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시–‘이야기 시’ 이론 연구>
아버지의 곱사등
이국수
피난 시절 부산은 배고픈 도시였다.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힘든 타향살이
아버지는 등짐을 나르고 손수레를 끌면서
하루 종일 몇 푼 벌이도 못 한 채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운수 좋은 날은 힘든 줄도 모르고
등짐을 가득 싣고 콧노래를 불렀다.
한평생 고통의 세월을 감내하면서도
가족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
혼자서는 감당하기도 힘든 짐을 지고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절벽 계단을 묵묵히 오르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랬을까
손톱이 다 빠지고 이가 다 무너져 내려도
그 흔한 틀니 한 번 못하고
잇몸으로 드시면서도 잇몸으로 웃으셨다.
밀기울죽이라도 먹을 게 있어 다행이었다.
자식들이 등을 뉠 수 있는 판잣집이라도 좋았다.
무거운 짐만 지고 힘든 일만 하셨던 아버지
가족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등짐을 얼마나 많이 진 탓일까
아버지의 등이 곱사등이 되었다.
가난보다 배고픔이 무서운 시절
아버지는 생존의 짐을 지고 사선을 넘고 있었다.
([월간문학] 2020/12)
|작법공부|
이 작품은 운문 형태로 되어 있지만 작품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한 편의 산문 이야기 작품으로 읽힌다. 마치 한 편의 소설작품이 길든 짧든 한 편의 이야기로 읽히듯.
문학이 소설, 희곡 외에도 드라마, 시나리오, 동화, 그리고 현대의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분화되고, 세밀하게 쪼개진 결과 ‘이야기’가 무슨 시란 말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장의 광고 동영상물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스토리텔링을 시詩로 감상하는 일은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이런 현대의 다양한 이야기 시대에 더구나 이야기가 없는 현대시를 시라고들 하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는 시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근본 이유가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적어도 문학인이라면 문학적 반성, 즉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학은 본래 이야기였다. 문학뿐만이 아니고 노래도 그림도 조각까지 모든 예술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다비드상>을 본 일 있는가? <다비드상>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시는 본래 이야기였다. 최초의 문학이론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은 시극 창작론이다. 시극은 극형식의 이야기다.
시가 이야기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 번성하기 시작한 소설문학이 그 분수령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야기는 소설에 넘겨주고, 개인의 감정・정서만 토로하는(워즈워드) 서정시 시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이야기를 잃어가는 현대에 오히려 다른 모든 문화 현상에서는 이야기가 없이는 산골 작은 마을 행사조차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시는 날이 갈수록 독자는 없는, 시인 혼자서만 좋다고 쓰는 문학이 되어가고 있다.
필자의 <산문의 시> 공부는 <산문(에세이)의 창작詩적 진화> 현상에 관한 공부에서 시작된 일이다. 수필이 ‘신변잡기’ 비난을 받는 옆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산문작품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시인, 소설가, 예술가들이 쓰는 <산문집>이라는 산문작품들이었다. 그들의 산문은 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가 살펴보니 그들은 ‘시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방금 필자는 ‘시적 이야기’라는 말을 하였다. 이야기는 이야기인데 시적이라니? 그게 뭔가?
<산문의 시>는 바로 그 대답의 출처로 돌아가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본래의 시> 회복 운동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 형식이 운문이 아닌 ‘온전한 산문형식’이라는 것뿐이다.
이 작품은 성한 사람이었던 아버지와 곱사등이 되신 아버지 사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설이 이야기 마당을 펼치고 있는 곳이 바로 ‘성한 아버지’와 ‘곱사등 아버지’ 사이라는 곳이다. 그러니까 시의 이야기와 소설의 이야기가 같은 생활 무대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왜 시 이야기는 시가 되고, 소설 이야기는 소설이 되었는가? 얼핏 한 권 분량의 책을 써야 만족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질문에 대한 시작품의 대답은 아주 간명하다. 그것은 ‘우리는 이 작품에서 성한 아버지가 곱사등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서사를 읽었는가, 소리 없이 흘리는 시적 화자의 눈물을 읽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전혀 안면이 없는 이국수 라는 시인의 뺨에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야기)을 읽었다.
눈물은 직관의 세계라고 할 수 있고, 서사는 객관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노래를 부르거나 한숨을 짓고, 소설은 떠들어댄다. 그래서 시는 짧고, 소설은 길다.
이 작품은 ‘이야기 시’ 형식이 굳이 산문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반드시 운문이어야 할 필요도 없음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문장형식은 이야기 내용과 이야기하는 톤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자라 나오는 것이지 먼저 정해 놓은 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문의 시>는 운문이든 산문이든, 심지어 소설이나 희곡이나 동화라도 어디든 ‘시 이야기’, ‘이야기 시’가 있는 곳이면 아무 차별 없이 찾아가 포옹한다. 이것이 <산문의 시>의 시적 태도다.
이 작품은 마치 이 같은 <산문의 시>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작품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운문이면서 산문처럼 읽히고, 그런가 하면 운문처럼 읽히기도 하는 작품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이유가 이야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독자는 운문이든 산문이든 가리지 않는다. 독자는 운문을 읽는 것도 아니고, 산문을 읽는 것도 아니다. ‘시 이야기’를 감상할 뿐이다. 무대형식은 절대 중요하다. 그러나 관객은 ‘절대 중요한 무대형식’이 ‘이야기’에 의한, ‘이야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이야기’를 감상하였다. 세상에 등 굽지 않은 성한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