괄(李适)의 무리들이 자백한 공초(供招)에 나오는 변고를 만났다. 선생은 이 두 가지 일에 대해서 의리에 입각하여 처단하자는 양사(兩司)의 의론에 대해 이견(異見)을 주장하였다가, 훈재(勳宰)가 임금의 면전에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만단으로 헐뜯는 일을 당하였는데도 자신의 주장을 변치 않으면서 뜻을 꺾지 않았다. 무진년(1628, 인조6)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적에는 선생이 도헌(都憲)으로 있었는데, 일로 인하여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억지로 출사하던 중에 또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왔다. 선생은 비록 그의 죄가 사형시킬 만한 죄인지 아닌지는 몰랐으나, 이미 법을 지켜야 하는 관원으로 있었으니, 다른 것은 감히 따져 볼 겨를이 없었다. 백관(百官)이 정청(庭請)하는 날을 당하여 어찌 은혜를 온전히 하는 것이 임금의 성대한 덕이고, 그런 임금의 뜻을 따라 주는 것이 신하로서의 충성과 사랑이 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러나 고요가 사사(士師)의 자리를 맡고 있으면서는 단지 법이 있는 줄만 알고 천자의 아버지가 존귀한 분이란 것은 몰랐다. 그런즉 더구나 왕자(王子)에 대해서이겠는가. 또한 살인을 한 죄도 오히려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는데, 더구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서 나온 경우이겠는가. 왕법(王法)을 이미 폐할 수 없다면 오직 자신에게 있는 도리만을 다할 뿐이다. 이 때문에 선생도 대간(大諫) 김상헌(金尙憲) 등이 주장한 의리로 결단하라는 청에 대해서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추국(推鞫)을 마치고 공훈(功勳)을 감정(勘定)함에 미쳐서는 그에 대한 고사(故事)가 분명히 있는데도 선생은 이에 상소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처사의 명백하고 통쾌함은 비록 백세 뒤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후세에 전할 문자를 곡진하고 상세하게 쓴 뒤에야 미진함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삼가 보건대, 선생의 행장(行狀) 가운데에는 무진년에 역변(逆變)이 일어난 초기에 도헌에 제수되었다는 한 단락이 생략된 채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후세에 선생의 사적(事蹟)을 알고자 하는 자들로 하여금 근거로 삼을 바가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부득불 이를 기록하고, 인하여 선생에게 들은 것도 아울러 기록하는 바이다. - 이것은 바로 선생이 정심한 도리를 오묘하게 운용하여 때에 따라서 중도를 얻는 권도(權道)의 극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평소에 논한 아래에 아울러 덧붙여 써서 군자의 도는 물아(物我)가 한 이치이고 고금(古今)이 한 이치임을 밝힌다 ○ 경자년(1600, 선조33) 봄에 선생이 영해 군수(寧海郡守)가 되었는데, 영해(寧海)는 토속(土俗)이 싸움질을 좋아하고 남의 잘못을 고발하기를 좋아하여, 동료들의 잘못을 글로 써서 밤을 틈타 관청의 뜰에다가 몰래 던져 넣는 일이 계속되었다. 선생이 이에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아랫사람들에게 엄하게 신칙해서 그런 것을 볼 적마다 곧바로 불살라 버리게 하고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하게 하였다. 그러자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이 드디어 끊어지니, 도사(都事)로 있던 이함(李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서 익명서(匿名書)를 던져 넣는 폐단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아무도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수령이 와서 다스린 뒤로는 그런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군자의 덕화(德化)가 다른 사람에게 스며들어 가는 것이 이처럼 쉬울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다.’ 하였다 ○ 선생이 병을 앓아 묵장(墨庄)에 누워 있었는데,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기로 소문이 난 자가 병문안을 왔다. 그러자 선생은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으면서 그와 더불어 말을 나누지 않았다. ○ 선생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지낸 지가 전후로 3년이나 되었는데도 한 번도 가사(家事)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병세가 위독해짐에 미쳐서 가인(家人)에게 이르기를, “나를 장사 지냄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법대로 하라.” 하였으며, 하고 싶은 말씀을 물으니, 이르기를, “성상께서 의원을 보내어 병세를 물으시고 동궁께서 약물(藥物)을 하사하심이 전후로 답지하였는바, 천은이 망극한데, 이 생에서는 어느 날에나 다시 보답할 길이 있겠는가.” 하고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
출처: 장달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