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3)
[에피소드4]
농도원에 살 때 조그마한 못이 있었는데 그 못가에 텐트를 치고 사는 모자가 있었다. 그 어머니는 약간 정신지체가 있는 듯 했고, 그 어린 아들의 이름은 바위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농도원 부지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농도원장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 가끔 와서 마당 청소도 해주 곤 했다. 어머니는 그들이 측은해서 쌀과 채소와 과일 등을 주기도 했다. 또한 그들이 먹고 살 수 있게끔 약간의 밭을 경작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수년간의 농도원장 직을 끝내고 경북 도청의 국장으로 발령이 났다. 우리가 이사 갈 때 바위엄마는 많이 울면서 슬퍼했다. 이사 짐 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울면서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도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마주 손을 흔들며 울었다. 아마도 바위엄마가 울었던 것은 그들이 받았던 그동안의 따뜻한 정도 정이지만, 향후 그들이 헤쳐 나가야할 모진 운명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피소드5]
64년 5. 16 군사정부가 민간정부로 이양할 때 첫 민간 대구시장으로 아버지가 임명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인재등용은 대체적으로 공정했다고 평가된다. 왜냐하면 선친은 중앙권력층에 아무런 줄이 없는 사람이었다. 있다면, 하나님께서 유일한 백그라운드가 되신다는 것과 행정능력과 청렴도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평가였다. 임명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하루 전 날 저녁에 국회의장이었던 한솔 이효상 선생이 인편을 통해서 내정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날 아버지는 가족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에 감사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 했다면 아버지는 폐병을 앓다가 죽었거나,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복직은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된다. 한때 대구에서 가장 극빈자중 한사람이었고 치명(致命)적인 결핵(結核)환자였던 아버지가 대구시 행정의 수장이 된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자를 하나님이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에피소드6]
아버지는 평소 농학, 농업경제학, 임학, 행정학, 도시행정학. 역사, 철학, 문학. 의학. 대체의학, 기독교신학, 동양고전, 뇌 과학, 우주물리학, 환경 등 관심 있는 분야에 깊은 연구와 사색을 하였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책을 많이 읽었다. 없는 형편에도 돈만 있으면 책을 구입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불평도 많이 들어야 했다. 평생에 걸쳐 독서한 책은 2만권이 넘는다고 들었다. 아버지의 독서는 수불석권(手不釋卷)과 박람강기(博覽强記)를 실천한 분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가 농협을 퇴직하고 난후 아버지의 친구 분으로 독서신문 사장과 현암 출판사 대표로 있었던 조상원 선생이 편집인 협회에서 수여하는 편집인 상을 받았다. 그 분은 당시 조선일보와 수상 기념 인터뷰를 했는데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한번은 내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친구 대답이 ‘지금 시간이 없어 안 되겠다’ 고 한다. 그래 내가 ‘노는 주제에 무슨 시간이 없느냐고?’ 했더니 ‘지금 불란서 혁명사를 읽고 있는 데 다 읽기까지는 안 되겠는 데.....!’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독서에 대한 진정한 열정과 사랑에 그 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그 때 친구의 제의를 사양한 것은 친구에게 쓸 데 없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고아(高雅)한 처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서책을 지극히 가까이 하는(書耽) 선비로서 서기묵향(書氣墨香)이 은은하게 뿜어 나오는 아버지의 평상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경북대학교 총장은 아버지의 실력이 아까워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권유하였다. 아마 그 때 학위를 받았다면 세속사회에서 다소 이득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식과 겉모양, 학벌 보다 실력, 능력 같은 실용주의적 가치관을 가졌던 아버지는 정중히 사양하였다. 아버지는 대구시장이 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유솜(미국의 개발도상국 원조기구)으로부터 도시계획차관을 들여와 대구시의 상수도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였다(강정상수도시설 건립). 또한 전국 최초로 현대적 도시계획을 입안하여 입체적인 도로망과 쾌적한 도시건설을 촉진하였다. 이 분야의 실력을 인정받아 대구시장이 끝나고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서울시 도시계획고문을 위촉받아 도시계획 자문을 맡기도 하였다. 한국의 도시계획의 일인자라는 평도 이 때 듣게 되었다.
도시계획의 여러 가지 개념 중 아버지는 특히 도시의 환경과 숨 쉬는 공간을 중요시 했다. 경북도청이 이전하게 되었는데, 구 도청 자리에 아버지는 휴식과 도시의 숨 쉬는 공간으로서 시민공원을 만들기를 계획했다. 도시에 있어서의 공원의 의미는 환경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켜 주는 중요한 의미도 지닌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이 갈등과 스트레스로 폭발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는 도시 중심부에 백만 평 규모의 센트럴 파크가 있기 때문이라고 도시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아버지는 벌써 이 부분에 대한 혜안이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다수의 녹지 시민공원을 조성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북지사와 지역 언론사사장 모씨가 힘을 합하여 그 자리에 호텔을 짓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력한 소신으로 공원건립의 뜻이 결국 관철되었지만, 이에 대한 미움으로 대통령이 내려올 때마다 지사는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했었다. 그래서 시장재임 2년 6개월을 끝으로 그만두게 되고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도지사는 그 후 다른 부정한 사건에 연루되어 해직되었고, 법적 처벌을 받아 수감생활을 하였다. 아버지의 철학과 희생이 담긴 그 공원은 지금 경상감영공원으로 도심 속의 소중한 휴식처가 되어 대구시민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