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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7일 주일 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 오전예배>
창세기 강해(24)
끊임없이 이어지는 약속; 여자의 후손을 보존하시는 하나님
(창 4:1-8, 25~5:32)
서론
‘역사’나 ‘운동경기’를 보면 양 편이 팽팽한 긴장 가운데서 한 쪽 편이 이겼다가 다른 한 쪽 편이 이겼다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어느 한 쪽 편이 이깁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보면 종종 그러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혹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끌려가시는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 대제사장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아무 말 하지 못하시는 모습. 로마 병정에 의해 채찍질 당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에 결국 운명하시는 모습은 예수님이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패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주인공인가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듭니다. 하지만, 불과 3일 만에, 정확하게 하면 24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역전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 오히려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십니다(골 2:15).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립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팽팽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마치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결코 승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결국 승리하십니다. 과연 그러한 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Ⅰ.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번에 살펴본 적이 있는 창세기 3:15 말씀과 창세기 4:1-8을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 봅시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
에덴의 동산에서 하나님께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 대해 하나님께서 저주와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3:15-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내용이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구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크게 3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①뱀과 여자가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②뱀과 여자 당대에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라고 했으니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도 원수가 됩니다. 그렇게 원수가 된 결과 ③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사탄을 향한 저주이면서 또한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그리고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는(창 3:24)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요 은혜입니다.
이 복의 약속에 있어서 핵심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후에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입니다. “머리를 상하게 한다”라는 말은 ‘결정적인 승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에 나오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뱀과 여자 사이의 적개심을 말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사탄과 여자의 후손의 적개심입니다. ‘적개심’(敵愾心)이란 적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와 증오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탄과 여자의 후손 사이는 적(敵)의 관계가 될 것이며 둘 사이에는 분노와 증오가 있을 것이라는 계시(啓示)입니다.
하나님의 이 계시에 따라 사탄은 끊임없이 여자를 미워하고 여자는 사탄을 미워할 것입니다. 사탄은 여자와 싸우고 여자는 사탄과 싸울 것입니다. 사탄은 어떻게든 여자의 후손을 공격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도 끊임없이 사탄을 공격할 것입니다.[1]
이렇게 저주와 복을 함께 받은 아담과 하와, 그들이 이제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이 그들이 붙잡을 만한 유일한 소망입니다.
가인인 줄 알았으나
그렇게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낳았습니다. 창세기 4:1에 나오는 것처럼 가인입니다. 가인을 낳은 그들은 드디어 창세기 3:15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자부했습니다. 자신들이 낳은 첫 아이를 통해 여자의 후손이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가인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여자의 후손이라 믿었고, 그래서 그를 통해 사탄과 그의 후손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에게 생명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2]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얻음’이라는 뜻의 ‘가인’이라고 짓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자를 얻었다”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창세기 3:15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왜 아닙니까? 가인은 살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한 자가 여자의 후손일 리가 없습니다.
물론 살인했다고 해서 무조건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인이 여자의 후손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에서 분명히 증거합니다. 유다서 1:11을 보시면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가인의 길을 나쁜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여자의 후손일 수 없습니다. 요한 1서 3:12 에도 보면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한 자임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8:44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라고 말씀하는데,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라는 표현은 가인을 가리켜서 하는 말로서, 바로 뱀이 가인을 통해서 한 일을 말하는 것이니 가인이 뱀의 후손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죽임
가인이 뱀의 후손이라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닙니다.[3] 단순히 윤리적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바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죽인 사건입니다. 창세기 3:15에서 예언된 뱀과 여자의 후손 간의 적개심의 성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서 신약성경에서 가인이 뱀의 후손임을 증명한다고 했는데, 신약성경은 아벨을 의인 혹은 선지자임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 마태복음 23:35을 보시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벨을 의인으로, 그의 피를 의로운 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11:50-51을 보시면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라고 해서 마태복음이 ‘의인’이라고 표현한 아벨을 ‘선지자’의 반열에 올립니다. 히브리서 12:24을 보시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라고 말씀함으로써, 아벨의 피를 예수님의 피에 견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벨은 여자의 후손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사탄에게 속한 자, 아벨은 여호와께 속한 자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창세기 3:15에 약속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의 원수가 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탄에게 속한 가인은 여자의 후손을 오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하기 위해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벨을 살려두면 그를 통해 여자의 후손이 오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인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의식하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만든 마귀(요 8:44)는 그러한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인의 살인 사건은 윤리적인 사건이 아니라 뱀의 적개심이 여자의 후손을 향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아벨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이 와야 되는데, 뱀은 가인을 통해 여자의 후손을 죽입니다. 가인은 비록 육체적으로 여자의 후손이지만 사실상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자의 후손을 죽이는 일에 관여한 악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뱀의 적개심이 드러난 첫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인을 통해 자신만만한 기대를 가진 아담 부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자의 후손을 주신다고 했는데, 벌써 주셨구나, 아~! ‘내가 낳은 이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구나”라는 일종의 확신을 갖고 외쳤던 그들의 확신은 산산조각 나고야 말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보내시는 하나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벨을 통해서 오게 될 여자의 후손의 계보가 끊겨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실 것인데, 이제 아벨이 죽어서 그 계보가 끊겨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 아니라 뱀이 오히려 여자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입니까? 이제 뱀이 완전히 승리를 해 버렸습니까?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이 뱀에게 내리신 저주는 거짓말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마귀에게 졌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창세기 3:15의 약속은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창세기 4:25을 봅시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부부에게 다른 아들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셋’(Seth)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대신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주셨습니다. 바로 여자의 후손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씨를 주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창세기 4:1에서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자를 얻었다”라고 했는데, 창세기 4:25에서는 ‘남자’라는 말 대신에 ‘씨’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5] 여기에서의 ‘씨’(seed)라는 말은 창세기 3:15에서 사용된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씨’, ‘후손’ 모두 같은 히브리어 ‘제라’(zera)입니다. 한국말에서도 ‘씨’라는 말이 ‘후손’이라는 말로 사용되기에 4:25의 번역은 히브리어로나 한국어로나 바른 번역입니다. 그래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은 “아벨 대신에 다른 후손을 주셨다”라는 말이니, 아벨이 바로 여자의 후손이요, 죽은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이 여자의 후손입니다.
게다가 창세기 4:1에서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자를 얻었다”라고 해서 방점이 ‘내가’에 있었는데, 창세기 4:25에서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라고 해서 ‘하나님이’에 초점이 있습니다.[6]
아벨이 죽고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버렸을 때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자녀의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에 일어나는 형제의 난(亂)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아담 부부에게 있었던 ‘여자의 후손’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셋을 통해 위로해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내가 또 다른 여자의 후손을 너희들에게 주었다”라고.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셋’을 주셨다고 해서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셋에서 다시 계보가 끊어져 버리면 또 다시 실망할 수 밖에 아니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셋에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셋 이후에도 여자의 후손이 이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4:26은 그 계보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뿐만 아닙니다. 다음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게 될 창세기 5장을 보십시오. 1절에 보면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라는 말로 시작하는데,[7] 3절에 ‘아담’이 나온 뒤에 ‘셋’이 나오고, 그 뒤에 6절에서 ‘에노스’가 나옵니다. 9절에 ‘게난’이 나옵니다. 그 이후로 ‘마할랄렐’(12), ‘야렛’(15), ‘에녹’(18), ‘므두셀라’(21), ‘라멕’(25), ‘노아’(29)까지 이어집니다. 계속해서 여자의 후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셋 뿐만 아니라 셋의 후손을 통해서 계속해서 여자의 후손이 이어집니다. 창세기 4:25에서부터 창세기 5장으로까지 이어지는 족보는 창세기 4장의 주인공이었던 가인[8]과 대비하여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대조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9] 여자의 후손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끊어지지 않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고자 기록되었습니다.[10]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의 범죄와 아벨의 죽음으로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기대는 없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아담 부부로 말미암아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의 머리가 상한 것 같지만,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만 상했을 뿐입니다.
Ⅱ. 적용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여자의 후손을 보존하시는 하나님
오늘 설교의 제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여자의 후손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끊긴 줄만 알았던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 그러나 그것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은 계속해서 성취되어 가고 있었고 계속해서 이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보존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입니다. 제 아무리 사탄이라 하더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잠시 잠깐 막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마귀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승리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을 오지 못하게 하려는 그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계속되는 계보
앞서 우리는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여자의 후손의 계보를 보았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그 계보의 끝이 ‘노아’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최종적인 여자의 후손입니까? 누가복음 3:23 이하를 봅시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2개가 나오는데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왕이신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습니까? 36절의 중간 부분을 보시면 창세기 5장의 제일 마지막(29-32)에 나오는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 위로는 레멕(눅 3:36; 창 5:25의 라멕), 므두셀라(눅 3:37; 창 5:21), 에녹(눅 3:37; 창 5:18), 야렛(눅 3:37; 창 5:15), 마할랄렐(눅 3:37; 창 5:12), 가이난(눅 3:37; 창 5:9의 게난), 에노스(눅 3:38; 창 5:6), 셋(눅 3:38; 창 5:3), 아담(눅 3:38; 창 5:3)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족보의 인물들입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에 주신 다른 씨였던 셋을 통해 에노스가 오고 노아를 거쳐서 마침내 예수님이 오셨으니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족보는 바로 여자의 후손의 계보요, 그 끝은 노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를 통해 ‘안위(위로)’를 얻었다면,[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위로’를 얻습니다(HC 1).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주신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을 죽이려고 했던 뱀의 계속되는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성취하셨으니 셋보다 수 천년 혹은 수 만년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시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이처럼 끊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그래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반드시 성취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의심을 합니다. 순간 순간 의심하며, 때로는 장기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게 붙들지 못하고 쉽게 절망합니다. 낙심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록 우리의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귀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십시오(찬송가 545장의 가사). 우리가 아무리 의심을 해도 그 의심이 하나님의 약속을 막을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볼 때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크기는 비록 작아도 하나님의 약속의 크기가 크니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약속이 더디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져도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우리는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4:25에는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주셨다는 말만 나와 있는데, 과연 하나님은 언제 셋을 주셨을까요? 아벨이 죽은 직후에 주셨을까요? 창세기 5:3을 보시면 아담이 130세가 되는 때에 셋을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태어나자 마자 1살이었는지 아니면 아담이 태어나자 마자 하와와 결혼을 했으니 20살 즈음으로 해서 계산을 했는지 알 수 없고, 아담이 가인을 낳은 나이가 언제인지도 모르며,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이 그들이 몇 살 때 즈음 일어난 일인지도 알 수 없으나, 아담이 130세가 된 때에 셋을 주셨다는 말씀은 아마도 아벨이 죽고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아담과 하와 부부로 하여금 아벨이 죽은 이후 소망을 잃고 절망하며 수년 혹은 수십 년을 보내게 하신 뒤에 비로소 절망 뒤에 희망을, 어둠 뒤에 빛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15의 약속은 그 약속이 주어진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인 AD 33년 경에 골고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이 당장 우리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도, 장차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는 약속도 비록 그 약속이 더디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윤리적 의미에서의 살인 사건이 아니라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향해 보인 적개심(敵愾心)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에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시도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통로를 차단하고자 하는 사건이었습니다.[12] 사탄은 가인을 사용하여서 여자의 후손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자기의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끊어져 버린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곧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언약이시오 약속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파기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성취하십니다.
이 사실을 여자의 후손을 보존하시는 일을 통해서 이미 오래 전에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갑시다.
[1] 고재수, “적개심”(창 3:15),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재판; 서울: CLC, 1987, 1991), 9.
[2]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0), 221.
[3] 이광호, 『창세기』(서울: 깔뱅, 2007), 63.
[4] 아벨에 대한 신약성경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도 참고하라.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244-246.
[5]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242. 창세기 4:1에서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라고 했는데, 창세기 4:25에서는 “....하나님이 내게....”라고 되어 있다.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차이에 대한 여러 해석과 관련해서는 Kenneth Mathews, Genesis 1-11:26 (Nashville: Broadman & Holman, 1996), 290, 293;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BC 1 (Waco: Word, 1987), 박영호 역, 『창세기 1-15』(서울: 솔로몬, 2006), 255을 참고하라. 필자는 이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6]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242.
[7] ‘아담’을 단순히 ‘인류’로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창세기 5장의 아담의 계보는 인류 전체의 계통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가인의 계보와 대조되는 아담과 셋의 후손의 삶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5:1의 아담은 보편적인 인류가 아닌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담을 말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서울: 생명의 양식, 2009), 191, n.2.
[8] “창세기 4장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 아벨의 이야기가 아닌 가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벨은 항상 가인의 아우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며 아벨은 하나님이든 그 누구든 아무와도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Mathews, Genesis 1-11:26, 272.
[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197; Mathews, Genesis 1-11:26, 291.
[10] 성경에 나오는 족보에 관한 논의로 다음을 참조하라. 송영찬, 『다윗왕국과 언약: 역대기의 메시지』(서울: 깔뱅, 2006), 26-27, 35-36, 62-86; 송영찬, 『예수 그리스도』(서울: 칼빈아카데미, 2005), 24-26; 최종진, 『‘씨’신학적 구약성서의 족보적 연구』(부천: 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2010).
[11]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 안위’라는 뜻이다.
노아의 이름과 그 이름의 어원은 6-10장을 지배할 언어적 모티브들과 신학적 주제들 중 일부를 도입한다. Wenham, 『창세기 1-15』, 274.
[12] 이광호, 『창세기』, 63.
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에 있는 개혁교회로서 강동구의 길동, 둔촌동, 천호동, 성내동, 명일동, 고덕동, 상일동 뿐만 아니라 송파구, 광진구, 하남시 지역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리시, 남양주시, 위례신도시 등지에서도 멀지 않습니다.) 성경적이고 건전한 교회를 지향합니다.
지하철 5호선 굽은다리역 4번 출구와 가까워서 군자역, 광나루역 등지에서 오시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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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경 전체의 구속사를 이해하는데에 중요한 설교문이라서 올립니다. 한길교회 교우들은 이미 들은 바 있는 설교문이지만, 이 설교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계속 지속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