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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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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북부권문화 스크랩 의성김씨 김갑동가옥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67 12.03.12 10: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김갑동가옥(金甲東家屋)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소천 1리 190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소천 1리 190)
소 유 자 :  김형섭

건축 이야기
김갑동가옥은 이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길 쪽으로 나와 마을 집들의 앞 선을 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대문 앞으로는 서쪽 편으로 치우쳐서 젊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아이 몸통만한 굵기에 이른 이 은행나무는 김갑동가옥 위로 스치고 지나간 세월의 길이를 가늠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는 이제 건강한 활력을 뽐내고 있다. 김갑동가옥 역시 그런 활력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나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 위에 걸쳐진 세월과는 달리 김갑동가옥 위를 스쳐 지난 세월은 가혹한 야만성을 행사하여 이 집에서 생활의 훈기를 앗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떠나고 집은 방치되어서, 건물 구석구석이 무너져 가고 있다.

건축 구성
김갑동가옥의 대문칸은 정면 4칸, 측면 1칸이다. 정면 4칸은 좌우 비율이 불균형하게 만들어져 있다. 오른쪽에서 제 2칸은 대문칸이다. 지붕은 따로 만들어져 있고, 좌·우 행랑채 지붕보다 조금 높게 있다. 대문칸 좌·우의 행랑채는 오른쪽으로는 1칸, 왼쪽으로는 2칸 규모이다. 밖에서 보았을 때, 양쪽 행랑채의 벽면은 똑같이 위 1, 아래 2 정도의 비례로 횡분된다.

 

문중 이야기
- 소박하고 담담한 미학의 연출
김갑동가옥은 상당히 실용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지어진 집이다. 사랑채든 안채이든 위엄이 강조되어 있거나 사치스럽지 않으며, 기둥도 너무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딱 적당한 것들이다.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나 벽면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특별히 무슨 기교를 가미하지는 않았다. 그저 균형과 조화의 담담한 미학을 보여주는 현실적인 건물이다. 규모를 갖추고 있는 큰 집이기는 하지만, 옛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자유로움의 미학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다.


관련이야기
- 새집이면서 헌집인 김갑동가옥
김갑동가옥의 대문칸은 정면 4칸, 측면 1칸이다. 정면 4칸은 좌우 비율이 불균형하게 만들어져 있다. 오른쪽에서 제 2칸은 대문칸이다. 지붕은 따로 만들어져 있고, 좌·우 행랑채 지붕보다 조금 높게 있다. 대문칸 좌·우의 행랑채는 오른쪽으로는 1칸, 왼쪽으로는 2칸 규모이다. 밖에서 보았을 때, 양쪽 행랑채의 벽면은 똑같이 위 1, 아래 2 정도의 비례로 횡분된다.
오른편의 1칸 행랑채 경우에는 위쪽 벽면은 백회칠이 되어 있고, 아래쪽 벽면은 둥글둥글한 강돌을 황토를 이용하여 쌓아놓은 모습이다. 왼쪽 2칸의 행랑채는 다 백회칠이 되어 있는데, 대문 쪽의 벽면 위 칸에는 중앙에 옆으로 긴 사각형 창문이 달려 있다. 오른쪽 1칸의 행랑채와 왼쪽 2칸 중 끝에 있는 1칸은 아마도 마구간으로 쓰였던 것 같다. 지금은 헛간으로 비어져 있다. 오른쪽 2칸 중대문 쪽으로 붙은 1칸은 작은 행랑방이다.
본채 건물은 대문의 동북쪽으로 조금 비켜 자리 잡고 있다. 口자 모양이다. 앞 선은 사랑채와 중문채가 차지하고 있다. 사랑채가 왼쪽, 중문채가 오른쪽이다. 사랑채는 중문채보다 반 칸 정도 앞으로 나와 섰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오른쪽 2칸은 방이다. 앞에 반 칸 넓이의 마루를 두고, 방은 뒤편으로 물러서 있다.
앞마루의 오른편 측면은 벽으로 막아 놓았다. 주초 부분에 기둥 쪽으로 폭이 좁고 위로 길쭉한 삼각형 틈을 만들고 나머지는 다 흙으로 막은 벽이다. 앞마루의 앞쪽은 터져 있다. 이 부분에는 난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의 안쪽 1칸 앞뜰에는 섬돌이 있다.
사랑채 건물의 왼쪽 부분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 크기의 마루이다. 이 통마루 부분의 앞쪽 끝 선은 난간으로 막혀 있다. 각각 5개의 직사각형 틀을 갖추고 있는 각재 구조물을 2층으로 가설하였다. 아래 다섯은 판재로 채우고 가운데 안상을 도려내었으며, 위쪽 부분은 그대로 두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제대로 규모를 갖춘 난간과 약식 난간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마루 부분의 왼쪽 측면 벽은 앞 반 칸 아래는 한쪽 나무판 문을 단 나무판 벽, 위는 마름모꼴 광창으로 되어 있다. 뒤 1칸은 아래에 2쪽 나무판 문이 달려 있다. 마루의 뒤쪽 벽은 특별히 광창 같은 것을 배치하지 않고 그냥 다른 벽과 같이 처리하였다.
중문채는 정면 2칸 규모이다. 사랑채 쪽으로 중문이 달려 있고, 그 반대쪽으로는 아래에는 나무판 문이 달린 나무판 벽, 위에는 한가운데 네모진 사각 창이 달린 벽이다. 사랑채와 좌·우 연결채는 서로 붙어 있다.
사랑채와 붙은 왼쪽 연결채는 칸수는 다섯으로 나누어지지만, 실제로는 2칸 반 정도의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맨 아래 반 칸은 마루의 측면을 막은 나무판 벽이다. 아래로부터 제 2칸은 사랑채 마루방의 측면 나무판 벽이다. 제 3칸은 반 칸 규모로, 안마당 쪽에서 사랑채 마루방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것은 벽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아래편으로 2쪽 방문을 달아서 사랑채 측면 쪽으로 나올 수 있게 하였다. 이 문을 통해 왼편으로 나오면 쪽마루가 있다.
동쪽 연결채의 측면은 아래 제 1칸부터 여기 제 3칸까지 좁은 쪽마루를 두고 있다. 아래로부터 제 4칸은 측문 영역이다. 제 5칸은 작은 방이다. 여기서 연결채는 끝이 난다. 그 위쪽으로는 안채의 측면이 조금 떨어져 자리 잡고 서 있다. 지붕까지 조금 간격이 띄워져 있다.
행랑채의 왼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서쪽 연결채는 3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아래 2칸은 위 아래 1 대 3의 비율로 분할되어 위는 벽, 아래는 통나무를 조금 각이 지게 다듬은 나무판을 수선방향으로 이어 세워 나무벽으로 처리하였다. 원래는 이런 나무벽 밖으로 강돌을 흙으로 이어붙인 흙벽이 덧붙여져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고, 대부분의 벽이 속의 나무벽을 드러내고 있다. 위쪽에는 작은 사각 창문이 있다.
제 3칸 역시 같은 방식인데, 여기에는 반절쯤 되는 부분에 직각으로 담을 쌓아 안 밖을 구분하였다. 이 제 3칸의 위쪽으로는 지붕만이 1칸 정도 더 나아간다. 아래쪽에는 구조물이 없이 비어 있다. 이 부분은 안채에서 오른쪽 측면의 뜰로 나아가는 통로이다. 이 부분 위쪽의 지붕은 안채의 처마 밑으로 밀고 들어가 그 벽의 선에까지 이르고 있다. 다른 구조이지만 한데 붙어 있는 형국이다.
안채는 따로 떨어져 독립된 대좌 위에 서 있다. 사랑채와 좌우연결채가 ㄷ자 모양으로 위를 향해 입을 벌리고 서 있고, 위에 안채가 일선으로 바짝 다가 서 있는 형상이다. 지붕의 경우, 안채와 서쪽 연결채의 지붕은 빈틈없이 밀착하지만, 동쪽 연결채와는 서로 조금 떨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측면의 칸 사이는 통상보다는 약간 좁다. 여기 4칸의 서쪽으로는 약간 좁은 1칸이 덧붙여져 있다. 그것은 시멘트와 유리문을 이용한 것이다. 이 부분에는 쪽마루가 앞으로 붙어 있다. 따로 떨어져 있는 쪽마루이고, 높이가 낮게 설계되어 있다. 그 왼쪽 1칸은 방이다. 앞으로 두 뼘 정도의 쪽마루를 두고 있다. 그 옆의 2칸은 앞에 반 칸 규모의 앞마루를 두고, 뒤로 물러나 앉은 방이다. 물론 쪽마루는 이곳에도 이어진다. 쪽마루는 앞 선의 기둥 앞쪽으로 밀고 나와 있다.
김갑동가옥의 안마당은 일반적인 가옥의 경우처럼 조금 비좁아 보인다. 안채는 상대적으로 높은 대 위에 올라서 있으나 웅장한 규모는 아니다. 중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오면 서쪽으로는 바로 외양간이 있고, 동쪽으로는 사랑채 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와 외양간 사용용 솥이 걸려 있다. 솥 바로 위쪽으로는 작은 틈이 만들어져 있는데 사랑채로 들어서는 문이 달린 좁은 틈이다.
안마당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으므로 발 디딜 틈 없이 긴 풀이 자라나 있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김형섭(金亨燮)
- 김갑동과 그의 가계

깁갑동(金甲東)은 자가 선여(先汝)이고 1926년에 출생하였다. 부인은 영천 이씨이다.
깁갑동의 장자는 김형섭(金亨燮)인데, 자는 원도(元道), 1947년 출생이다.
김갑동의 부친은 김정락으로, 자는 정필(正弼)이다. 족보에는 정필 밑에 남파(南波)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것은 또 다른 자인지, 아니면 호인지 분명하지 않다. 배위는 청주정씨이고, 후 배위는 안동 김씨이다.
김정락의 부친은 김진여(金鎭呂)로 자는 자중(子仲)이다. 묘는 호산 중산곡에 있다. 배위는 흥해 배씨이다. 김진여는 김시혁(金時赫)의 2남이다.
김시혁은 자는 장언(章彦)이고, 묘는 아호에 있다. 배위는 남양 홍씨이다.
김시열은 김조열(金祖烈)의 2남이다. 김조열의 자는 극서(克緖)이고, 배위는 선성 김씨이다.

봉화 > 법전춘양권 > 소천리
- 옛 소라왕의 도읍지, 소천리
소천에서는 봉화 울진 사이를 연결하는 36번 도로와 태백 안동 사이를 연결하는 35번 도로가 十자 방향으로 교차한다.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의 동남쪽으로는 해발 607m의 월암산이 눌산 방향으로 벌려 서 있고, 서남쪽 방향으로는 해발 540m의 감의산이 자리 잡고 있다. 감의산의 남동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감의마을이다. 감의산 자락 속에 파묻혀 있으므로 감의마을이라고 한다.
감의산의 동북쪽 편으로는 어은골·어은동이 있다.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광정이 1739년 이곳에 은거하여 어은정을 짓고 살았다. 어은골이라는 마을 이름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온 것이다. 정자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정자가 서 있던 자리만 남아 있는데, 그 이름은 침향대라고 한다. 마을 앞터가 마치 물고기가 숨은 모양과 같아서 어은동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춘양의 옥돌봉과 시루봉 사이의 산줄기들이 모은 물은 운곡천을 이루며 의양 쪽으로 흘러내려 옥천터 앞에 이르고, 소천리를 가르며 아래로 흘러내려 어은·감의를 감아 돌고, 명호 쪽으로 나아가서 낙동강의 본류에 합류한다.
어은고을의 북쪽으로는 막골·막곡이 있다. 예로부터 인근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이곳에 막을 치고 비를 피하곤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막골의 동쪽으로는 옥천터·조래·사미정·평지마 등이 위 아래 방향으로 나란히 벌려 서 있다. 아래쪽의 평지마는 평촌이라고도 한다. 비교적 평지로 이루어진 곳이라 해서 붙여진 마을이다.
평지마의 위쪽으로는 사미정이 있다. 여기에는 조선 영조 때 우부승지를 지낸 조덕린이 1727년에 지은 사미정이 있다. 사미정이라는 이름은 네 개의 미자를 말하는데, 즉 미자를 포함하는 해, 월, 일, 시에 지은 정자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미정 앞은 냇물과 반석, 절벽과 나무 등이 잘 어울려 있다.
사미정의 위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조래이다. 조래는 조내·졸천·소천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원래 안동부에 속한 소라부곡이었다고 한다. 옛날 소라왕이 도읍했던 곳이기도 한데, 1895년에 봉화로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물길을 건너 반대편으로 나가면 어풍대가 있다. 옛날 소라왕이 패해 달아나다가 이곳에서 쉬며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고 해서 어풍대이다.
조래의 위쪽으로는 옥천터가 자리 잡고 있다. 사미정의 주인인 조덕린이 이곳에 와서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을 보고 스스로의 호를 옥천이라고 한 이래, 이 마을은 옥천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후에 의성김씨가 이주해 와서 이곳은 의성김문의 세거지가 되었다. 옥천서당·김갑동가옥 등은 이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이다.
옥천터의 위쪽에서 36번 도로는 35번 도로와 十자 형태로 교차한다. 그 교차점에서 법전 쪽으로 붙어 있는 마을이 오미(梧味)이다. 오미는 오산리라고도 하며, 조선 영조 때 참판 권두추가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양도하고 이곳으로 들어와 정착하여 오미라고 불렀다. 마을의 뒷산은 까마귀가 날개를 편 형상이라서 오산(烏山)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오산(梧山)이라 불린다. 오미와 옥천터 사이에는 시내를 중앙에 두고 창애정과 창랑정사가 나란히 벌려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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