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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세상을 열고자 했던 조선중엽의 선각자 정여립
신정일(문화사학자,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의 저자
<사진> '19. 1월30일 서울 성동구 교보빌딩에서 '정여립공과 대동사상에 대한 강좌'중
1589년 10월 2일(선조 2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 이었다. 정여립鄭汝立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모반을 꾀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긍익이 지은《연려실기술》제14권 선조조 고사본말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기축년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의 비밀장계가 들어왔다. 이날 밤에 삼정승․육승지․의금부 당상관들을 급히 들어오게 하고 다시 숙직에 들어와 총관․옥당 상하번들도 모두 입시시켰다. 다만 춘추관 검열로 사관에 입적하고 있었던 정여립의 누이의 아들인 이진길만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비밀장계를 내려서 보이니, 그것은 안악 군수 이축․재령 군수 박충간․신천 군수 한응인 등이 역적 사건을 고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수찬을 지낸 전주에 사는 정여립이 모반하여 괴수가 되었는데, 그 일당인 안악 사는 조구가 밀고했다고 되어 있었다. 즉시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나누어 보내고 이진길李震吉을 의금부에 내려 가두게 하였다. 진길은 곧 여립의 생질이었다.”
선조는 그날 밤으로 3정승과 육승지를 부르고, 도총관 2원 홍문관의 상하번과 좌우사관을 함께 입시케 하였다. 깊은 밤중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불려온 세 정승과 여러 신하들은 선조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가 먼저 정승들에게 “정여립은 어떠한 사람인가” 물었다. 영의정 유전柳琠과 좌의정 이산해李山海는 “그의 인품을 모른다”고 대답하였고,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그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은 모릅니다” 하였다. 선조는 고변장을 들어 상 아래로 내던지며 “독서하는 사람의 소위가 곧 이와 같단 말인가” 하고 승지를 시켜 읽도록 하였다. 한 줄 두 줄 읽어내려감에 따라 정여립의 음모가 계속 드러났다. 그 역모의 시나리오는 《선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축년 겨울 서남에서 일시에 거병하여 얼어붙은 강진江津을 건너 서울로 직범하여 무기고를 불사르고 강창을 탈략하며, 심복을 도내에 배치하고 자객을 분송하여 먼저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죽이고 거짓 교지를 꾸며서 방백과 병사, 수사를 죽이며 대간을 가만히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일어난다”
조선 전기에 일어난 4대사화보다 더 많은 1 천여 명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 죽임을 당한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전주 남문 밖(지금의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서 태어났다.
『경사經史』와『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고, 촉망받는 선비로써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던 정여립은 스물 넷에 문과에 급제한다. 문과 급제 후 정여립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드나들며 학문을 익혀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그 당시 율곡의 문하에는 전국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는데, 이이는 그를 큰 인물이 될 것으로 보고 요직에 천거했고, 성혼이나 조정의 박순 역시 그를 아낌없이 돌보아 주었다. 그는 대과급제 13년후에 예조좌랑에 올랐고, 이듬해엔 율곡의 천거로 홍문관 수찬에 오른다. 홍문관은 경연을 주관하는 핵심 정권기관이며, 수찬 비록 정 6품의 벼슬이었지만 하루에도 한 두 번씩 왕과 마주앉아 국정을 논하는 자리였다.
정여립은 홍문관에 있으면서 왕에게 건의할 때 고개를 들고 눈을 똑바로 뜬 채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여립은 율곡이 별세하자 곧 정치적 입장을 돌변하여 동인의 실력자인 이발과 친밀해 진다. 선조 18년의 경연에서 박순, 이이,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을 공개적으로 비방한다. 율곡의 생전에「공자는 익은 감이고, 율곡은 덜 익은 감이다」라고 하며 즉, 율곡이 공자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얘기했던 정여립이 율곡을 비난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선조가 물었다. “이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네가 지극히 따르다가 지금에는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이에 정여립은 “신이 애초에는 그의 심술을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고서 죽기 전에 이미 절교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여립은 이렇게 전날의 스승과 동료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선조수정실록』에는 이 때 정여립의 처신을 “서인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동인들이 세력을 잡자, 이제까지 속해 있던 서인 계열에서 벗어나 재빨리 동인들에게 접근하여 권력을 잡고자 했던 하나의 변신 술책이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가 강조되던 유교 사회에서 스승을 배신하는 배사背師는 인륜을 어긴 강상죄로 간주되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동계를 조직하고
분노한 정여립은 선조 임금 아래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낙향하고 만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호를 죽도라 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정여립을 일컬어 죽도선생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선조수정실록」에 사관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백성들은 항심을 잃어버리고, 군사는 장부에만 기재되어 있으며, 안으로는 저축이 바닥났고, 밖으로는 변란이 잇달고 있으며, 사론은 분열되고 기강은 무너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여립은 그러한 세상에 대처하기 위하여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별이나 반상귀천 남녀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조직하였다. 조정에 있을 당시부터 선조를 바보나 부덕한 임금으로 생각했던 정여립은 조정의 여러 정책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사마공司馬公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위魏나라를 정통正統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이를 부인하고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았는데, 후생後生으로서는 대현大賢의 소견을 알 수 없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요堯․순舜․우禹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은 성인聖人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한다고 한 것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聖賢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그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천자天子가 될 수 있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권하였는데, 그는 성인 다음 가는 사람이 아닌가?”
위의 글은 기축옥사로 희생된 정여립이 남긴 유일한 어록으로 그 무렵 그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의 생각과 사상은 대체로 이렇게 풀이되고 있다. 첫째, 정여립은 왕위의 세습을 부인했다. 중국의 성인인 요, 순, 우가 그들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당대의 현자에게 왕위를 계승케 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둘째, 정여립은 충군사상을 부인했다. 그는 임금과 신하가 절대적 충성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직적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 번 째, 그는 국가가 천하의 공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주인이 반드시 군주가 아님을 주창했다.
호남 제일의 인물
그들은 전부터 정여립이 비범한 인물인 줄 알았었고 또 어수선한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랐기 때문에 인근의 고을수령들까지도 정여립의 청탁이 가기만 하면 곡식과 돈, 그 밖의 각종 물자를 바리바리 실어서 보내주었다. 조경남趙慶男(1570-1641)은 정여립을 평하기를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엎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 나와 집에 있으면서 자중하는 체 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사림에서는 달려가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하였다.
정개청은 18살이나 나이가 작은 정여립에게 보낸 글 가운데 “도道를 높고 밝게 봄이 당세의 오직 존형尊兄뿐이라”하였다. 이발 역시 정여립을 당시 “제일 인물”이라 하였고, 이이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고 하였다. 그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인하여 대동계원들 뿐만이 아니라 호남의 지식인들이 정여립의 집에 모여들었다. 또한 그들은 정여립의 집에서 책도 읽고 무술도 연마할 수 있었다. 정여립은 정해년에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자 남언경이 정여립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정여립은 주저 없이 대동계를 동원하였는데 그때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 왜변에 열읍列邑이 군사를 징발하였는데 전주 부윤 남언경이 똑똑치 못하여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립을 청하여 군대를 나누게 하였더니, 여립이 사양하지 않고 담당하여 한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병이 모였는데, 부서를 나누어 징발하는 데 하루가 안 되어 마무리지었다. 여립은 대동계에 들어 있는 친밀한 부사를 장령으로 썼다. 적이 물러가고 군사를 해산하자 여립이 장령에게 말하기를, “훗날 변고가 있으면 너희들은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시에 와서 기다리라”하고 군부 한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 이것도 훗날에 화근의 한 원인이었다.
정여립은 그때 차별 받고 있던 세력을 모아 변혁을 도모하여 불만에 찬 신분지역의 사람들을 행동대원으로 끌어들이고 혁명을 진척시키던 중 그 중의 한 사람이 겁을 먹고, 고변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기축옥사는 서인 측의 모사였고, 율곡, 송강 등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문장가였던 송익필의 동생인 송한필의 작전에 의해 진행된 결과라는 말들이 파다하다.
정여립의 자결 소식을 전해들은 서인들은 공공연히 떠들기를 “누구는 누구의 일족이요. 아무는 아무의 친구라 하여 역적과 친분이 두터운 자만이 반드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정여립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할지라도 동인의 명목이 붙은 자에게는 조사나 유생을 막론하고 다 의구심을 품어서 비참한 기상이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었다.”고『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기록되어 있다.『괘일록』에는 “서인들은 정여립의 역변이 일어난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들은 그 자리에서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에 꺼리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처만 입고 서울로 끌려온 정옥남, 박춘룡과 박연령, 이기등은 역모를 승복한 후 처형되고 정여립의 시체를 끌고 와서 금부 앞에서 능지처참형을 집행했다. 조정은 연일 이일로 인하여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런 도중에 고향에 있던 서인 정철鄭澈이 조정에 입궐, 임금을 만나 속히 역적들을 잡아들이고 한양에 계엄령을 내리라는 글을 올린다. 실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정여립의 역심은 분명했을지라도 기축옥사는 정철과 송익필에 의한 것이요 확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정여립 모반사건의 연루자들이 연이어 잡혀왔다. 11월 12일 드디어 정언신, 이발李撥, 백유양白惟讓 등에 대한 왕의 친국이 시작되었다. 정여립의 도주와 자결은 그의 역모를 사실로써 정착시켰고, 서울을 중심으로 황해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선비들 중에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거나 인척이라도 되면 여지없이 잡혀와 처벌을 받았다. 그 당시 동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발은 정여립과 같은 전주 사람으로 구촌간이었고, 우의정이었던 정언신, 백유양 등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축옥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산대사 휴정은 묘향산에 있던 중 붙잡혀 와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은 후 풀려났고, 사명당 유정 역시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으니, 정여립 사건의 여파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짐작할만하다.
선조는 ‘좋은 의견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모반의 연루자들을 일러바치면 포상을 내리겠다고 분부를 내렸다. 무고한 사람들이 말 없는 말로 무수히 잡혀 들어갔다. 이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거나 벼슬이 떨어진 선비들의 수가 일 천여 명이 되었다. 선조는 “전주는 바로 조상 임금의 본향이니 그곳에 있는 정여립 조상의 묘를 파서 묻게 하라. 그리고 전주에 사는 멀고 가까운 그의 친척들을 모두 쫓아내어 다른 고을에 가서 살게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그리고 제왕의 서기가 있다고 전해오던 정여립 조상의 묘를 파헤친 다음 뼈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렸고, 그의 집터를 파헤친 후 숯불로 지짐으로써 그 맥을 끊어버렸다.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들의 불행이 정철과 송익필을 포함한 서인 측 사람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선조 23년 6월에 전라도 순찰사 홍여순洪汝諄은 역적의 무리를 많이 체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의대부를 받았고 8월 초하루에는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사람들에게 광국공신과 평난공신의 칭호를 내렸으며, 그때 상품을 등급별로 하사하고 나라에 대사령을 내렸다. 조선 건국 후 열 두 번 째의 공신 배출이었다.
임진왜란의 전과정을 <징비록>이라는 책에 담았던 서애 유성룡은 <운암잡록>에서 기축옥사의 전 과정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처음에 임금이 그를 체포하러 가는 도사都事에게 밀교密敎를 내려, 여립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 편지들을 압수하여 대궐 내에 들이게 하였다. 그래서 무릇 여립과 평소에 친근하게 지내어 편지를 주고받은 자는 다 연루連累를 면치 못하게 되어 사류士類가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중략) 옥사獄事는 덩굴처럼 얽히고 뻗어나서 3년을 지내도 끝장이 나지 않아 죽은 자가 몇 천 명이었다. “
정여립은 암울했던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대동사상을 기치로 내걸었었다. 정여립이 주장했던 대동세상은 무엇인가. 대동에서의 동同은 한 장막 안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예기禮記』에 실린 대동세계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도가 행해지니 천하가 만민의 것이 되고 어질고 유능한 자가 선출됨으로써 모두가 신의를 중히 여기고 화목한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 부모만을 사랑하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같이 사랑하였다. 그럼으로써 늙은이는 수명을 다하고 젊은이는 재능을 다하고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병자들도 모두 편히 부양 받게 되었다. 또한 남자는 모두 직분이 있고 여자들은 모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재물을 땅에 버리는 낭비를 싫어하지만 결코 자기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으며,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 않는다. 이처럼 풍습이 순화되어 간특한 모의가 통하지 않으니 변란이 일어나지 않고, 도둑질과 약탈이 없으니 대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이것을 일러 ‘대동’이라 말한다.”
16세기 말 조선에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천하위공’의 대동사상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전주의 정여립이었다. 그는 평소에 “인간의 본성은 요․순과 걸․척이 다르지 않으며, 시정잡배도 학습을 하면 우 임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유교의 이단자인 순서를 자주 들먹였다. 심지어 “하늘의 뜻인 인심이 이미 주를 버렸는데 존주尊周는 무엇인가?”라고 공언하였다.
정여립의 대동계 이후, 중국에서 대동사회에 대한 이상을 새롭게 등장시킨 사람은 청나라 말의 홍수전洪水全이었다. 역사 속에서 ‘태평천국의 난’이라고 기록된 그 혁명을 발발케 한 홍수전(1814-1864)은 기독교 평등사상과 대동사상을 결합하여 천하가 한 가족처럼 다같이 형통하고 태평한 태평천국의 세상을 외치며 이것이 바로 천하 위공의 대동사상이라고 선전했다. 특히 그는 ‘경제 평균 주의’가 바로 대동사회의 ‘대도’라고 말하며 대동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설정하였다. 그 뒤를 이어 중국에서 대동이라는 말을 사회․사상적 개념으로 다시 거론한 사람은 청나라 말 근대화를 위해 개량주의적 혁명 운동을 전개한 강유위(1858-1927)였다. 강유위康有爲는『대동서大同書』를 저술하여 나름대로의 대동사상을 전개하였는데 그 내용은 유가적 범주를 상당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대동사회가 이룩되지 못한 원인은, 자기 자신과 가족에 집착하는 이기심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가족제도의 폐기를 역설하였다. 최한기는 “사회구성원 각자의 사회적 자각이 대동사회 구현에 필수적인 조건”이며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가 같아지는 것이 대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열자列子에 의하면 대동이란 차별을 하지 않는 상태이고, 장자莊子에 의하면 극히 공평하고 평화로운 상태이자 인심이 잘 화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강유위의 해석처럼, ‘고통이 없는 사회’이며, 동시에 ‘나눔의 사회’이자 ‘더불어 사는 사회’였다.
그의 대동사상을 정여립이 살았던 그 당시 호남지방을 배경으로 하여 설명한다면, 수탈로부터의 해방이며, 백제 유민들로서 후기 신라와 고려왕조를 거치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러한 한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결국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불평등과 한은 존재했었기 때문에 대동은 반제․반봉건의 이상적 상태이며, 바로 이 한과 비애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래서 “하늘은 사사로이 만물을 싣지 않고, 해와 달은 사사로이 만물을 비추지 않는다”는 대동사상은 인류 역사상 어떤 사상에도 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 동안 반체제의 위험한 사상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선구적 사상인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의 변혁사상인 호민론豪民論(세력 있는 백성)으로 이어졌고 다시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으로 이어졌다.
결국 기축옥사는 현실 모순을 해결할 수 없는 주자학적 통치이념에 대한 반발과 백성들을 도외시한 위정자들의 권력투쟁, 그리고 지배계급에 의해 수탈 당한 일반백성들의 불만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의해 발발한 사건이었다. 또한 당쟁을 이용한 사화였으며, 당쟁의 형세를 돌이킬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 첫 역옥이었고, 혁명적인 사상의 좌절이며 진보세력이 몰락하게 된 독립 변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일어났던 사화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논쟁의 불씨를 계속적으로 이어 나갔고, 그 연장선상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며 그러한 현상들이 수많은 민란으로 이어져 마침내 근현대사의 출발점인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다.
만족사학자 신채호는《단재전집》 “정죽도(여립)선생은 민중군경(民重君經)을 주장하다가 사형을 입으니……”라거나 “400여년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이라 하며 정여립을 높이 평가하면서 3백 년 뒤에나 4백년 뒤에 그 이름이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정여립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일으킨 올리버 크롬웰(1649)보다 60년 앞선(1589)세계 최초로 공화주의를 선포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전주의 길 이름에 ‘정여립로’와 ‘정언신 로’가 들어섰고, 정여립의 동상을 세우고 그가 주창한 대동사상을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신정일 약력.
문화사학자文化史學者인 신정일(辛正一)은 현재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모임> 대표로 일하고 있다. 1985년 중반부터 <황토현문화연구소>라는 문화단체를 발족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평가받고 있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묻혀 있는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쳐왔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면서 1997년에는 <수학여행을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찾아가는 현장체험학습>으로 바꿀 것을 <전라북도교육청>에 제안하여 실행한 결과 <교육부>의 사업으로 확정되었으며, 또한 전통세시풍속을 오늘에 되살리고 재창조하고자 노력했다.
2002년부터 <우리 땅 걷기>로 확대 개편하여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였고, 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를 기획, 금강,,섬진강,,한강,,낙동강, 영산강과 만경강, 동진강, 한탄강까지 8대강의 도보답사를 끝냈고, 한국의 산 400여개를 올랐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와 해남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을 걸었고, ‘동해 트레일’(해운대에서 두만강까지의 길)을 통일전망대까지 걸었다.
우리나라 옛길을 문화재나 명승지로 지정할 것을 문화재청에 제안하여 '구룡령' '문경새재' ''하늘재' '죽령' '관갑천잔도'등 5곳이 명승지로 지정되었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문화생태탐방로'선정을 통해 '관동대로' '삼남대로' '영남대로' 의 옛길 일부분이 '장거리 역사 도보답사'코스로 선정되어 전 구간을 이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2009년 가을 문화체육관광부에 <백두대간 산촌 마실길 도보답사>코스를 제안하여 일부구간이 선정되었고, 문화부<한국의 5대강 도보답사>코스 선정에 참여했다.
2009년에 문화부에 제안한 동해트레일이 2010년 9월, 문화부에 의해 '국내 최장거리 동해안 탐방로 <해파랑길(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로 발표되었다. '변산 마실길' '소백산 자락길' '동해트레일과 우리나라 옛길과 강길, 바닷가 길을 찾고 복원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2010년 9월 관광의 날을 맞아 "다양한 우리 땅 걷기 코스발굴을 통해 도보여행의 대중화와 국내관광 활성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정부포상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4년 국회의원 121명과 함께 섬진강 길을 걸으며 강연을 하였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보건대학원. 이화여자대학교와 한국종합예술학교, 삼성그룹과 엘지그룹의 남강포럼,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한 여러 학교와 단체에 강연을 한 바 있다.
서울에서 의주를 지나 북경에 이르는 의주로와 경흥로, 금강산 가는 길 등 북한의 옛길과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 . 청천강 예성강 등 북한의 강을 답사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현재, 서울 SBS 생방송 투데이(매주 금요일. 5시 30분에서 6시 30분 사이) <신정일의 길>에 고정 출연하였으며 2012년 5월부터 경향신문 오피니언에 매주 금요일<신정일의 길>을 연재하였다.
주요저서로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1995, 사람과 산)』『모악산(2000 도민일보)』(공저) 『지워진 이름 정여립(2000 가람기획)』 『나를 찾아가는 하루산행 1,2(1-2000 푸른숲 2-2001 사람과 산)』『금강 401km(2001 가람기획)』『섬진강 따라 걷기(2001 가람기획)』『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2002 이학사)』『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2002 생각의 나무 10월 )』『신정일의 낙동강 역사문화탐사』(2003 생각의 나무.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발행하는 출판저널에 2003년 5월 이달의 저자, 이달의 책으로 선정)』『다시 쓰는 택리지(2004 휴머니스트2004년 4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이달의 책과 청소년을 위한 권장도서)1, 2, 3, 4(복거총론-어디에서 살 것인가?)』
『울고 싶지? 그래 울고 싶다(2005 김영사) EBS '책 내게로 오다' 방영』등이 있고 강 따라 역사 따라(2004 두산동아))』『산 따라 역사 따라 (2005 두산동아)』『섬 따라 역사 따라 (2005 두산동아)』『 다시 쓰는 택리지, 우리에게 산하는 무엇인가 (2006 휴머니스트)'KBS TV 책을 말하다' 방영』『한국사의 천재들 이덕일 김병기 공저 (2006 생각의 나무』『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1.2.3 (2006년 민음사 출판그룹 황금나침반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 김병기 공저.(역사의 아침)』『자꾸만 그곳에 가고 싶다(2007 다산책방) 2007년 상반기 간행물 위원회 청소년 권장도서 선정』
『 풍류, 옛 사람과 나누는 술 한잔. 2007. 한얼 미디어. 2007년 문화관광부 교양도서 선정』 한잔『한강 따라 짚어 가는 우리 역사(2007.민음사 출판그룹 판미동)』『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 2007. 다산초당』『 금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 2007. 민음사 출판그룹 판미동』『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 2007. 민음사 출판그룹 판미동』『 영남대로. 2007. 휴머니스트2007년 상반기 간행물 위원회 청소년 권장도서 선정.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교양도서 선정』『삼남대로. 2008. 휴머니스트』『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 랜덤하우스 코리아』』
『똑바로 살아라. 2008. 다산초당』』『관동대로 . 2008. 휴머니스트』』』『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2009. 랜덤하우스 코리아』』』『다시 걷는 우리 강 낙동강 . 2009. 창해』』『영산강. 2009. 창해』 『신정일의 암자가는 길. 2010. 자음과 모음』『신정일의 사찰 가는 길. 2010. 자음과 모음』 『가슴설레는 걷기 여행. 2010. 랜덤하우스 코리아』 『신정일의 신 택리지 .살고 싶은 곳 . 2010. 타임북스』『신정일의 신 택리지 전라도. 2010. 타임북스』 『신정일의 신택리지. 경상도 2010. 타임북스』『느리게 걷는 사람 2010. 생각의 나무. 2010 문화부와 독서신문 선정. 문학부문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서울. 경기도. 2010. 타임북스』『신정일의 신 택리지 충청도. 2010. 타임북스』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 2010. 부엔리브로. 문화부 국내 최장거리 도보답사 코스 '해파랑길'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음』 『신정일의 신 택리지 제주도. 2010. 타임북스』『신정일의 신 택리지 <강원도>. <북한>. <우리 산하.>. 2011. 타임북스에서 9권으로 완간』'『길에서 행복해져라. 2011 상상출판』『우리 역사 속의 천재 20101 생각의 나무』『가치 있게 나이 드는 연습 20101 다음 생각』『소울 로드 2012 청어람 미디어』『새로 쓰는 택리지 10권, 2012 다음 생각』『눈물 편지 2012 판테온하우스』『새로 쓰는 택리지 완역, 2012 다음 생각』『걷고 느끼고 사랑하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홀로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2013 푸른 영토』『허균 상상출판 2015』『걷고 느끼고 사랑하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홀로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2013 푸른 영토』『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신아출판사 2015』『그토록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 세종서적 2016』『길 위에서 배운 것들, 루이앤 휴잇 2018 』『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서울 2018년 박하』『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경기도 2018년 박하』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전라도 2018년 박하』등 85권의 저서가 있다.
서울 SBS 생방송 투데이를 오랫동안 고정 출연했고, 중앙일보에 <택리지>와 2012년 5월부터 2013년 4월까지 경향신문 오피니언에 매주 금요일<신정일의 길>을 연재하였고, 국민방송 ktv와 우리나라 옛길 삼남대로, 관동대로, 영남대로, 의주로 등 20부작을 촬영했고, 2018년에 전주 kbs의 개국특집 방송으로 이태리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형님들의 현장학습> 3부작을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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