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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PD 시험을 준비하면서 쓴 작문들 중 몇개를 다듬어서 올립니다. 총 여섯 개이고요 제목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제시어: ㅇㅈ
<3월 이야기>
드디어 3월이다. 6년간의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3월. 새내기라니. 아직도 얼떨떨하다. 초등학교 일 학년, 중학교 일 학년, 고등학교 일 학년. 모두 그냥 ‘일 학년’이었다. 대학교 일 학년만이 새내기라 불리는 영광을 누린다. 두근두근한 이 별칭 중에서도 특히 맨 앞에 붙은 ‘새’자가 마음에 꼭 든다. 새로운 삶을 약속해주는 것 같아 든든한 느낌이랄까. 나 한유미 새로워질 일만 남은 새내기다.
선생님의 눈밖에 날까봐 전전긍긍하던 날들은 끝났다. 필기를 하나라도 놓칠까봐 온 정신을 쏟아야했던 수업시간도 이제 없다. 학기말 성적 발표일 외에는 존재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던 학창시절과도 영영 이별이다. 같은 반이 된 애들을 살펴보면서 소속 될 수 있을 법한 무리를 찾으려고 애썼던 3월은 이제 없을 것이다. 새내기의 3월은 특별하고 새로운 일들로만 가득할 테니까.
3월의 절반이 흘렀다. 안 하던 짓을 하면 병이 난다고 했던가. 새내기가 되었다고 해서 특별하고 새로운 삶이 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학과 행사 때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선배들에게 괜찮은 후배로 낙점 받고 싶었지만 녹록치 않았다. 술을 내리 마셔야 하는 것도 힘에 부쳤지만 술게임이야말로 난제였다. 게임 규칙을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나. 눈치 없는 나. 걸려도 더럽게 재미없게 걸리는 나. 모든 내가 야속했다.
이번 주 금요일 아마도 나를 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신입생 환영회를 앞두고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각종 술게임들 중에서도 유난히 취약한 딸기게임과 초성게임을 연마했다. 틈 날 때마다 딸기게임의 리듬을 익혔고 자주 등장하는 초성 키워드는 따로 정리해서 달달 외웠다. 고독한 연습을 거듭하며 다짐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게임도 잘 하고 잘 노는 새내기가 되리라. 못하더라도 재밌게 걸려서 술 먹는 새내기가 되리라.
3월21일. 결전의 날이 도래했다. 2차 호프집으로 옮기고 나서 술자리는 더욱 무르익었다. 자체 평가를 해보자면 1차 술자리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먼저 말을 건네고 이것저것 물어봐주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강력한 한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존재감을 뿜어내고 새내기로서 새로운 삶을 쟁취할 기회! 집중 훈련을 마친 초성게임이 우리 테이블의 술게임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남자 선배 한 명이 “ㅇㅈ”이라고 외쳤고 서 너 명이 차례로 단어들을 뱉어냈다. 순식간에 나와 동기 남자애 두 명만 남았고 머릿속은 깜깜해졌다. 이마 끝에서는 땀이 배어나와 송글송글 맺혔고 찰나의 시간은 짧고도 길게 느껴졌다.
“오줌!!!!!!!!!!!!!!!!!!!!!!!!!!!!!!!!!!”
식당 전체가 울렸고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나였다. 수십 개의 눈알이 오직 나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야 방금 전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3월의 밤기운은 아직 꽤 차가웠다. 사람들은 나의 우렁찬 외침에 잠시 당황하고 나서는 곧장 웃어주었지만 정작 나는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십 여분 정도 더 자리를 지키다가 막차 시간 핑계를 대고 쭈뼛쭈뼛 호프집을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 톡방과 댓글에 시도 때도 없이 날라 다녔던 문자들이 스쳤다.
ㅇㅈ? / ㅇㅈ / 인정? / 인정 / ㅇㅈ / ㅇㅈ / ㅇㅈ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그렇게나 괜찮은 후배로 인정받고 싶었으면서.
#2
제시어: 2017 여름
‘서울대학교 2017년도 하계 학위수여식’
2017년 여름 졸업식을 알리는 빳빳한 플래카드가 정문에 내걸려있다. 언제쯤에야 행사의 주인공으로 참석할 수 있을까. 동기들의 졸업식을 다니기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 여자 동기들이 졸업을 할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남자 동기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안 그래도 초조한 가슴이 한껏 더 오그라들었다. 이번 졸업식부터는 가지 않으리라고 혼자 결심했지만 사진 찍을 사람이 없다는 동기 녀석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여기 학생회관 귀퉁이에 서있다.
졸업식에서는 주인공만 바쁘다. 나머지 참석자들은 자기 순서를 잠자코 기다리다가 환한 미소를 짓고 사진 속을 채워주면 된다. 꼬치꼬치 묻고 싶은 표정을 한 후배들과 마주칠까봐 얼른 사진만 찍고 빠져나왔다. 평소대로라면 고속터미널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지만 오늘은 기숙사부터 낙성대역 너머까지 이어진 차 행렬 때문에 학생회관을 떠난 지 두 시간이 돼서야 고속터미널 매표소에 도착했다. 가시적인 결과물을 들고 내려가고 싶었다. 서울대 다니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손자의 지위에 합당한 무언가를 보여드릴 수 있을 때 내려가서 할아버지께 재롱을 부릴 참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버지에게서 생전 처음으로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요지는 할아버지가 얼마 못 버티실 수도 있으니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얼굴을 비추고 오라는 것. 더 이상 내 사정만 따질 수 없게 되었다.
버스 한 구석에 앉아 있는 지금 차창 밖 풍경은 푸르고 산뜻한데 몸과 마음은 착 가라앉아 무겁기만 하다. 자기소개서 두 개를 동시에 써내느라 잠을 한 숨도 못 잔데다가 아침부터 졸업식맞이 교통체증에 시달리랴 사진 찍기 미션을 수행하랴… 고단할 수밖에. 마음은 더 불편하다. 가슴 한 구석을 제 집 마당처럼 차지하고 있는 취업 걱정에 할아버지가 대뜸 어떤 질문을 던지실까하는 걱정을 얹고 나니 억지웃음도 뜻대로 지어지지를 않는다. 바다, 케리비안베이, 방학, 무더위, 가평, 바나나보트, 수박… 여름의 전통과 멀어진지 오래다. 취업준비생에게 여름은 가장 비장한 시기다. 취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하반기 공개채용을 맞이하기 전에 최대치로 스스로를 갈고 닦는 시간. 미천한 경험들을 가지고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며 자기소개서를 써내려가기도 하고 어느새 기간이 또 만료된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기도 한다.
얕은 멀미까지 더해져 더 이상은 힘들겠다 싶을 때 다행히 부안 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시골이라 그런지 그대로였다. 가물가물하지만 익숙한 길을 따라 십 여분 걸으니 할아버지 댁 파란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한솔이 왔어요.”
“우리 강아지 왔나. 얼굴 좀 자주 보여주지 이제 왔어 그랴.”
“죄송해요 이것저것 괜히 바빠서는.”
인사하기 안부 묻기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놓으신 밥도 다 먹어치웠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 할아버지도 손자의 근황이 어지간히 궁금하신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본 손자의 눈치를 살피며 선뜻 질문은 던지지 못하시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알았다는 듯 살짝 웃어보이자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다듬으셨다.
“요즘 뭐햐. 졸업은 했고?”
“수료했어요 수료. 수료하고 취업 잘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수료? 그럼 박사가?”
할아버지에게 수료는 박사의 일이었다. 졸업유예, 학사 수료, 여름 졸업식… 그 시절에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였던 할아버지셨지만 신생문화를 아실 리 없었다.
“박사 아니고 요즘은 대학생들도 취업이 한 번에 잘 안 되니까 졸업을 미뤄요. 제 친구들도 다 수료생이에요.”
“서울대생들이라 다 박사님들이구먼. 역시 우리나라 최고 공부쟁이들이네 그려.”
할아버지에게 그간 얼마나 사정이 나빠졌는지 설명하고 그로인해 출현한 신생문화들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이쯤 해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마을회관에 손자의 서울대 입학을 공포하는 플래카드를 거신지도 8년이 넘어가려하니 박사가 되었나보다 하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 할아버지 헷갈려서 안 되겠다. 몸 건강히 챙기고 있으세요. 제가 올 겨울 졸업식에 모실게! 입사계약서 같은 것도 짜잔 보여주고.”
“오야 우리 박사님 맛난거나 많이 먹고 가.”
벌써 8월 말 물러가는 여름 더위에 후텁지근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만나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3
제시어: 공항
기훈이는 한국항공사 손자다. 그렇다. 재벌 3세다. 나는 평생 기훈이 옆을 지켜왔다. 다들 콩고물 떨어지기만을 바라며 사는 놈이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언젠가는 나를 부러워하게 될 거라고 큰 소리 뻥뻥 치며 버텼다. 자존심 상하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기훈이 놈은 그런대로 인간적이었다. 잊을만하면 뉴스에 얼굴을 들이미는 여느 재벌3세들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그저 자신의 위치와 조건과 능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사는 놈이랄까.
각설하고. 드디어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오늘 아침 종로에 있는 본사 사무실로 불러들이더니 탐스러운 선물을 안겨주었다.
“공항 점포 운영권을 하나 가지게 되었는데. 뭐 팔면 좋을지. 네가 사업 한 번 구상해봐.”
공항 점포가 무엇이던가! 물건만 있으면 팔리는 곳이 공항이다. 설렘 가득한 사람들. 여행지 생각에 들떠있는 사람들. 돈 쓸 준비가 완료된 사람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곳이 바로 공항 점포다. 음식이 맛없어도 사먹고 비싸도 사먹으며 늘 되던 할인을 받지 못해도 인심 좋게 넘어가준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이토록 가뜬했던 날이 일전에 있었던가. 느낌이 좋다. 지난주 내내 시장조사에 매달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기회가 혹여 날라 갈까 사업 계획서를 종류 별로 준비했다. 퓨전호떡, 생활한복, 옻칠 공예품. 서류를 빠짐없이 챙겼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흠”
기훈이 놈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보니 퓨전호떡은 탐탁지 않은 것 같아 잽싸게 생활한복을 들이밀었다.
“흐음”
아. 이것도 아니라는 건가. 옻칠 공예품은 자신 없는데. 옻칠 공예품 서류를 들이밀지 다시 준비해보겠다고 말을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기훈이 놈이 입을 뗐다.
“이미 공항에서 다 팔고 있는 것들 아닌가? 다시 생각해봐.”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 같아 마음이 살짝 놓이기는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깜깜해졌다. 본사 건물을 나와 종로 2가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고 있는데 커다란 전광판이 눈에 딱 들어왔다. 그 속에서는 결혼정보회사 광고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저거다. 인연을 팔자. 곧장 기훈이의 사무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매칭서비스를 해보자. 남자나 여자나. 늙으나 젊으나. 하나같이 비행기 옆자리에 누가 앉을지 궁금해하자나. 상상하고. 비행기까지 갈 것 없이 공항에서 미리 만나면 좋지 않겠어?”
낙점되었다. 기훈이는 내게 전권을 줄 테니 재주껏 사업을 발전시켜보라고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매칭서비스는 상반기에 대규모 흑자를 달성했고 매칭서비스가 탄생시킨 1호 커플이 매스컴을 타고나서부터는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 이용 고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VIP일대일-매칭서비스를 시작했다. VIP일대일-매칭서비스 역시 대성공이었다. VIP일대일-매칭서비스의 대상 고객이 되기 위해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항공사의 오랜 과제였던 비즈니스 클래스 적자 문제까지 해결했다.
이주 전 나는 한국항공사 매칭서비스 사업부에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했다. 전권을 주겠다는 기훈이의 호탕함에 반해서 이제껏 달려오는 동안 우리가 동업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나뿐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고생 많았다. 매칭서비스 사업으로 할아버지한테 제대로 눈도장 찍었어. 원하면 회사 들어와서 일해 자리 하나 마련해 둘 테니.”
기훈의 이 한 마디로 지난 일 년여의 시간이 정리되었다. 돌아보니 매칭서비스 사업과 관련 있는 어느 것에도 내 이름 내 흔적은 없었다. 온전히 한국항공사 그리고 기훈의 것이었다.
콩고물 운운하던 사람들은 그럼 지분이라도 나눠 줄줄 알았던 것이냐며 실실 웃어대기 바쁘다. 꽤나 고소한 모양이다. 출근 전 찌들어 있는 얼굴을 보며 실소를 터뜨리곤 하는데 누구를 탓할까.
#4
제시어: 꿈
이번 소개팅도 망할 거라는 걸 몸뚱이는 이미 알아챘는지 이곳저곳이 쑤신다. 어차피 안 될 테니 집에 빨리 들어가자고 재촉이라도 하는 건가. 다른 성별의 사람과 마주 앉는 것이 얼마만인가 싶지만 서도 역시나 기대는 전혀 되지 않는다.
분명 파스타랑 피자를 파는 레스토랑인데 한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음식을 나르고 있다. 판소리와 이태리 가요가 번갈아 흘러나온다. 이런 분위기에서 첫 만남이라니. 익숙한 예감은 오늘도 적중할 것 같다.
“혹시?”
아오. 분명 레스토랑 입구만 보고 있었는데. 잠깐 딴생각하는 틈에 들어 왔나보다. 한복이랑 노래 때문에 히죽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웃겨보였겠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 네. 맞습니다.”
이준호 이 모자란 놈. 맞기는 뭐가 맞아? 표정이 벌써 살짝 굳은 듯하다. 소개팅 횟수가 열 손가락을 넘어섰을 때부터인가 상대의 표정만 봐도 티끌만큼의 호감이라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민영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저는 이준호입니다.”
먼저 소개하고 이름을 물어봤어야하는데. 소심하고 주도적이지 않은 남자로 이미 각인되었을 것이다. 첫 만남 중에서도 첫 인사가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또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애석하게도 내게는 분위기를 전환할 능력이 없다. 이쯤 되면 없던 능력도 생길 법한데 두 입술이 딱 붙어서는 떨어지지를 않는다. 마주 앉은 여자가 예뻐 보일수록 야속한 입은 한껏 더 오그라들었다.
“뭐 드실래요?”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당황하고 말았다. 메뉴판을 빠르게 훑었다. 머뭇거리면 안 될 것 같아 베스트 메뉴 중에서 일 번 메뉴의 이름을 따라 읽었다.
“오징어.먹.물.빠.에야.요.”
그리고 내 머릿속도 잠시 후 까맣게 물들게 될 입 속처럼 깜깜해졌다. 음식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지. 길어져가는 침묵이 괴롭기만 하다. 아무 이야기나 꺼내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먼저 적막이 깨졌다.
“혹시 영화 <더 킹> 보셨어요?”
아. 내가 이야깃거리를 던졌어야 했는데. 아쉽지만 대답이라도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부터는 본격 대화의 시작이니까 나도 적극적으로 말해야한다.
“지난주에 봤어요. 저는 재미없었어요. 내레이션도 과하고. 클리셰 범벅인데다가. 조인성이랑 정우성 잘 생긴 건 뭐 저도 알겠는데. 연기는 여전히 어색하지 않나요? 마지막에 선거 독려하는 장면은 참 어이가 없어서. 대중을 개돼지로 생각하는 건 정작 감독 본인 아닌가 싶더라고요. 재미가 없으면 짧기라도 하든가. 거의 세 시간 동안 앉아있느라 엉덩이만 쑤셨네요.”
후. 오그라들어있던 입이 터져버렸다. 혼자 지껄이고 나서야 아까보다 살짝 더 굳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경우의 수가 차례로 떠오른다. 밥 먹고 보러가자고 하려던 걸까. 영화 취향이 비슷한지 확인하고 싶었나. 재미있게 봐서 추천하려던 것일 수도 있다. 단정적이고 공격적인 말투는 엉망이었다. 질문해놓고 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단어 선택이 매우 구렸다.
“손님. 주문하신 오징어 먹물 빠에야 나왔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켜본 음식에서 오랫동안 알고지낸 냄새가 난다. 칼칼하고 짭짤한 냄새. 오징어 먹물이라고 해서 당연히 새까말 줄 알았는데 붉은 빛깔의 국물이 자작하게 깔려있다.
“야. 이준호. 얼른 일어나서 라면 먹어. 내가 다 먹어버린다.”
준호 놈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말소리가 점점 쨍해지고 강렬하고 친숙한 냄새는 코끝을 찌른다. 휴. 아무도 모르게 혼자 쪽팔려하고 말면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잠을 잔건지 눈을 감고 생각을 한 건지. 볼품없는 일상이 꿈속으로까지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지 좀 됐다. 꿈인지 생시인지 곱씹는 일을 두어 번 반복하다가 겨우 눈을 뜬다. 꿈같은 꿈을 꾼 것이 언제였던가. 행복한 일상. 귀여운 여자친구. 그런대로 꽤 괜찮은 나. 이준호가 꿈에 와주면 좋겠다. 잠 좀 푹 자게! 제발!
#5
제시어: 신문 일 면
<종호의 사정>
겨울의 끝자락 종호의 집에는 익숙한 조용함이 깃들었다. 종호와 종호의 아내 그리고 이제는 꽤 나이를 먹어서 집안 돌아가는 일에 촉을 세우기 시작한 종호의 딸까지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부정이라도 탈까 각자 속앓이를 하며 집주인의 전화를 기다렸다. 첫 전셋집을 겨울에 구한 것이 화근이었다. 종호의 가족은 이 년에 한 번씩 이번에는 세를 얼마나 올릴지 가늠해보며 야속한 겨울을 견뎌야 했다. 한 해도 걸러지는 법이 없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날아든 집주인의 통보는 종호의 가족을 격렬한 논쟁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세를 더 내도 소용없으며 집에 들여야 할 사람이 있으니 두 달 안으로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집주인의 막무가내식 통보가 합리적이고 합법적인지 따질 겨를조차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동네 부동산 두 세 곳을 돌고 온 종호의 가족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종호와 종호의 아내는 동일한 금액의 전셋집을 찾아볼 것인지 아니면 빚을 더 내서라도 집을 살 것인지의 문제를 두고 날을 세웠다. 둘 다 나름의 근거를 대어가며 호소했지만 승리는 종호의 것이었다. 이 년 마다 전전긍긍하는 일을 더 이상은 숨이 막혀 못혀 못하겠다는 종호의 선언에 종호의 아내와 딸은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처절한 승리였다. 이사를 완료하고 나면 집안에 서서히 활기가 돌 줄 알았지만 새집은 만만치 않았다. 변수 투성이였다. 종호의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부터 집안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책장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보다가 결국은 노란스티커를 붙여서 내다버려야 했던 날. 종호는 가족들과 섞여 있는 것이 민망하고 멋쩍어 얼굴이 벌게진 채로 담배 한 대를 물고 집 앞 공터로 향했다.
종호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긴 건 그 무렵부터였다.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정처 없이 흘려보낼 수 있고 가족들로부터 자연스럽게 고립될 수 있는 방책을 찾아냈다. 종호는 각종 신문들을 수집해 읽었고 시간대별로 촘촘히 배치되어 있는 정치 프로그램들을 챙겨보았으며 온갖 종류의 팟캐스트들을 섭렵해나갔다. 종호에게 이 모든 것들의 내용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일종의 일정표일 뿐이었다. 종호는 신문 일면을 펼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팟캐스트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잠에 들었다. 지극히 기계적인 취미였고 그 속사정이 훤히 보여 짠한 마음에 종호의 아내와 딸은 종호를 내버려두었다.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지만 가장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에게 특히 고역이었을 것이므로 잠시간의 고립책은 눈감아 주기로 한 것이다.
종호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먼저 감지한건 종호의 딸이었다. 그러나저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박씨가 서서히 궁지에 몰리기 시작할 때였다. 종호는 더 이상 신문 일면을 멍하게 응시하지도 종잇장을 휙휙 넘기지도 않았다. 박씨가 존재하는 문장은 노란 형광펜으로 그어 돋보이게 했고 신문 일면에 박씨의 얼굴이 등장하면 반듯하게 오려서 보관했다. 스크랩북에 박씨의 얼굴이 켜켜이 쌓이다 못해 미어터질 지경에 이르자 종호의 아내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새로운 취미는 어느새 직업이 되어있었고 종호는 존재의 이유라도 찾은 것 마냥 열성적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어디서 구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새빨간 색 옷을 입고 태극기를 챙겨들고 매일 이곳저곳을 쏘다녔으며 소리가 아예 나지 않을 정도로 목이 쉬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2017년 5월10일 아침 종호는 여느 날처럼 신문 일면을 펼쳐봤고 자신의 실직 곧 패배를 어렴풋이 확인했다. 존호는 떠났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서 스러져가는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지만 그뿐이다. 신문을 읽지도 TV를 보지도 팟캐스트를 듣지도 않으며 입을 꾹 다문채로 주변을 질식하게 만든다. 스쳐지나갈 자발적인 고립으로 명명되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종호는 영영 떠나버렸다.
#6
제시어: 비밀
<비밀인 듯 비밀 아닌 비밀 같은>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호출을 받았던 박사 2년차 호석이 연구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벌건 얼굴을 하고 씩씩대는 걸 보니 분명 교수에게 한 소리 들은 모양이었다.
“누가 커뮤니티에 글 썼냐?”
호석이 후배 연구생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보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적막의 순간 연구실에 갓 들어온 지민부터 박사 1년차 기훈까지 모두 입을 꼭 다물고는 눈치만 살폈다. 호석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담배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갔다. 호석이 교수 마크 담당이듯 호석 마크 담당은 박사 1년차 기훈이다. 기훈은 잽싸게 라이터와 겉옷만 챙겨들고 호석을 따라 나갔다.
“연구실 뒷이야기야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글인데 뭐 그렇게 신경 쓰고 그러세요.”
호석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교수가 노예처럼 부린다. 최저시급도 안 쳐주고 자식 과외를 부탁한다. 월급을 안 준다. 하루에 책 한권씩 복사한다. 논문에 본인 이름만 올린다. 무궁무진한 사연들이 커뮤니티에 올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원 연구실의 이모저모는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재수 없게 하필 담당교수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교수가 우리 연구실 애들이 쓴 거냐고 묻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그래. 후.”
“우리 연구실이나 다른 연구실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걸요. 뭐. 다른 학과 교수님 연구실 일인 것 같다고 잡아떼세요.”
누가 썼는지가 뭐 중요하냐고. 학생들 불만이 있는 걸 알았으면 고칠 생각이나 해야지. 교수 정말 답 없다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도리어 호석의 화를 돋울까봐 기훈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후. 배신감 든다고 하는데 말문이 턱 막히던 걸. 자기는 잘 챙겼다고 생각하는데 당황스럽다고. 교수님 글 올린 사람을 기필코 찾으려는 기세야. 한동안 시끄럽겠어.”
“우리는 연구는 대체 언제한대요?” 쓴웃음을 짓는 기훈을 보며 호석은 물고 있는 담배를 마저 태웠다.
“당분간은 기어야지 뭐. 나도 읽어봤는데 디테일을 보니 우리 연구실이 맞기는 한 것 같아. 지민이나 주용이 같은데. 네가 애들 좀 달래봐라. 이번에는 수그리라고. 추천서 받아서 해외로 뜰 생각이나 하라해. 어쩌겠냐.”
며칠간은 서늘했지만 다행히 해외 학회 일정이 급하게 잡히면서 색출 작업 없이 일이 마무리되었다. 지민이었는지. 주용이었는지. 혹은 호석이나 기훈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홧김에 한 번 질러놓고 엔간히 가슴 졸였는지 더 이상의 불만 제기도 없었다. 아무렴 평생이 달린 일인데 비좁은 학계에서 더 이상 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교수와 호석이 베를린으로 가고나니 연구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웠다. 기훈은 호석만큼 매섭지는 않다보니 석사 연구생들도 퇴근 시간을 당겨서 간만에 저녁 시간을 즐겼다. 잠깐의 여유가 지나고 약 일주일간의 평화는 멀리 베를린에서 호석으로부터 온 문자로 끝이 났다.
<<귀국 다음 주 토요일로 교수님 댁 이사 날짜 정해짐. 다들 시간 비워두라고 전달바람.>>
연구실 비밀 목록이 추가되었다. 왠지 이번 비밀은 쉽사리 까발려 질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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