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속도
이시경
나침반도 없이 시간의 함수로
구불구불 그들은 주어진 궤적을 그린다
우주 속 한 점에서 서로 만나 한 호흡으로 수렴한다
하나의 쌍극자로 떨다가 사랑은 * 속도로 사그라진다
결 따라 하양울음과 검정울음이 반복된다
종종 심하게 어긋나 덜컹거릴 때에는
살짝살짝 브레이크를 밟아보기도 하는데
부르릉거리는 가슴속으로 들어가 엔진을 들여다본 것은
이미 하이웨이 저만치 들어서였다
커브 내리막길을 내달리다 심장 파열로
도로 곳곳에 쌓인 날개조각과 부릅뜬 눈동자들이
냉각수를 뿌려 엔진을 간간이 식혀주고는 있지만
시간을 먹고 끝없이 진화하는 파라미터 *와 *은 막을 수 없다
권태가 날개를 달고 광속으로 날아간다
우주를 떠도는 미립자이기에
떨림은 허공 속에서 헤매다 이내 잠들어 버리겠지만
빛깔은 아직 수소 스펙트럼선보다 더 뚜렷한데
지금 속도계는 얼마를 가리키나
반세기 동안 하나로 떨었다
아내는 치매 남편 수발로 무덤 속까지 동행했다
어느 50년 지기 노부부의 속도 제로의 떨림은 과연 어떤 맛이고 색깔이었을까
허허호호거리는 지하 단칸방 하나가 우뚝 선다
가속 페달이 부르르 떤다
다가오는 안개 속 갈림길까지의 거리를
시간의 발목을 잡고 울음의 마디로 가늠해본다
* 부분은 자연과학 기호인데, 올려지지가 않습니다. 원문은 애지 가을호를 참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금전수金錢樹
나는 여러 생의 몸을 비틀어 이승으로 퍼 올린 이야기다
푸른 골수와 피가 푹 녹아있는 고전 醫書다
이야기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구절마다 여러 길들이 있으나
나는 첫 페이지 첫 마디에 목숨을 걸었다
새순은 흙속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한마디를 던진다
어둠속에서 마디가 채워지고 한줄기 푸른빛 불꽃이 인다
백내장으로 두껍게 덮인 눈을 거쳐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들의 팍팍한 가슴에 박히기 전까지는
그들은 그것이 어둠의 두 세계를 이어주는 첫 마디라는 것을 몰랐다
풋풋한 한 구절을 놓고는 들여다보기만 했다
망각 속의 옛 문장들을 한동안 더듬은 후에야 그들은 흐느껴 울었다
나는 티브이 인터넷 스마트폰의 디지털소음 속에서 신음하던
그들의 초록 파동의 탈출기이다
세상은 나를 금전수라고 부른다는데, 혹자는 나를
폐 서점의 창고에 묻혀 한숨짓는 아날로그 고전 철학서라고 한다는데
나의 문장과 사상과 철학을 흔들지 마라
나는 연둣빛 손을 감아올려 그대의 상처 어루만지는 손
흙에 호흡을 불어넣는 말이다
봄에 보내는 안드로메다의 영상편지
빅뱅이후 은하와 별로부터 각종 복사선들의 탈출이 벌어지고 있다. 더러는 지구에 온다.
빛의 열차가 곡선을 그리며 달려간다. 더러는 바닥에 더러는 천장에 더러는 창문에 걸쳐있다. 의자가 따로 없다. 그들은 누구나 열차 안에서 공중으로 휙휙 지나다닌다. 번쩍이는 눈에 굳게 다문 입, 그녀는 방금 안드로메다은하에서 승차했다. 그녀는 아직도 떨고 있다. 적외선 편지는 검색대에서 투명했다. 베텔게우스별에서 탈출하여 자외선 밀서를 들고 승차하려던 어떤 여행객도 은하 중심 블랙홀 퀘이사에서 보낸 경찰에게 바로 몇 정거장 전에 잡혀갔다. 그들 중 생쥐은하 감옥에서 탈옥한 강력범은 X선 건을 숨기고 있다. 정차할 때마다 그들은 주머니에서 레이저 건을 만진다. 올챙이은하에서 가출한 개구리소년이 T선 꼬리를 흔들며 방금 승차하더니 그녀 옆자리에 앉는다. 그녀는 언어해독기를 올챙이은하 언어에 맞춰서 소년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번이 소년의 10214번째 열차, 목적지도 없다.
직녀성에서 탄 승객 Ab24, 그가 분홍색 편지를 조급증으로 미리 꺼내 읽자 모두 손수건을 꺼낸다. 견우성까지의 328광년거리가 전광판에 번쩍인다. Ab24는 제 나이를 어림잡아보다가 단념한다. “그 때까지는 경찰에 잡혀도 실종되어서도 안 돼”, 안드로메다의 그녀도 망설이다가 편지를 다시 감춘다. 빅뱅 이후로 여행을 해왔던 마이크로파들이 승차와 하차를 반복한다. 기차는 암흑 속에 새 길을 내면서 숨바꼭질하듯 블랙홀을 피해 계속 달린다. 창밖으로 어둠이 크게 입을 벌리고 탈선한 열차들을 삼킨다. 자다 깨다를 거듭한다. 250만 년 전에 앞서 갔던 그녀의 친구가 막 지구에 도착했다고 삐삐거린다.
안드로메다에서 온 하트편지를 열자 연분홍색의 안드로메다 언어가 쏟아진다. 매화나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영상편지를 받아 적는다. 사방에서 벌들이 몰려와 꽃을 몇 주간 열독하다간다. 공원을 산책하는 그늘진 얼굴들이 꽃나무 속에서 금세 환해진다.
납덩이
그가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다
그에게 자주 가까이 가려고 했으나
나의 게으름은 늘 핑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은 계속 달리고 있었다 잠시 풀린 구두끈을 고쳐 매는 사이
자꾸만 쌓이는 서류더미의 중심에서 밀려 입이 부어있는 그에게 다가 갔다
눈이 마주치자 뭔가 얘기할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개학이 다가올수록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기는 나도 마찬가지
지루함과 무료함이 네가 갖고 있는 전부인데
숫자와 함수와 방정식을 빼면 뼈와 해골만 남는데
너를 데리고 식성이 까다로운 그들 앞에 설 것을 생각하니
솔직히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나아 보였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요, 진도가 너무 빨라요”
“영어 발음이 좋지 않아 이해가 잘 안돼요“
이들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너와 내가 충분히 준비하고 결탁하여
놈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우리도 그리하자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숫자가 나올 때에는 숫자를 해체시켜 꼬투리를 잡아 시처럼 확대하고
별이나 우주로 증폭시켜 우선 분위기를 탱탱하게 긴장시키자
함수가 나타날 때는 진부하지 않은 사랑이야기로 끌고 가자
방정식을 다룰 때에서는 이미 많은 탈락자가 필연이나
이른 봄에 매화가 피는 것 라일락향기에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
가을 단풍길 따라 코스모스 피고 지는 것 학생들이 졸업하여 취직하는 것이
모두 방정식이라고 그들을 제압하여
끝까지 끌고 오면 어떻겠니
3킬로그램짜리 공학수학 책은
시들시들 죄인처럼 말이 없었다
태풍이 몰려온다
날개가 부실한 그가 들어서자
책장과 책상위에서 서적들이 가늘게 떤다
따끈따끈한 저널 한 페이지를 들추자
표절시비를 피해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글자들이 빛에 들뜬 원자인 양 우뚝 일어선다
그리고 달린다 그 뒤로 알파벳들이 숫자들이 함수들이
삼바축제에 뒤섞여서 뒤 따르고 있다
길가의 어느 샘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들의 행렬을 독수리눈으로 더듬어보면
새가슴 속에 이는 회오리. 숨이 막힌다
적은 무리들이 큰 무리 앞에서 바동댄다
그들을 짓밟고 한 공룡 무리가 지나간다
그 뒤에 더 큰 무리가 막 태동하고 있다
자잘한 날개들이 돌풍에 부러진다
주눅 든 아우성들이 책상에 수북이 쌓인다
허기의 물결이 상어 이빨을 드러내며
과제 규모와 논문숫자에 파래진 나를 삼키려고 입을 벌린다
실험실 연구원들의 숨결은 해 지난 논문 속에서나 가끔 출몰할 뿐
낡은 과제제안서만이 서류더미 속에서 숨을 할딱이는데
점점 더 가까이 몰려오는 태풍의 이름들
바이오 그래핀 그린에너지
확률이 꿈틀거리다 태풍이 된다
반딧불이 태양이 된다
-----애지 2011년 가을호
애지신인문학상 당선 소감
이 시 경
시를 처음 시작한 것은 십 년 전쯤이다. 그러나 한동안 공백기를 갖았다가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내 나름대로의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시에는 치유 효능이 있다. 둘째, 시를 통해서 고도의 감성과 지성을 훈련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창의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 요즘처럼 전자기술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세상에서는 자칫 우물쭈물하다가는 뒤처지게 된다. 따라서 국가도 회사도 개인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과 조직의 효율이 무엇보다도 강조된다. 허나 지나친 경쟁 속에서 잘못하다가는 개개인의 감성이 심각하게 바닥을 드러냄으로 인해서 기업체나 국가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채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획기적인 기술이 제때 나오지 않으면 기업 전체가 도산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업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IT, BT, ET, NT와 같은 XT 첨단기술 분야에서, 시창작과 같은 고도의 창의력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시를 써야하겠는가? 평생을 이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하는 또 한 사람으로서 지금 이 순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첫째로, 예술적 깊이도 깊이이겠으나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어서, 내 시가 한 편이라도 찌든 가슴들을 다소 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둘째,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미개척지를 찾아 사금 한 톨이라도 캐 보임으로써, 아이디어에 목말라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상상력에 조금이라도 자극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시를 쓰는 자세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항상 배운다는 성실한 자세로 시를 읽고 쓰고 싶다. 실험에 대해서도 관대할 것이며, 국내외 모든 시들을 볼 수 있는 여유로운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끝으로 애지로 이끌어주신 김윤배 선생님, 시를 쓸 수 있도록 지면을 마련해 주신 애지의 반경환 선생님과 애지 담당자분들께 감사드리면서 이 글을 마친다.
약력: 부여 출생
성균관대학교 교수
이메일주소: sigyung1@hanmail.net
애지신인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이시경 씨의 시에 대하여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에 의하면 자연과학자들은 그들의 사유의 출구가 막힐 때마다 공상과학소설을 읽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소설가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상상력이 그들의 경직된 사유의 출구를 열어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상호 대립적이며 아무런 관련도 없는 학문 같지만, 그러나 그것의 목적과 추구의 방법은 매우 똑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 번째는 그 학문의 목표는 우리 인간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언제나 다같이 ‘가설’을 설정하고 그 가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은 상상력의 싸움이고, 이 상상력의 싸움은 이 가설을 얼마나 잘 설정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의 속도] 외 9편을 응모해온 이시경 씨는 자연과학자이며, 따라서 그는 자연과학적인 지식으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성찰하고 그것을 시로 쓰게 된다. “권태가 날개를 달고 광속으로 날아간다”라는 [사랑의 속도], “푸른 골수와 피가 푹 녹아있는 고전 醫書다”라는 [금전수金錢樹], 직녀성과 견우성까지의 거리는 328광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안드로메다에서 온 하트편지를 열자 연분홍색의 안드로메다 언어가 쏟아진다. 매화나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영상편지를 받아 적는다. 사방에서 벌들이 몰려와 꽃을 몇 주간 열독하다간다. 공원을 산책하는 그늘진 얼굴들이 꽃나무 속에서 금세 환해진다”라는 [봄에 보내는 안드로메다의 영상편지], 자연과학의 연구와 그 강의 준비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이른 봄에 매화가 피고 라일락 향기에 연인들이 사랑을 하고, 가을 단풍길 따라 코스모스 피고 지고, 학생들이 졸업하여 취직을 하듯이 모든 방정식이 다 풀리기를 바라는 [납덩이]라는 시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언제, 어느 때나 연구과제의 규모와 논문숫자에 가위눌린 삶을 살고 있는 시적 화자----그러나 그의 가위눌린 삶의 꿈이 ‘비이오 그래핀 그린에너지’로 변모되고, 마침내 “반딧불이 태양”([태풍이 몰려온다])이 되는 기적을 연출하게 된다.
자연과학의 언어는 매우 어렵고 딱딱하며,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시경 씨는 이 자연과학의 언어를 좀 더 쉽고 재미가 있으면서도, 이 세계와 우리 인간들의 삶의 비경秘境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과 그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권태가 날개를 달고 광속으로 날아간다”, “직녀성에서 탄 승객 Ab24, 그가 분홍색 편지를 조급증으로 미리 꺼내 읽자 모두 손수건을 꺼낸다. 견우성까지의 328광년거리가 전광판에 번쩍인다”, “점점 더 가까이 몰려오는 태풍의 이름들/ 바이오 그래핀 그린에너지// 확률이 꿈틀거리다 태풍이 된다/ 반딧불이 태양이 된다”라는 시구들은 이시경 씨의 언어의 사제로서의 그 능력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게 한다.
시인의 언어는 바위를 뚫고, 빛의 속도로 우주비행선을 띄울 수 있어야 한다. 이시경 씨의 시적 상상력과 그 언어 사용능력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