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의 땅, 안성을 찾아
[개설]
‘(경기도) 안성‘이라는 지명의 고유명사는 ‘안성맞춤‘으로 일반 명사화하여 가본 적은 없어도 누구의 입에나 오르내리는 지명이 되었다.
그것은 안성에서 유기그릇(놋그릇)과 가죽꽃신을 잘 만들어 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사진 : 안성군 삼죽면 기솔리 국사봉에 있는 쌍미륵 중 하나 >
2일과 7일이 들어있는 날은 안성장날로, 예전에는 교통의 요지이라 전국 팔도의 물건들이 다 몰려들어 번성기를 누렸는데 지금은 상설시장화하여 옛날의 영화를 잃어버렸다.
‘안성(安城)‘이란 글자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편안한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드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해 농산물이 풍부하고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장이 서니,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옛날 신분제 사회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그 풍요로움이란 한갓 귀족이나 양반님네들의 것이었을 뿐이다.
유기장이의 끝없는 방자 두들기는 소리와 갖바치의 쉴새없는 손놀림, 장터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져주는 남사당패의 아슬아슬한 몸짓이 결코 그들에게 생활의 여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그러하니 이곳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안성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彌勒)‘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땅이 되었다.
<사진 : 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미륵>
전국의 장사치들에게는 잘만 하면 크게 이문을 남길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며, 도적의 무리들에게는 한탕할 수 있는 탐나는 땅이 되었으리라.
그리하여 ‘안성‘하면 조선시대 최고의 도적이었던 ‘임꺽정‘(벽초 홍명희의 소설)의 주무대가 되었고, ‘장길산‘(황석영의 소설)이 광대패거리로 떠돌다가 미륵의 세상을 꿈꾼 것도 이곳이었으며, ‘허생‘(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이 매점매석으로 전국의 유통질서를 마비시키고 엄청난 돈을 벌었던 곳이 바로 안성땅이었다.
그러한 곳이기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미륵불‘들은 바로 가난한 백성들의 구구절절한 염원을 최소한 700년 이상을 많게는 1천년 이상을 들으며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해온 것들이다.
절들 또한 이러한 백성들의 소원과 무관한 곳이 아니었다. 칠장사는 바로 도적의 무리와 인연을 맺었던 곳이고, 청룡사는 가장 많은 애환을 안고 있는 남사당패와 인연을 맺었던 절집이다.
오늘 우리는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을 담아내고 있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원해준다는 미륵의 땅을 찾는다. 비록 균형잡힌 잘생긴 모습들은 아니지만, 아니 다소 못난 듯하기에 백성들의 사랑을 더 받았을지도 모를 ‘미륵불‘들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고뇌를 읽어낼 수만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훌륭한 답사자가 된 것이다.
미륵당의 태평미륵
안성군 이죽면 매산리 소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고려말 몽고난 때 죽주산성에서 적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살해한 김윤후의 우국충절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였다는 설과 조선 후기 영조 때 최태평이란 사람이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온다.
그러나 실제 불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 초로 추정된다. 구전되는 얘기는 단지 그들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태평미륵은 키가 3.9m나 되는 거대한 불상으로 누각안에 모셔져 있는데, 이곳을 동네 사람들은 미륵당이라고 한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중생의 소원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뜻의 여원인(與願印)의 자세를 취했다.
봉업사터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은 미륵당과는 약 800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죽주산성쪽 대각선 방향으로는 3층석탑과 아름다운 통견의를 걸치고 있는 석불입상이 있는데 이곳 역시 가볼만한 곳이다.
봉업사의 창건연대와 폐사 시기가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고려 태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공민왕이 이 절에 들러 진전을 참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초기에는 건립되어 고려말까지 유지되어온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는 높이 4.7m로 남북으로 1m간격을 두고 마주서 있으며, 오층석탑(보물 제435호)은 안성군내에서 가장 우수한 석탑으로 꼽히는데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장사(七長寺)
안성군 이죽면 칠장리에 있는 칠현산에 안겨 있는 절집이다. 고려 때 혜소국사가 일곱 도적을 제도하니 이들이 일심정진해 도를 깨달아 산이름도 칠현산이 되고 한때 절 이름도 칠현사라고 불리웠다.
<철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전국을 통틀어 몇 개 안되는 귀중한 것으로 조선 중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원형 철통 14층으로 11.5m의 높이인데 본래는 28층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이 있는 절인만큼 볼거리도 많다. 일곱명의 도적이 깨달아 化했다는 7명의 나한이 자그마한 전각에 봉안되어 있다.
새로 지은 명부전 벽에는 임꺽정과 7명의 도적들과 관계된 그림들과 궁예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어 한층 친근감을 갖게 한다.
이 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다.
소조 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우리나라 절집을 가보면 대개 일주문(一株門)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이나 나무로 깎아서 만든 조각상을 봉안하고 있다. 칠장사의 사천왕상이 유명한 이유는 진흙으로 빚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중턱에 있는 사왕천의 주신으로 사방의 천왕 이름과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持物)을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동:지국천왕(持國天王) - 검(劍) 남:증장천왕(增長天王) - 용(龍)
서:광목천왕(廣目天王) - 탑(塔) 북:다문천왕(多聞天王) - 비파(琵琶)
보통 이 사천왕상은 불거지고 부릅뜬 눈, 잔뜩 치켜올린 검은 눈썹, 크게 벌어진 빨간 입 등 무서운 얼굴에 손에는 큼직한 칼등을 들고 발로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사천왕은 위로는 도리천이 계시는 제석천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을 지배하며, 불법(佛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수호신이기 무섭게 표현된다.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무서운 듯하면서도 눈매나 입매 등의 표정을 보면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익살스러운 느낌마저 있다.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조선중기에 중창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장중한 맛을 주는 맞배지붕을 갖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죽산리 봉업사터 석불입상(보물 제988호)
이 불상은 죽산산성(竹山山城) 아래에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으로 머리와 신체가 절단되었지만 비교적 상태가 좋은 편이다.
또한 이 일대는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번창했던 봉업사터(奉業寺址)로 둥근 연꽃 기단(基壇)과 탑재(塔材)가 흩어져 있어서 주목된다.
둥근 연꽃대좌 위에 서 있는 불상으로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肉)를 얹었고,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를 걸치고 있다.
왼손은 가볍게 내렸고, 오른손은 약간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부피감 있는 얼굴은 형식화(形式化)한 모습이며, 굴곡없는 평판적(平板的)인 신체에 머리와 두손을 크게 묘사하였고, 이들에 비해 빈약하게 처리한 신체에서 다소 경직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큼직한 육계라든가 두터운 U자형 의문(衣紋)이 두 다리께까지 내려와 타원형을 이룬 것 등은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이 불상은 고려(高麗) 초기(初期)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
고려 문종 14년(1060)에 세운 비로, 금이 간 비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숨겨져 있다.
청룡사(靑龍寺)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 서운산 기슭에 안겨져 있는 절집이다. 절집에 들어서면 마치 여느 가정집에 들어선 듯 아담한 분위기를 풍기는 절집이지만 아주 독특한 건축맛을 주는 대웅전(보물 제824호)이 있는데다 남사당패의 안식처이기도 해 유명한 곳이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조성된 불단도 꼭 눈여겨보아두어야 할 것들이다. 경기도, 충청남⋅북도를 경계로 하는 서운산 기슭에 자리한 739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로서 전통사찰 제57호로 지정. 고려 원종 6년인 1265년에 명본국사가 창건한 후 절 이름을 대장암이라고 하였다.
그 후 공민왕 13년인 1364년에 나옹선사가 극락전을 비롯하여 법당, 지장전, 만세루, 향응각 등의 당우를 세우고 은적암, 은신암, 청련암, 내원암 등의 부속암자를 짓는 등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이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서기가 가득한 구름 사이로 청룡이 올랐다는데서 산 이름을 서운산으로, 절 이름을 청룡(靑龍)사로 개칭하였다. 청룡사는 특이하게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다.
대신 입구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이것이 청룡사 사적비이다. 조선 숙종(1720년)때 청룡사 중수를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 비석에는 청룡사의 창건 및 내력이 새겨져 있다.
기솔리 쌍미륵과 궁예미륵
안성군 삼죽면 기솔리 국사봉에 있는 미륵으로 세련된 모습들은 아니지만 민중의 염원을 잘 담아내고 있는 미륵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