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쌍수의 실천
정혜쌍수, 보림(保任)의 기초
선(禪)의 생명은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임을 깨치는데 있다. 이를 돈오(頓悟), 견성(見性), 해오(解悟), 증오(證悟) 등 다양한 용어로 부르고 있지만, 핵심은 중생이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알고 보니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밝게 깨치는 것이다.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은 나의 본질이 부처라는 엄청난 선언 앞에 중생들은 희망을 갖게 된다. 지금은 비록 형편없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부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중생의 본질이 부처라 하더라도 불성(佛性)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여전히 중생의 삶을 이어갈 뿐이다.
마음을 깨친 선지식들은 현실에서 부처로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는 수행을 이어간다. 이를 보림(保任)이라 한다. 보림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 본래의 불성을 잘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성이 작동을 하지 않아 중생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중생을 얼음, 부처를 물에 비유해보자.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얼음과 물은 H2O라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얼음이 곧 물이라는 실상을 깨치는 것이 견성이라면 얼음을 실제로 녹이는 일은 보림이라고 할 수 있다. 군대 시절 혹한기 훈련에 참여했다가 식수가 없어서 고드름을 녹여 라면을 끓여먹은 적이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얼음을 녹여야 커피나 녹차를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보림을 잘 해야 현실에서도 부처로 살아갈 수 있다.
효봉 역시 진리를 깨친 선사로서 보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보림은 중생에서 성인의 삶으로 일대 전환을 이루는 길이다. 그런데 이 일이 결코 만만치 않다. 보림이 얼마나 어려운 실천인지 효봉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쇳덩이를 다루어 금을 만들기는 오히려 쉽지만 범부가 성인(聖人)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 일이 천상천하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산승이 투신(投身) 조역(祖域)하여 이미 삼십여 년이 지났다. 조주고불(趙州古佛)은 보림(保任)을 삼십 년 하고, 향엄 화상(香嚴和尙)은 타성일편(打成一片) 사십 년에 이 일을 성취한 것이다.”
효봉이 1959년 동화사 금당선원에 주석할 때 법문한 내용이다. 보림이 얼마나 어려우면 쇳덩이로 금을 만드는 일이 오히려 쉽다고 했겠는가. 그렇다면 이처럼 어려운 보림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일이다. 수행이 선정과 지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치선(癡禪)이나 광선(狂禪) 등의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 효봉은 선정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전승하기 힘들다고 강한 어조로 지적한다.
“우리나라에 선풍(禪風)이 들어온 지 천여 년에 혜(慧)에만 편중하고 정(定)을 소홀히 하였다. 근래에 선지식이 종종 출현하였으나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에 앞길이 망망하니 그 까닭은 정혜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고서 어떻게 불조의 혜명을 이을 수 있을 것인가?”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란 글자 그대로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그러니까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을 의미한다. 죽음은 평생 수행했던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효봉이 지적하는 것처럼 죽음 앞에서 앞길이 망망한 이유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사들이 건혜(乾慧), 즉 선정이 결여된 마른 지혜로는 생사를 면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정혜쌍수는 보림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실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확인할 것이 하나 있다. 비록 정혜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계행(戒行)까지 포함한 삼학(三學)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정혜쌍수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쌍수(三學雙修)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종교가 많지만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을 닦아서 생사해탈을 하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다. 계행을 청정히 지켜야 정력을 기르고 정중의 지혜가 밝아져야 생사해탈이 되기 때문에 고불고조(古佛古祖)가 말씀하시길 마지막에 죽을 때 가서 정혜쌍수가 되지 않으면 생사해탈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불교의 삼학은 선(禪)뿐만 아니라 불교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수행체계다. ‘계의 그릇이 깨끗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선정의 물이 고여야 지혜의 달이 비친다.’는 말이 있다. 선정과 지혜의 수행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더러운 그릇에 깨끗한 물을 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계율은 선정, 지혜와 함께 보림의 기초가 되는 실천이다.
방편으로써 삼학
효봉은 삼학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를 집 짓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계율은 집터와 같고, 선정은 재목과 같으며, 지혜는 집 짓는 기술과 같다.”는 것이다. 아무리 집 짓는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 또한 좋은 재목을 갖추고 있더라도 집 지을 터가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집터와 재목, 기술을 모두 갖추어야 온전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삼학을 함께 닦아야 마침내 정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효봉의 생각이었다.
이처럼 삼학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삼학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만약 삼독이 없다면 삼학 또한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병이 없으면 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효봉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삼학(三學)으로써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긴요한 문(要門)을 삼는다. 그러나 그 삼학의 문은 탐욕과 분노와 우치(愚痴)의 삼독(三毒)을 없애기 위해 방편으로 세운 것이다. 본래 삼독의 마음이 없거늘 어찌 삼학의 문이 있겠는가.”
이처럼 삼학은 삼독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구체적으로 계율은 탐욕을, 선정은 분노를, 지혜는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수행이다. 효봉이 지적하는 것처럼 궁극적으로는 삼독이 본래 공(空)하기 때문에 삼학의 문 또한 없다는 실상을 깨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과거로부터 지은 삼독의 업(業)이 남아있기 때문에 삼학을 마음 닦는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효봉은 독특하게 삼독을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범부와 이승(二乘), 보살, 부처의 삼독이 그것이다. 수행의 경지에 따라 삼독의 내용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범부에 해당되는 삼독은 다음과 같다.
“삼독이란, 오욕(五欲)을 비롯하여 일체의 구함을 탐욕이라 하고 매를 맞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기타의 모든 역경(逆境)에 대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분노라 하며, 바른 길을 등지고 삿된 길에 돌아가 바른 법을 믿지 않음을 우치라고 한다.”
우리들 중생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중생보다 경지가 높은 이승(二乘), 즉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의 삼독은 어떨까? 성문은 붓다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 사람이며, 연각은 홀로 공부해서 연기의 진리를 깨치는 사람이다. 이들은 중생들과 달리 “즐겨 열반을 구하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생사(生死)를 싫어하는 것을 분노라 하며, 생사나 열반이 모두 본래 공(空)인 것을 알지 못함을 우치라 한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의 내용이 중생들과는 사뭇 다르다.
셋째로 보살의 삼독은 “불법(佛法)을 두루 구하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이승(二乘)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분노라 하며, 부처 성품(佛性)을 분명히 모르는 것을 우치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분명 이승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부처의 삼독은 어떤 것일까?
“부처의 삼독이란, 중생을 모두 구제하려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를 방어하려는 것을 분노라 하며, 사십오 년 동안 횡설수설한 것을 우치라 한다.”
이처럼 부처의 삼독은 앞의 세 가지와 수준을 달리 한다. 효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선사의 시선으로 삼독을 새롭게 해석한다. ‘삼독이 바로 도(三毒是道)’라는 것이다.
“탐욕(貪慾)이 원래 바로 그 도(道)이며 분노와 우치도 또한 그러하네. 이와 같이 삼독(三毒) 가운데에는 모든 불법(佛法)이 갖추어져 있네.”
중생들은 고통의 원인인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다스리기 위해 삼학을 공부하는데, 효봉은 삼학이 바로 도이며, 그 속에 모든 불법이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그러니까 번뇌는 끊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진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선사로서의 면목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효봉은 삼독이 도라고 말하고 나서 대중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대중의 경계인지, 아니면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의 경계인지 말해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 선사 특유의 방식으로 함정을 파놓는다. 대중의 경계라고 말해도 30방, 문수와 보현의 경계라 해도 30방의 몽둥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법어집에는 대중들이 아무 말이 없었다고 나오는데, 아마 대답을 안 해도 30방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 몽둥이를 피할 수 있을까?
효봉의 방망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효봉의 질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효봉이 던진 질문 또한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이끄는 방편이기 때문에 그의 질문, 아니 함정에 집착하는 한 그 어떤 대답도 몽둥이를 피할 수 없다. 마치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효봉의 질문에서 눈을 떼고 직접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몽둥이 대신 수많은 대답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누군가 이렇게 답하는 장면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스님, 이제 그만 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시죠.”
대중의 경계라고 말하지 않았고 문수와 보현의 경계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또한 침묵하지도 않았다
[출처] 21. 정혜쌍수의 실천|작성자 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