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양궁015] 양궁 선수 김진호

이름
김진호(Kim Jin Ho)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61년 12월 1일, 경상북도 예천군
학력
예천여자중학교
예천여자고등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종목
양궁
별명
양궁 여왕
은퇴
1986년
![SC 페이퍼진] '신궁' 김진호의 잊을 수 없는 순간들 - 1등 인터넷뉴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image.chosun.com%2Fsitedata%2Fimage%2F201003%2F08%2F2010030801206_5.jpg)
소개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이자 한국체육대학교의
교수 겸 대한양궁협회 이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로서,
여자 양궁이 세계 최강이 되는데 그 주춧돌을
놓고, 가장 먼저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양궁 선수다.
대한민국 양궁에 미친 영향력 하나만큼은
절대적이었던 선수로, 가히 대한민국
양궁의 어머니라고 할 만하다.
현역 시절 별명은 양궁 여왕이다.
![포토섹션]여고생 김진호 등 양궁선수단,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제패](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res.heraldm.com%2Fphpwas%2Frestmb_allidxmake.php%3Fidx%3D71%26simg%3D20150724095522AUI5583_20150724100250_01.jpg)
선수 경력
예천여자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양궁부에
가입하면서 양궁 선수로서의 길에 접어들었다.
실력이 없었으면, 그냥 고교 시절 취미로 하는
정도로 끝났을 텐데, 막상 해보니
실력이 넘사벽이였다.
손가락이 부러진 상황에서 대표 선발전에
나가 1위를 했을 정도면 말 다 했다.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개인전 금메달과 197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에서 전무후무한 5관왕에
등극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래서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의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급부상했다.
이 무렵 터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이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했고, 대한민국도 모스크바 대회
보이콧에 동참함에 따라 선수 생활의
최절정기에 타의에 의해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면서 올림픽 메달의
기회는 어이없이 날아갔다.
![리우올림픽 결산Ⅰ] 한국양궁, 지지 않는 이유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www.gukjenews.com%2Fnews%2Fphoto%2F201608%2F539033_345089_4655.jpg)
그래도 포스는 여전해서, 1983 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등극했다.
마침 이듬해 올림픽이 열리는 곳이 로스앤젤레스라서
금메달 후보로 유력했는데, 정작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컨디션 난조와 긴장감 때문에
흔들리면서 0점을 두 번이나 쏘는 등
전반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바람에
동메달을 받았다.
그 결과 금메달을 차지한 서향순이 신궁의 계보를
이어받았고, 김진호 자신은 결국 올림픽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나중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부담감 때문에 힘들었다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단체전이 없던 시절이라 그걸로 올림픽 경력이 끝났다.
선수 생활의 절정기에 실패했다는 좌절감 때문에,
결국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것 대신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진학을 선언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양궁 3관왕을 차지하는
것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거쳐 1995년 한국체육대학교에
정식 임용되어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첫댓글 구본찬 선수는 위기에 강한 싸나이...
우리나라 양궁 남자의 기상을 보여준 리우올림픽..
정말 감명받았답니다!~
리우올림픽에서 개인과 단체 양궁에서 참피온에 오른
구본찬 선수를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손주뻘 종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