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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의 상황 | 일제의 무단통치 → 애국계몽운동 단체 해산(신민회 등) , 의병에 대한 탄압 강화 → 국내에서 민족운동 전개가 어려워 짐 →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이동 | ||
국내의 민족운동 | 비밀결사의 형태 - 독립의군부(1912) : 의병장 임병찬, 고종의 밀명으로 - 대한광복회(1915) : 박상진과 김좌진 중심, 군대식 조직, 독립군 양성 노력, - 송죽회, 조선국민회 등 | ||
국외의 민족운동 (독립운동기지 건설) | 서간도 (남만주) | 신민회가 삼원보에서 경학사(자치기관), 신흥무관학교(독립군 양성) 운영 | |
북간도 | 한인집단촌 형성 – 중광단 조직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 민족교육기관 설립 운영 | ||
연해주 |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대한광복군정부가, 무장독립투쟁 준비. | ||
미주 | 대한인국민회(샌프란시스코) 대조선국민군단(하와이) | ||
중국 |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1918) |
무단 통치 헌병 경찰 통치 | 공개적 활동이 어려움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운동 | 자립단 | 대성학교 |
송죽회 | 숭의여학교 | ||
신민회 | 1907~1911까지 활동, 105인 사건으로 해산 공화정 지향,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 섬 | ||
대한광복회 | 박상진과 김좌진 중심, 무장군사조직으로 독립군 양성, 공화정 실시 주장 | ||
독립의군부 | 고종의 밀명으로, 의병장 임병찬이 조직 의병장과 유생들이 중심. → 국왕중심의 성리학적 질서(전제군주제) 회복 노력. |
2. 3`1운동의 배경
3`1운동의 배경 | |
국외적 |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창 → 그 민족의 장래는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 * 신한청년당(신한청년단)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임시정부 외무총장) : 독립청원서 제출. *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만주에서 독립지도자들이, 1918, 중광단) * 독립선언서 발표(도쿄의 유학생들이 중심, 2`8독립선언. 1919) |
국내적 | * 일제의 강압적 무단통치와 경제수탈(경제적 착취) * 고종의 독살설 * 종교계지도자들이(기독교, 천도교, 불교) 독립만세운동 계획 전개 |
3`1운동의 전개 |
독립선언서 발표(종교계 지도자들이 민족대표 구성. 33인. 학생들 가담) →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탑골공원(학생들 중심)과 태화관(요릿집. 민족대표 다수) → 만세시위운동 전국 확산(대도시 → 중소도시 → 농촌지역 ) → 해외로 확산 → 일제의 탄압 : 일제는 독립 만세 시위자를 폭도(暴徒)로 규정하고 군대와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적(발포, 살육, 고문, 방화 등)으로 탄압함 →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 유관순의 옥중(獄中) 순국(殉國) 등 →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으로 인한 피해의 규모는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 6948명으로 추산된다고 함. → 실패 |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의미, 가치, 성격) |
*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최대 규모의 거족적 민족운동) * 학생, 농민, 노동자 등의 참여(다양한 계층의 참여) * 다양한 민족운동 전개에 영향을 줌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영향과 독립군 활동에 기여 *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반영 운동에 영향을 끼침 * 비폭력운동(평화적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바뀜 * 일제 통치정책의 변화 초래(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
(1) 3 ․ 1운동의 배경
1) 원인 :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 수탈
2) 배경
① 계속된 민족운동의 연장
개항이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면서 추진해온 민족운동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3`1운동이 일어남.
② 민족의 응집력(凝集力) 강화
개항이후 여러 갈래의 민족운동이 국권상실(1910)을 계기로 계층 간의 차별이나 이해를 초월하여 ‘독립’이라는 민족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결속됨
③ 독립 의지의 강화
3) 계기
①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1918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의 결말을 짓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세계평화안으로 ‘ 그 민족의 장래는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는 약소(弱小)민족의 독립운동을 자극하여 여러 나라에서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패전국의 식민지인, 독일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민족에만 해당되고, 미, 영, 일 등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 지배하는 식민지의 독립은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는 해당하는 원칙이 아니었다.
② 2 ․ 8 독립선언(1919.2.8): 3․1운동의 도화선 구실
일본의 토쿄 유학생들은(최용팔, 송계백, 김도연 등) 변화하는 국제 정세(윌슨의 민족자결주의 - 각 민족은 그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1919년 2월 8일에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낭독함
③ 고종의 독살설
일제는 고종이 즐겨 마시던 커피에 독을 타서 독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식혜에 독을 타서 죽게 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현장에 있었던 궁녀도 죽였다.
(2) 3 ․ 1운동의 전개
1) 거족적(擧族的) 독립운동 준비
고종의 독살설이 유포되고, 2`8독립선언으로 독립기운이 고조되자, 학생· 천도교· 기독교· 불교 세력을 중심으로 단일화된 주도세력은 고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 3월3일)을 계기로 3`1일을 거사일(擧事日)로 잡음
2) 전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지방에 있던 길선주 ․ 김병조 ․ 유여대 ․ 정춘수는 불참)은 서울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式辭)를 들은 다음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였다. 그리고 미리 전화 연락을 받고 태화관으로 달려와 포위해 있던 80여 명의 일본경찰에 의해 의연한 태도로 연행되었다. 그 무렵 탑골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희생을 염려하여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한 청년이 자진하여 등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끝날 무렵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종로 쪽으로 뛰쳐나가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수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행진하였으며, 시위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시내가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이 만세시위행진은 해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나갔으나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단 한 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던 군중은 일본군대와 기마(騎馬) 경찰의 무력저지로 인하여 강제 해산되고 주모자 130여 명이 체포, 구금되었다.
3월 1일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서울 이북지방에서도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2일에는 경기도 개성, 충청남도 예산 등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밖에 전라북도는 4일 옥구 시위, 경상북도는 8일 대구 시위, 전라남도는 10일 광주 시위, 강원도는 10일 철원 시위, 함경북도는 10일 성진 시위, 경상남도는 11일 부산진 시위로 각각 번져갔고, 19일에는 괴산 시위로 충청북도에 점화됨으로써 전국 13도가 일제히 3․1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며, 21일 제주 시위로 바다 건너 제주도에까지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주체는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 천도교․그리스도교․불교․학생측 외에도 각 지방의 만세운동에는 농민이 가담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도시의 상인들은 연합하여 철시를 단행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노동자․승려․관리는 물론 어린이․거지․기생이 주동한 곳도 있었다.
국내에서의 3․1운동의 거센 물결은 국외에도 파급되었다. 서간도와 북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간도와 훈춘 등 둥산성[東三省(동삼성)]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미주지역에 흩어져 살던 한국 교포들도 국내의 3․1운동에 호응해서 모두 궐기하였다. 프리모르스키 지역에서도 3월 17일 대한국민회의가 주체가 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적 궐기의 규모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집회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9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 6948명으로 추산(推算)된다. → 3·1운동의 주도층은 지식인, 청년, 학생, 종교인 등이었지만, 중소상인, 노동자, 농민 등 모든 계층이 참여하였고, 국외로는 만주, 간도, 연해주, 하와이 등 우리 겨레가 사는 곳이면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남.
♣ 학생들은 (일제)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서, 독재(이승만)에 맞서서 막히고 왜곡(歪曲)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틔우는데 공헌했다.
♥ 3 ․ 1 운동의 전개
독립선언서 발표→ 만세시위운동 시작→ 전국으로 확산 → 해외로 확산
3) 일제의 탄압
일제는 독립 만세 시위자를 폭도(暴徒)로 규정하고 군대와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적(발포, 살육, 고문, 방화 등)으로 탄압함 →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 유관순의 옥중(獄中) 순국(殉國) 등 →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으로 인한 피해의 규모는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 6948명으로 추산된다고 함. → 실패
♥ 3 ․ 1 독립 선언서(기미 독립선언서)
선언문은 최남선이 작성하고, 공약 3장은 한용운이 작성함.
공약 3장
- 금일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적 요구이니 결코 배타적(排他的) 감정으로 일주하지 마라
-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고,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3․1운동 때 일본군경이 화성군 제암리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 3․1운동이 행해지던 1919년 4월 5일 발안 장날,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일본인 경찰부장이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일본군 보병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 강연이 있다고 속여 제암리의 그리스도교․천도교 신자인 남자 20여 명을 제암리 교회당에 모이게 하고 출입문․창문을 봉쇄한 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되었다. 곧 이어 일본군경은 민가에 불을 놓아 31호를 불태우고 39명을 학살했다. 제암리 참변을 전해 들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자 선교사인 영국인 F.W. 스코필드는 4월 17일 현장에 가 참상을 촬영하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에 보내 여론화하였다. 이에 일본 내에서도 여론화되는 등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4) 3 ․ 1운동의 실패 원인
① 일제의 무력적 탄압
② 우리에게 불리한 국제 정세
일본의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다 - 국제적 위치 공고(鞏固)
③ 조직력 미약(微弱)
(3) 3 ․ 1운동의 의의
1) 성격
① 평화적 투쟁
3· 1 운동은 학생들이(유관순 등) 주도하였고, 진행 과정에서 농민들의 참여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평화적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으나, 일제(日帝)의 강경 탄압(제암리 학살 사건 등)으로 점차 무력(武力)시위로 전환되어 갔다.
② 독립 만세 시위
2) 의의(意義) = 의미, 가치
① 최대 규모의 거족적(擧族的) 독립운동
② 전(全) 민족적인 단일(單一) 운동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한 운동이었다. -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바탕이 됨
③ 독립 결의와 자주정신을 세계에 과시 함
④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
3) 영향
① 아시아 각국(各國)의 민족운동에 영향을 줌
- 중국의 5․ 4 운동,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운동, 베트남 ` 필리핀` 이집트 등의 민족운동에 영향을 줌 -
② 일제의 식민 통치정책 변화(무단통치 → 문화통치)
③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 마련
④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거가 됨
♥ 만주 731부대 : 마루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균 병기의 위력을 확신한 일본군 이시이 군의 중장이(이름 : 이시이 시로) 관동군의 만주 지배를 발판으로 세균전 연구를 자행한 곳. 세균 병기를 개발하기 위해 페스트, 탄저, 콜레라와 같은 치사율도 높고 전염성동 높은 강한 세균을 연구 대상으로 역사에 대항한 항일 투사들과 많은 포로들에게 자행. 9년 (36 ~ 45년)간 약 3천명 이상의 마루타가 독가스, 동사실험, 세균실험 대상으로 사라지며 실험 보고서에 기록 되었다.
마루타란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일본 관동군 만주 제 731부대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러시아인등 전쟁포로 및 그 외에 구속된 자로 약 3천여 명이상의 마루타 즉 "통나무"란 뜻으로 생체 실험 대상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