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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땔감을 해 오는 아주머니와 길에서 모이를 찾는 닭 가족
▶ 내가 준 풍선을 가지고 노는 개구장이들
▶ 풍선을 달라고 떼쓰는 아이
▶ 엄마들의 수공예 공동작업장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풍선과 사탕을 주고
마을을 좀 올라가니 원두막처럼 생긴 곳에 개구쟁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 그들에게 다가가 제일 어린 여자아이에게 풍선을 불어 묶어 주었더니 개구쟁이들이 달려 든다. 풍선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었는데 풍선을 부는데 묶을 줄을 모르는지 풍선을 불었다 바람을 빼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으며 좋아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사진을 찍으며 흐믓해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아이를 안고 하나 둘씩 몰려 와 풍선을 달라고 한다. 마을을 내려 오다 보니 아주머니들이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조그만 베틀로 천을 짜고 있다. 신기해서 구경을 하고 있자니 아주머니들도 풍선을 달란다.
▶ 마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홈스테이
풍선을 드리고 마을 입구로 내려 오는데 마을 입구엔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시멘트로 지은 민박집이 보인다. 태국어와 영어, 일본어로 마을 민박이라고 쓰여 있다. 이 곳에서 정신 지체아를 만나 풍선 주었는데 집에 동생이 있어 3개를 더 달라고 떼를 쓴다. 가방을 뒤져 보니 풍선이 다 떨어져 볼펜을 줬더니 막무가내로 풍선을 내 놓으란다. 아무리 가방을 열어 보여 줘도 계속 떼를 쓰는데 T.G가 달려와 간신이 달래서 볼펜을 3개 더 주고서야 돌아 설 수 있었다.
▶ 아카족 마을의 식당
▶ 식당의 주방과 점심식사
▶ 좌-주유소에서 청년이 낮잠에 빠져 있다. 우-새처럼 생긴 꽃
다시 차를 타고 10여분 쯤 가다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른다. 아카족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치앙라이의 여느 식당과 메뉴는 비슷해 보인다. 볶음 밥과 쌀 국수를 주문했는데 맛이 그런대로 괜찮다. 식사를 마치고 보니 식탁 건너편 정원에 내 손보다 터 큰 나비가 날아다닌다.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이댔으나 어느 새 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 옆 작은 창고처럼 생긴 곳은 휘발유 드럼통을 하나 갖다 놓고 오토바이 등을 상대로 연료를 파는 간이 유류 판매소인데 청년 하나가 손님이 없는 한가로움을 이기지 못한 듯 해먹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트래킹을 계속하려고 차를 타려고 할 때 식당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마치 새처럼 생긴 꽃을 하나 건네 준다. 새 모양의 부리며 몸통, 긴 꼬리까지 희한하게도 꽃 모양이 정말 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 같다.
▶ 뜰 채로 물고기를 잡는 가족들
▶ 라후족 마을과 차 밭
다시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달리니 산등성이로 차 밭과 마을이 나타나는데 라후족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을 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려 차 안에서 T.G의 설명으로 대신한다.『티베트 동부와 중국 서남부에서 이주해 온 라후족은 치앙마이, 치앙라이, 메홍손 등에 약 8만 명이 살고 있는데 중국 운남성과 미얀마에도 각각 25만 명과 11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본래 사냥에 능해 사냥꾼이란 뜻의 '무써"라고 부를 정도였으나 지금은 벼나 다른 곡물들을 화전식으로 재배할 뿐만 아니라 채소, 면화, 차, 고추 등을 재배하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많지만 아직도 정령신앙을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자기네들 끼리 모이면 중국어(운남성 사투리)를 사용한다. 고상식 집에 침실과 거실은 있으나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많다.』설명을 들으며 보니 가옥구조가 아카족의 가옥구조와는 많이 다르다. 비가 세차게 내려 모두들 집안에 있는지 라후족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은 책(이원복 서울대교수)에 의하면『라후족은 고구려가 망할 때, 당나라에서 고구려 유민 10만명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들이 중국을 거쳐서 태국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라후족의 생활을 보면 우리와 많이 닮아 있는데 닮은 점은 ⓛ절구통에 찐 찹쌀을 넣고 깨를 묻힌 떡방아를 넣고 찧는 것이 우리의 인절미 만들기와 똑같다. ②어린이들이 공기놀이라는 것을 하는데, 작은 돌들을 던지며 노는 것이 우리와 아주 똑같으며, 1단에서 5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동일하다. ③편을 정하고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한 후 편이 정해지면 손으로 정교하게 굴려서 맞추면 이기는 놀이로 우리의 비석치기(사방치기)와 동일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편평한 돌을 이용하여 놀이를 하는데 비하여 이들은 열대의 납작한 열매를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④ 아이들은 우리의 전통 팽이치기와 같은 놀이를 하면서 논다. ⑤고생을 해서라도 부슬부슬한 안남미보다는 찰기가 있는 찹쌀로 지은 밥을 먹으려 든다. ⑥우리 나라와 비슷한 된장이나 김치 등도 있다. (물론, 고춧가루가 없는 하얀 배추절임같은 것이다) ⑦라후 여인들은 어릴 때부터 자수를 비롯한 뜨개질을 배운다. 처녀들은 부지런하여, 자신이 입을 옷 이외에 미래의 신랑이 될 사람의 옷까지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남자들 역시 부지런하여 이른 아침부터 밭에 나가 일을 시작한다. ⑧명절 때 색동옷을 입는다 ⑨언어도 우리 언어와 비슷하다. ⑩외모도 태국보다는 우리네와 더 비슷했다. ⑪집안의 아궁이를 쓰는 것도 우리네와 닮았다. ⑫고사 음식으로 찹쌀과 깨를 섞어서 만든 인절미와 웃는 돼지머리를 사용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이 우리민족의 일부인지는 생물학적, 유전학적 연구와 사료에 대한 검증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들이 우리말을 지니며 살아 왔던 것은 이들이 오지에 고립되어 살다 보니 기존의 언어와 충돌이 상대적으로 적어 고유의 언어를 간직하며 살아 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간단하게 잊어 버리고 있다. 이런 사실을 모두 단지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연구가 이루워져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라후족에 대해서 연구하지도, 한 바도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에게 그러한 사실을 거꾸로 제공하는데도 우리의 관심에는 변화조차 없다. 물론, 연구를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계승자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을을 한참 지나오는데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들 모습이 보인다. 반가워 차를 내리려 했으나 T.G에게 말할 기회를 놓쳐 지나친 것이 아쉽다.
▶ 산사태로 흘러내린 진창에 빠진 트럭
라후족 마을을 지나 와 "카렌족은 왜 안 보이느냐?"고 물었더니『여자들의 긴 목에 둥근 링을 한 것이 특징인 카렌족은 현재 국가에서 법적으로 둥근 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둥근 링을 한 카렌족은 미얀마로 추방해 눈에 띄지 않을 뿐 태국에 아직도 많이 거주한다. 고산족은 법적으로 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취업 등에서 매우 불리한 입장이며 이동도 일정 지역 내에서만 허용된다. 모든 고산족을 다 보려면 최소 2박 3일은 트래킹을 해야 하는데 카렌족이 사는 마을까지 가려면 오늘 일정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여행 오기 전 블로그나 까페, 여행 책자 등에서 카렌족의 모습을 많이 봐 꼭 보고 싶었지만 접어야 할 것 같다. 깊은 산 속을 짚차로 달리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보니 경사가 심할 뿐만 아니라 진흙 구덩이가 많아 사륜 구동 짚차가 아니면 도저히 다닐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 T.G는 그런 길을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지 않고 잘도 넘어간다. 내가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했더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러면서 몇 년 전만 해도 일본 차가 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차였는데 지금은 한국 차라며 한국 차의 우수성에 대한 이야기와 아들이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보며 값이 얼마냐고 묻더니 태국에서 제일 인기있는 휴대폰이 한국제란 이야기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 HOUYKEAW 폭포
▶ HOUYKEAW 폭포에서 기념 촬영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달리다 숲 공터에 차를 세우더니 폭포를 보러 가자고 한다. 대나무 밀림을 헤치고 비오는 가파른 산길을 10분 쯤 오르니 높이가 6~7m 쯤 되는 HOUYKEAW 폭포에서 엄청난 물을 시원하게 쏟아 내고 있다. 폭포에서 사진을 찍고 시원한 폭포를 바라보며 땀을 식히고 있는데 T.G가 윗 쪽 폭포가 더 좋다고 하며 앞장을 선다. 지금 올라 온 것보다 더 가파른 산길을 다시 10분 쯤 오르니 30m 쯤 되는 폭포가 굉음을 내며 물을 쏟아 내고 있다. 건기에는 폭포의 물이 적어 지금보다 볼품이 없지만 우기인 지금이 폭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때라며 자랑스러워 한다. 폭포의 물보라가 바람에 흩날려 우리 몸을 사정없이 어루만진다. 우비를 쓰고 있었지만 우리 모두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폭포를 향해 있는 힘껏 함성을 지르니 속이 다 후련하다. 사진을 찍고 폭포를 즐기다 보니 벌써 오후 4시가 다 돼 간다. 폭포를 내려와 오늘의 피곤함과 땀을 씻으러 SPA로 향한다.
▶ PHASOET 온천
▶ 야외온천 내부
곳곳에 산사태가 나 차량통행 조차 어려운 산길을 달려 SPA에 도착해 보니 노천온천이다. 온천 안에는 오전에 우리와 보트를 같이 탔던 이탈리안 남녀 4명이 벌써 온천을 즐기고 있다. 탈의실과 옷 보관실이 없어 샤워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옷과 배낭은 온천 가장자리 눈에 보이는 곳에 둔다. 유황 냄새가 약간 나는 이 온천은 30℃ 정도로 따뜻함을 느낄 수 있고 깊지도 않아 어린이들도 이용하기에 좋을 것 같다. 30분 쯤 SPA를 즐기고 간단히 샤워를 한 후 SPA를 나오는데 아이들 손에 달걀꾸러미를 든 가족들이 나타난다. 윗 쪽을 보니 매우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 오르는데 그 곳에서 달걀을 삶아 먹으려나 보다. SPA에서 나와 T.G에게 한국 사람들은 SPA의 온도가 40℃는 넘어야 좋다고 하는데 너무 미지근한 것 같다라고 했더니 태국인들은 SPA나 목욕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대개 샤워로 몸을 씻는다고 한다. T.G는 돌아오는 길에 오늘이 태국 왕비의 탄생일인 "Mother's Day"로 공휴일이라 코끼리 체험장이나 이 곳에 가족들과 나 온 사람들이 많았으며 국왕 탄생일인 12월 4일은 "Father's Day"로 역시 공휴일인데 "Mother's Day"보다 "Father's Day"에 더 큰 국가적 행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며 한국에도 이런 국경일이 있는가 묻는다. 치앙라이 시내가 가까워 오자 "오늘 좋은 사람들 만나 아무 탈없이 일정을 마칠 수 있어 감사드린다."며 몇 번을 고마워 한다. G.H 앞에 아쉬운 작별을 할 때 난 남은 볼펜과 사탕을 T.G에게 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T.G는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 딸이 있다.)
▶ 치앙라이 남부터미널
▶ 방콕행 버스,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운전기사
G.H로 들어가니 일행들과 길잡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게스트하우스 로비 소파에 앉아 오늘 하루 각자 여행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동화 속의 유리성 같은 하얀 백색 사원 왓 롱쿤을 다녀 온 이야기며, 어제 힘들어 못했던 치앙라이 시내 관광을 한 이야기 등이 많았지만 오늘 우리가 다녀 온 고산족 트래킹 이야기가 단연 일행들의 귀를 잡아 끈다. 오후 6시. 대절한 봉고차를 타고 남부터미널로 향한다. 치앙라이 시내가 크지 않아 벌써 내 눈에도 익숙한 시내를 가로질러 15분 쯤 걸려 도착한 버스터미널은 이번 여행에서 지금까지 본 버스 터미널 중 가장 번잡하고 시설도 훌륭해 우리 나라 버스 터미널 못지 않다. 태국 곳곳을 연결하는 깨끗한 이층 버스가 줄지어 승객을 기다리고 터미널을 이용하는 승객도 많아 번잡하다. 이 곳에서 트래킹 시 T.G가 사 준 람부탄과 잭 푸르트를 일행들과 나눠 먹는다. 6시40분이 되자 우리를 방콕까지 데려다 줄 이층버스가 승강장으로 들어 온다. 탑승 전 짐을 싣는데 공항에서 짐 부칠 때처럼 일일이 짐마다 인식표를 달아 짐 칸에 넣어 주며 짐 표를 배부한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는 이른바 999번 버스라 불리는데 이는 버스 앞 유리 상단에 999란 숫자가 있어서 이다. 1층에 12명, 2층 24명이 탑승할 수 있는 36인승 버스로 우리나라 공항버스처럼 1열에 3명씩 앉고 좌석이 거의 150° 이상 젖혀져 장거리 야간 이동시 정말 편리해 보인다. 버스 요금도 904batt(우리 돈 약 32,500원)에 불과해 우리 나라 고속버스 요금에 비해 무척 싸다.<치앙라이에서 방콕까지 785km 심야고속버스 요금 32,500원, 서울에서 부산까지 384km 심야고속버스요금 34,2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