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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강릉경포의 다섯 개의 달>의 줄거리:
경포가 관동8경의 제1경인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다섯개의 달이 뜨기 때문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체념과 한탄 어린 어조 대신에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나온 이 세례요한의 선언은, 십자가 예수님 믿어 거듭난자의 이 땅의 삶이 경포대에 올라 달을 세는 풍류객의 삶임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기막힌 말씀입니다.
강릉경포의 다섯 개의 달
(요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강릉경포의 다섯 개의 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을 썼습니다.
관동 땅, 대관령 동쪽 강원도를 중심으로 관동지역이라고 하는데, 관동별곡을 짓는 중에 강릉의 경포를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합니다.
요즘 춘천의 박물관에서 관동팔경에 대한 재해석을 하면서, 매년 팔경 중에 하나씩 전시를 하고 있는데, 그 관동팔경 중의 제1경이 바로 강릉의 경포입니다.
강릉의 경포가 관동팔경 중 제1경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다섯 개의 달’입니다.
경포에 가면 경포대가 있습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도두라진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언덕 위에 정자가 있어서 그것을 경포대라고 합니다.
보름달이 뜬 밤에 풍류객이 벗과 더불어 경포대에 올라서 술을 서로 마십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둥근 보름달이 뜨니까, 그 경포대의 소나무 가지에 걸쳐서 하늘에 뜬 보름달에 마음이 홀딱 빠져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거울 같은 경포호수에 달이 떠있고, 경포호수의 동쪽 끝에 모래사장이 있는데, 달빛에 어스름하게 비치는 모래사장 건너편에 파도가 잔잔하게 이는 바다가 보입니다.
그 바다에 또 달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돌려 술잔을 보니 술잔 안에 달이 또 떠있고, 말을 건네는 벗을 바라보니 그 벗의 눈동자에도 또 하나의 달이 깃들어있습니다.
이렇게 달이 다섯 개라는 거예요, 이것이 너무 아름답다는 겁니다.
다섯 개의 달에 둘러싸여서 벗과 함께 술 한 잔을 경포대에서 마시게 되는 이 광경, 그래서 강릉경포에 다섯 개의 달이 뜬다는 얘기가 나온 거죠.
익명의 풍류객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 얘기가 되었겠지요.
이것이 계속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경포에 다섯 개의 달이 뜬다’
여러분, 오늘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옵니다.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이 한 말이지요? 어떤 상황에서 한 말입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걱정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던 분 있잖아요? 요단강 저편에서 선생님께 세례 받은 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양이라고 하셨던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다 그리고 가서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한테는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는 그냥 존재조차도 사라져버리고 말겠습니다.’
이때 세례요한이 한 말입니다.
‘그분이 세례를 주시고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몰려가는 현상, 하늘에서 허락하시지 않은 일이라면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 때 그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지만 신랑의 친구가 큰 기쁨을 갖는 것처럼 그런 기쁨에 충만하다,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아, 무슨 말이거나 말거나 물어볼 것도 없지, 예수님께 세례 받으러 많은 사람이 간다고 그러니까 그게 흥하는 것 아니냐?
조금 다른 뉘앙스가 있습니다.
여기서 ‘흥한다’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가 ‘아욱사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숫자나 양이 늘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쇠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에요, ‘엘라토우’라고 하는 말인데, 숫자나 양이 줄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라는 말씀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숫자가 늘어나야 되겠고, 나의 숫자는 줄어들어야 되리라 라는 말입니다, 직역하자면.
이 직역을 그대로 붙잡고 뜻을 헤아려봐야 이 말씀의 참 맛이 나온다는 얘기에요.
우리는 ‘흥한다’라고 하는 얘기, 얼마든지 삶 속에서 경험을 합니다.
사업이 흥한다, 사업이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국가가 흥한다, 국가가 쇠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 다 압니다.
교회가 부흥한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몰려들 때 우리가 교회가 부흥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숫자가 는다, 무슨 팔도에 한꺼번에 나타나는 홍길동을 말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숫자는 늘고 나의 숫자는 줄어야 된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게 바로 경포대에서 풍류객이 달을 세는 것과 같은 것을 뜻한다 이겁니다.
경포대 풍류객이 하늘의 달을 보고, 경포호수의 달, 바다의 달, 술잔에 담긴 달, 그리고 벗의 눈동자에 깃들어있는 달을 발견합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흥해야 된다는 이 말의 뜻은 예수님께 많은 사람이 몰려갔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져 있는 예수님의 숫자가 늘어나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 사람이 많이 몰려왔다고 해서 꼭 그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담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담겨져 있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 찾아오는 사람 중에서 문둥병자는 자기의 건강이 담겨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예수님의 숫자가 늘어나야 된다는 이 말은 예수님이 담겨져 있는 사람의 마음이 많이 발견되어야 되고, 사람의 마음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숫자가 늘어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또,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는 무슨 말입니까?
세례를 줌으로써 하나님께 나가기 위하여 자기의 더러움을 자각하게 되는 일이 ‘나’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은 점점 줄어야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비쳐진 나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기쁨이 충만하다는 얘기에요.
이렇게 보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다 흥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에요.
나의 숫자가 늘어나기를 원하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나를 수용해서 그 사람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그 ‘나’를 발견하고 싶은 겁니다.
박근혜 씨와 문재인 씨가 대선에서 붙었습니다.
박근혜 씨가 1500만 표 이상 얻어서 당선이 되고, 문재인 씨가 약 100만 표 정도 덜 얻었습니다.
자, 박근혜 씨가 1500만 개의 득표를 했다는 것은 1500만 개의 박근혜를 발견했다는 얘깁니다.
경포대에 오른 풍류객이 다섯 개의 달을 발견한 것처럼, 박근혜 씨가 사람들 마음속에 비쳐진 1500만 개의 박근혜를 발견한 것이고, 문재인 씨가 1400만 개의 문재인을 발견함으로 박근혜가 이겼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이 딴 게 아닙니다.
‘나’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기를 바란다는 얘깁니다.
‘나’를 많이 발견하고 싶은 것이에요.
경포대 풍류객이 달을 다섯 개나 발견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담겨진 나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잘되는 것이고 성공하는 것이고 형통하는 것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최고로 나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지요.
약 50명 직원의 회사 사장님이라면 50명 속에서 50개의 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겠지요, 고 정도 성공하는 겁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따져보면 딴 게 아닙니다.
어느 교회가 부흥했다, 어느 교회가 부흥했다, 전체 기독교가 부흥했다는 말이 아니라 어느 지역의 어느 교회가 부흥했다는 얘기는 결국 그 교회의 목사님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얘깁니다.
사람들 마음에 비쳐진 그 목사님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얘기죠.
자,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지는 것이 뭡니까?
이 땅에서의 삶이 풍류객이 경포대에서 달을 세는 삶으로 바뀐다는 얘깁니다.
더 이상 나의 숫자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예수님의 숫자를 확인해간다는 얘기에요.
호수에 비친 달을 발견하고, 바다에 비친 달을 발견하고, 술잔에 비친 달을 발견하듯이,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나의 숫자가 많아지는 나의 흥함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을 바라면서 살게 된다는 얘깁니다.
왜 이런 변화가 있을까요?
이건 명령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숫자가 많아지도록 예수님을 발견하면서 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내가 발견되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이 발견되는 것이 기쁨인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가 흥하기를 바란다는 세례요한처럼, 그의 숫자가 많아지기를 바라며 살게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느냐?
경포대의 풍류객으로 돌아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포대의 풍류객이 최초로 발견한 달은 하늘에 뜬 달입니다.
하늘에 보름달이 떴는데, 청명한 밤하늘에 뜬 보름달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거기에 소나무가지가 하나 걸쳐있으니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풍류객의 마음이 하늘에 떠있는 달에게로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달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하늘에 떠있는 달의 아름다움에 빠진 이 사람은 이제 땅을 내려다보면서 땅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달을 발견해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버렸습니다, 하늘에 뜬 달로 가버렸고 달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달에 빠진 사람은 이 땅에서 달을 찾습니다.
자기를 찾지 않습니다.
이와 똑같은 원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땅에 대해서 죽고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보입니다.
하늘이 보이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거예요.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내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물이에요.
그렇게 되면 성령이 주어지면서 하늘이 보이는데, 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이 홀딱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늘로 옮겨진 자는 더 이상 이 땅에서 자기를 찾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는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이 말씀처럼 나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매력에 빠져버린 자가 마음이 하늘아버지께로 빠지고, 주님께 빠져버렸을 때 하는 일이 이 땅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시니까.
그래서 경포호수 같은 아들을 만나면 그 아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를 찾게 되고, 경포 앞바다 같은 아내를 만나면 그 아내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가를 찾지 않고, 아내의 마음속에 내가 홀딱 빠져버린 하늘의 하나님이 들어있는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친구를 만나면, 이 친구가 나를 받아들여서 내가 그 친구 안에서 발견되고 있는가가 관심이 아니라, 내가 마음에 빠져버린 그 하늘의 하나님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친구의 마음속에서 발견 되는가 아닌가를 찾는다는 얘기에요.
이게 바로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잊고 사는 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 사업이 너무 안 됩니다, 내 사업을 좀 돌봐주시옵소서!’ 이럴 때 잊어버리는 게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가 늘 드리고 있는 겁니다.
‘주님, 우리 자식을 돌봐주시고, 우리의 건강을 돌봐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늘 드려지고 있는데, 잊고 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주님!’ 하고는 더 이상 나가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사업이 잘되게 도와주세요!’ 여기까지 나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님 때문에 내게 주어지는 좋음은 비유적으로 황금 50kg이라면, 사업이 잘돼서 좋은 것은 구리 50kg입니다.
그런데 ‘순금 50킬로 같은 주님! 구리 50킬로 같은 사업이 잘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구리 50kg으로 좋아하고 기뻐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는 얘깁니다.
자식이 잘돼서 기쁜 것은 구리 50kg 때문에 기쁜 거예요.
그런데 주님 자체로 기쁜 것은 순금 50kg인데, 사람들이 전부 순금50kg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구리 50kg에 매여 있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의 실상이에요.
좋음은 끝났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우리의 미래가 사라져버린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래의 의미는 지금보다 더 좋은 형편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미래가 의미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형편이 주어질 미래를 다 모아놓아도 구리 50kg밖에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황금 50kg의 기쁨이시라는 겁니다.
이걸 왜 제쳐두고 갑니까?
이렇게 주님을 붙잡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 다이아몬드 50kg이 있는 거예요.
박 근혜 씨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어머니 아버지 일찍 여의고, 독재자의 딸이라는 얘기 들어가면서 온갖 힘든 시간 보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제 청와대에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러나 구리 50kg의 기쁨입니다.
구리 50kg의 좋음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열린 그 하늘은 경포대 풍류객이 발견한 그 하늘의 보름달과 같은 것이라서, 이 땅에서 더 이상 청와대에 받아들여진 나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길 정도로 하늘에 심취해버립니다.
그렇게 하늘의 둥근 달에 빠져버린 자가 이 땅에 떠있는 달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우리의 관심은 오직 이 땅에서 하늘을 찾아내는 겁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의 숫자, 육신이 되신 말씀, 인간이 되신 하나님, 그분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예수님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기를 바라면서 사는 것, 이게 바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하늘에 들어가 있고, 하늘 안에서 발견되고 있으니까 이 땅에서 나를 찾을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이 땅을 벗어나서 하늘의 하나님께 내가 안겨져 버렸는데 경포대의 풍류객이 하늘에 뜬 보름달에 마음이 빠져버린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승천하신 주님께 빠져버린 나를 거기서 발견하면 되는 것이에요.
이제 이 땅에서는 내가 홀딱 빠져버린 그 하나님, 인간이 되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내 자식, 아내, 남편, 부모님, 친구,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발견하는 그 재미로 살아가며, 그것이 발견되지 않을 때 안타까워 모든 사람의 마음의 호수에 보름달이신 예수님이 뜰 수 있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알리는 일이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의 유일한 기쁨이고 궁극적인 의미가 된다는 것을 알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는 숫자가 늘어가야 되고, 나의 숫자는 이 세상에서 늘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반해서, 하늘에서 나를 발견한 자의 특징은 이 땅에서 하늘을 찾으려고 마음이 조급할 따름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경포대에 올라 벗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풍류객의 눈에 달이 보입니다.
여기도 저기도…
그런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를 주님 때문에 갖게 된 자들로서 이 땅의 누구를 만나든 그 마음에 우리 주님이 비쳐지는가를 찾게 하시고, 주님이 없는 자의 마음속에 주님을 소개하며 사는 유일한 낙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