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국제서예해서-고방[3423] 金富軾(김부식)시 안화사 치재(安和寺致齋)
安和寺致齋[ (안화사치재)
안화사에서 재를 올리고.
金富軾(김부식) 詩 (1075~1151)
窮秋影密庭前樹(궁추영밀정전수)
깊은 가을 뜰 앞엔 빽빽한 나무 그림자,
靜夜聲高石上泉(정야성고석상상천))
고요한 밤이라 돌 위에 떨어지는 샘물 소리 높아라.
睡起淒然如有雨(수기처연여유우)
잠자다가 일어나니 서늘한 바람도 내린 듯하니,
憶曾蘆葦宿漁船(억증로위숙어선)
옛날 갈대숲 고깃배에서 자던 일이 생각 나네.
致齋치재=제사나 불공(佛供)을 드리기 위하여 전날에
주육(酒肉)을 끊고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며 재계(齋戒)하는 것이다.
窮秋(궁추)=깊은 가을,늦가을. 窮=다할 궁,본자(本字)竆.
凄然(처연)= 싸늘하고 오싹하다, 凄=쓸쓸할 처,스산하다.차갑다.
蘆葦(로위)= 갈대 숲,
蘆=갈대 로, 절굿대뿌리 려. 葦=갈대 위, 짤 위.
金富軾(1075~1151)
어려서부터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최고의 문장가로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생각에
宋나라의 문장가 집안 蘇洵의 자식에게 붙인 이름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따라 富軾과 富轍의 이름을 지었다
1096년(숙종 1년)이었는데, 그로부터 20여 년 동안 주로
학문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의 폭과 깊이를 더해 나갔다.
1116년(예종 11년) 7월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였다.
휘종은 이제 막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패기에 찬 학자에게
司馬光의 資治通鑑 한 질을 선물로 주었다.
이는 중요한 계기로 1145년(인종 23년) 인종의 명을 받아
本紀 28권, 志 9권, 表 3권, 列傳 10권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이다
또한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개성)의 궁궐이 불에 타자
1135년(인종 13년) 1월, 서경에서 묘청은 무리를 모아 ‘서경천도론’을 난을 일으켰다.
이때 개경 유신을 대표하는 김부식은 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三軍을 지휘 통솔해 진압에 나섰다. 묘청의 동조세력인
鄭知常, 金安, 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고 1년 2개월 만에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공적을 바탕으로 김부식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모두 왕 아래에서 나라의 일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위치였다.
그러나 그의 일생이 끝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치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정적은 생겨났고,
그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졌다
이규보의 백운소설에서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 날 봄날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
버들 빛이 천 가닥의 실처럼 푸르고, 복사꽃 일만 점이 붉기도 하다
그러자 문득 공중에서 정지상이 귀신으로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이 엉터리 같은 놈아, 네가 무슨 재주로 버들가지가 천 가닥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았다는 거냐? 시를 쓰려면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
버들가지 가닥가닥 푸르고 복숭아꽃 송이송이 붉구나
라고 써야지, 이 멍청한 놈아”라고 했다.
정지상은 시에 강하고 김부식은 산문에 강했다.
시적 자질에서 떨어지는 줄을 아는 김부식이 정지상에게 느꼈을 열등감이야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김부식의 전아한 산문의 멋은 당대 최고였고,
문벌을 이룬 자신의 집안에 대해 갖는 자부심은 팽팽했다.
거기에 정지상을 비교하기가 민망할 따름이다.
원문=동문선 제19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東文選卷之十九 / 七言絶句
安和寺致齋
窮秋影密庭前樹。靜夜聲高石上泉。
睡起凄然如有雨。憶曾蘆葦宿漁船。
안화사 치재(安和寺致齋) - 김부식(金富軾)
깊은 가을에 뜰 앞 나무는 그림자 빽빽한데 / 窮秋影密庭前樹
고요한 밤 돌 위의 샘물, 소리가 높아라 / 靜夜聲高石上泉
자다가 일어나니 서늘하기 비 오는 듯하이 / 睡起凄然如有雨
일찍이 갈대 숲 속 고깃배에 자던 일이 생각나누나 / 憶曾蘆葦宿漁船
[주-D001] 안화사 치재(安和寺致齋) :
치재는 제사나 불공(佛供)을 드리기 위하여 전날에 주육(酒肉)을 끊고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며 재계(齋戒)하는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