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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이후 조선 정부는 조선에서 요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군의 국서(國書)와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포박해 압송[犯陵賊縛送]한다는 강화 조건이 이행되자, 1607년(선조 40)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 일행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후 회답 겸 쇄환사는 1617년(광해군 9) 7월, 1624년(인조 2) 10월 두 차례 더 파견되었다.
같은 해 7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 및 왕릉을 파헤친 범인 송환에 관한 일을 알리는 일본 측의 서계(書契)가 왔다는 보고가 경상 감사로부터 있었다. 이어 9월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 초안(草案)이 조선에 도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1590년(선조 23)의 예에 따라 삼사(三使)를 선발하였다. 정사는 여우길, 부사는 경섬(慶暹), 종사관은 정호관(丁好寬)이 임명되었다. 11월에는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가 파견되어 정식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왕릉을 파헤친 범인으로 대마도인 두 사람을 압송해 왔다. 조선에서는 국서와 왕릉을 파헤친 범인의 진위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명분상 조선의 요구가 관철되었고 강화 교섭의 주도권을 조선이 갖게 되었기 때문에 당초 계획대로 강화를 성립하기로 하고 신사 파견을 결정하였다. 1607년 1월 강화를 위한 조선의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사절단의 명칭을 통신사(通信使)·통유사(通諭使)·회답사(回答使)로 하자는 등의 논의가 있었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피로인의 송환 문제가 중요한 외교 현안이었기 때문에 사신이 출발하기 일주일 전에 회답 겸 쇄환사로 결정하였다.
한편 회답 겸 쇄환사의 또 다른 임무 중 하나는 일본 국내의 정세를 탐지하는 일이었다. 세 차례의 회답 겸 쇄환사 일행이 남긴 사행록인 『해사록』[경섬, 1607], 『부상록(扶桑錄)』[이경직(李景稷), 1617], 『동사록(東槎錄)』[강홍중(姜弘重), 1624] 등의 말미에 기재된 문견록(聞見錄)에는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사회·지리·풍속 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정보는 대일 정책을 수립하는 데 기초적인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조선의 일본관 형성에도 일조하였다. 이 외에도 외교 업무로서 외교 서신에 관한 문제 및 진공 요청의 거절, 특송선의 도항 문제 등에 대한 처리를 지시받았으며, 이들에게는 무기 구입이나 염료로 사용되는 왜주홍(倭朱紅)의 구입을 요청받기도 하였다.
이때 파견된 제2차 회답 겸 쇄환사가 가져간 조선 국왕의 국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의 근거지인 오사카[大坂]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절에는 정사는 오윤겸(吳允謙), 부사는 박재(朴梓), 종사관은 이경직이 임명되어 1617년 6월에 출발하였다. 세 번째 회답 겸 쇄환사와 1624년 10월에 파견되었다. 사절 파견 전인 1623년(인조 1) 조선에서는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7월 장군 이에미쓰[家光]가 장군직을 계승하자 이를 축하하는 사절의 파견이었다. 그리하여 1624년 8월 예조 참의 오백령(吳百齡)이 일본 집정(執政)에게 서계를 보내 회답 겸 쇄환사 파견을 알려 주었다. 새 막부 장군의 즉위에 따른 사절 파견은 1624년 제3차 회답 겸 쇄환사부터 시작되어 이후 통신사까지 이어지는 전례가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제4대 장군부터 이후 막부 장군이 새롭게 즉위할 때마다 일본에서는 고경사(告慶使)가 파견되었고,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전례에 따라 9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