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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동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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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자료실 스크랩 녹두꽃 피다(154) 서(徐) 접주의 13세 아들의 보복 방화로 괴산은 불바다
추연창 (淵庵) 추천 0 조회 61 15.04.29 16: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885년에 충청 관찰사 심상훈과 단양군수 최희진은 동학이 조직을 확장해 나가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동학 지도자 체포령을 내렸다. 

최시형은 1889년 7월에 탄압이 가중되자 보은 장내리의 도소를 폐지하고 괴산 신양동에 들어와 은거한다. 


관원이 이를 알아차리고 들이닥쳐 동학의 거두 강무경(姜武卿)· 방병구(方秉九) · 정

영섭(丁永燮) · 조상갑(趙尙甲) 등이 잡히고, 10월에는 서인주(徐仁周)), 강한형(姜漢馨), 신정엽(申正燁) 등이 체포된다. 

이때 상황을 보면 해월 최시형선생은 "1889년 7월에는 충북 괴산군 신양동(新陽洞)에 계셨으나 손천민이 찾아와 서인주가 체포되는 등 교인에 대한 탄압이 다시 심하여 지고 있음을 알리자 인제의 김연호의 집으로 잠시 피신을 하였다. 그러나 이 곳에까지 감시가 늦추어지지 않음에 따라 인적이 드믄 동해안의 고성군 죽왕면 왕곡마을로 피신을 한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특히 서인주는 최시형이 각별히 아끼는 인물이며, 호남 지방 동학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강경파다. 서인주(徐仁周, 일명 서장옥徐章玉)은 청주 출신으로 간혹 수원 출신으로 언급되기도 했지만 이는 초기에 수원 지방에서 포접 활동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강원도 인제로 최시형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그가 관에 체포되었을 때, 최시형이 그를 생각하며 식음과 잠자리를 삼가며 정성을 들일 만큼 중용하였다. 

여기서 신양동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디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신양동은 괴산 이헌표 접주가 살았던 선당리 자연부락 음짓말과 함께 붙어 있는 양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괴산의 이헌표(李憲表) 접주는 양반 출신으로,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접주도첩을 받았다. 

이헌표는 기록 등에서 일체 언급이 되지 않지만 충주 괴산 음성 지역에 최시형의 도피처를 마련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괴산 지역의 동학은 2차봉기 이전의 투쟁 기록도 만날 수 있다.

‘1894년 4월 18일에 괴산 · 연풍 등지에서 동학교도가 봉기하여 토호들의 재산을 빼앗고 구타했다.’는『나암수록』의 기록도 있다.


10월 6일 괴산읍 전투 상황은 당시 일본군 측의 상세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라다(原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27명이 괴산관아에 도착하자마자 다급히 싸움터로 출동했다. 괴산에서 음성방면으로 약 6km쯤 떨어진 당동(唐洞, 현 음성군 원남면 상당 하당리)에 집결해 있는 적군(동학농민군)과 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3만 명을 헤아리는 적군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괴산읍으로 후퇴하려 했지만 이미 읍이 동학농민군에 점령되어 오후 4시 30분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굴현(屈峴, 현 문광면과 청천면 경계인 지경고개) 오리동(五里洞)을 거쳐 다음날 새벽에야 충주 본대(가흥리)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전 개입은 괴산군수 이용석이 충주 가흥리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사령부에 동학농민군 토벌을 요청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동학교단 기록이나『동학란기록』『순무선봉진등록』에도 “이날 음성 방면에서 2만 명, 보은 쪽에서3만 명이 습격했다.”고 적어 당시 동학농민군의 군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사상자는 20여 명이고, 일본군은 1명이 즉사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가흥 병참사령부에서는 야마무라(山村忠正) 중대장으로 교체하고, 먼저 도착해 있던 이이모리(飯森) 소좌의 지휘를 받게 했다. 이이모리 소좌는 10일 밤 동학농민군이 충주와 괴산 사이에 위치한 남창과 월두동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탐 보고를 받고 출동하여 그날 동학농민군 1명을 붙잡아 사살하고, 다음날은 10명을 붙잡아 6명을 타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로도 괴산 읍내는 다시 한 번 전화에 휩싸이게 되는데, 첩정에 “10월 6일에는 동도로 처형된 서(徐) 접주의 13세 아들이 보복 방화 했다.”면서 “괴산읍은 동학농민군에게 두 차례 습격을 받아 읍내가 초토화되었고, 동학농민군 희생도 컸다.”고 적었다. 괴산 싸움은 최시형의 9월 기포령이 내려진 뒤 경기·충청 지역동학교도로 형성된 북접 연합군이 최초로 치른 대규모의 전투인 셈이다.


이 전투 끝에 동학농민군은 보은 장내리로 이동, 다시 논산으로 진출하여 호남 동학농민군과 대연합군을 형성했다. 관군의 참혹한 보복 학살극동학농민군 본진이 보은으로 옮겨간 뒤에는 관군의 참혹한 보복학살이 자행된다. 


관의 정토 기록에서는 “26일 괴산 싸움을 주도한 두령 우현관(禹顯寬) 백창수(白昌洙)를 잡아 처형하고, 청안 난매리(蘭梅里)에서 음죽 박만업(朴萬業)과 음성 접주 송병권(宋秉權)과 도인 곽영식(郭永植) 부자를 포살하였고, 10월 26일에는 보은 청안 등지를 순회하다가 접사 안무현 (安武玄) 등 4명을 붙잡아 사살했다.”고 했다. 

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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