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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과, 삶과, 사람과 원문보기 글쓴이: 한림
열 세 개의 봉우리,
수원, 용인, 성남, 의왕, 과천, 서울의 여섯 도시를
좌우로 접하며 걷는 긴 길이다,
그 길에 들어선다.
수원 경기대학교 캠퍼스 후문 쪽에 위치한 광교산 반딧불이 들머리에 네 명이 모여 스틱을 펼쳐 잡고 등산화 끈 조여 매니 이때가 아침 8시 경이다. 병소, 영빈, 계원 모두 표정들이 밝다.
광교산에서 백운산, 바라산, 우담산을 통과하여 청계산까지 약 28km를 걷게 된다. 10시간 남짓 걸어 어둑해질 무렵 청계산 아래 화물터미널 쪽으로 내려서기로 했다. 다들 무사히 완주했을 경우의 전제이다.
광교산光敎山은 수원시 장안구와 용인시 수지구에 걸친 산으로 수원천의 발원이자 백두대간 한남정맥의 주릉이며 수원의 진산이라 할 수 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막아주어 풍수지리에서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게 한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넓고 크지만 평탄한 육산이라 초반은 가볍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더운 날씨지만 우거진 수림이 햇빛을 막아주어 체력소모도 덜어줄 걸로 판단된다.
올해 들어 첫 장거리산행이다. 몸도 정신도 나태해지려할 즈음에 스스로를 보듬고 친구들과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 여겨진다. 열 세 개의 봉우리, 수원, 용인, 성남, 의왕, 과천, 서울의 여섯 도시를 좌우로 접하며 걷는 긴 길이다. 그 길에 들어선다. 형제봉을 오르는 첫 계단을 내딛으며 늘 그랬던 것처럼 무탈한 안전산행을 기원한다.
“바라옵건대 오늘의 산행이 우리 네 사람 모두의 몸에 무리 없이, 마음은 더욱 풍요하게, 거기 더해 자연의 정기까지 듬뿍 담아 오늘 이후 새로운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래서 5월에 아름답지 않은 산은 어디에도 없는 거야.”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짐으로써 한강본류와 남한강 남부유역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줄기를 한남정맥이라 하는데 곧 이르게 될 형제봉과 광교산, 백운산이 거기 해당한다.
박재삼 시인의 ‘산에서’가 서두르지 말라며 걸음을 멈춰 세운다. 묵직한 메시지를 안겨주는 팻말 앞에서 시를 음미하고 산을 되뇐다.
그 곡절 많은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
젊어 한창때
그냥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기쁨이거든
여름날 헐떡이는 녹음에 묻혀들고
중년 들어 간장이 저려오는 아픔이거든
가을날 울음 빛 단풍에 젖어들거라.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 속에
아른히 어린 우리 한평생
그가 다스리는 시냇물로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시려오느니
사랑을 기쁘다고만 할 것이냐,
아니면 아프다고만 할 것이냐.
고려야사에 전해 내려오기를 광악산 혹은 광옥산으로 불리다가 고려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서기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옥산 행궁에 머물며 군사들을 치하하던 중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채를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친히 광교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광교산에 올라와서 보니 왜 도시이름을 수원水原이라고 했는지 알겠군.”
영빈이가 광교저수지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는데 역시 산 주변에 저수지가 유난히 많기 때문이다. 정상인 시루봉(해발 582m)에서 내려서면 두 그루의 큼지막한 노송 옆으로 자그마한 통나무집이 한 채 세워져있는데 노루목대피소이다.
재작년 하얗게 눈 덮였던 노송의 자태가 그럴듯했었다. 수원 8경 중 광교적설光敎積雪을 으뜸으로 꼽는다니 한겨울 따로 시간을 내어 이 산을 걸으며 하얀 여백을 음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통신대(송신소)를 지나면서 광교산을 벗어나 다음 백운산으로 넘어서게 된다. 한남정맥을 쭉 둘러본다.
“우리나라는 눈길 닿는 곳마다 산이 뻗어있어서 좋아.”
“은행에 쌓인 돈뭉치를 보는 것보다 훨씬 넉넉해지지?”
“아무렴. 유동자산보다 부동산이 훨씬 효율적이지.”
꽃과 신록의 어우러짐, 진초록과 진분홍, 바이올렛violet의 조화로움을 눈여겨보라. 꽃은 아름답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신록이다. 신록은 산의 얼굴이며 상징이다.
“그런 게 은행엔 없잖아.”
“그래서 5월에 아름답지 않은 산은 어디에도 없는 거야.”
먼저 산에 다녔다고 해서 아는 척하면 들어주고, 정확하지 않아도 먼 산 가리키며 설명하면 고개 끄덕여준다. 기특한 친구들이다. 산을 벗어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양 따져 묻고 들이대겠지만.
두 해전에 흙더미, 눈 더미 마구 뒤섞인 이곳 한남정맥 주능선은 싸늘한 한기 가득해서 더욱 멀고 고독한 길이었었다. 지금 광활한 수림의 짙은 초록은 에너지 활기차게 뿜어내고 더더욱 친구들 함께하니 어디인들 힘들쏜가. 저 아래, 저 높이, 저 멀리서 성큼 다가오는 대자연의 무한기운을 우리 가슴속에 한가득 부어 담고 우리 우정에 진득이 버무리어 그렇게 또 나아가세나.
백운산白雲山 정상지대에는 백운호수 쪽에서 올라온 산객들로 붐빈다. 백운산(해발 567m)은 의왕시 관할이니 수원과 용인을 지나온 셈이다. 정상 공터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신록의 향연에 심취된 모습들이다. 밝다.
다시 걸음 내딛어 백운산과 바라산을 잇는 고갯길, 완만한 능선을 걸어 고분재까지 간다. 백운산과 바라산을 잇는 소담한 산길에 의왕대간이란 이정표가 자주 눈에 띈다.
고려가 망한 후 충신들이 도읍인 개성에서 이곳으로 몸을 피해 왕王씨를 모시고 기리고자 왕의 획이 들어간 의義자를 써서 의왕이라 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의왕시도 생긴 듯한데 고려 말부터 조선 초의 일화가 유독 많은 곳이 이 부근의 산들이다.
고려 때 안렴사를 지냈던 조견은 그의 형 조준이 이성계를 도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청계산으로 들어갔다. 태조 이성계가 벼슬을 내리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여생을 마친다.
“내 묘비에 고려 때의 벼슬만 적고, 조선 때의 훈명은 적지 말도록 해라.”
그렇게 유언하고 눈을 감았는데 자식들은 후환이 두려워 개국이등공신 조견지묘라고 묘비를 세웠다.
“그런데 그날 밤 벼락이 쳐 개국이등공신이라는 글자만 부서졌다더군.”
“하늘이 조견의 손을 들어준 셈이야.”
살다보면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다고 해도 또다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현실을 꺾고 뒤틀어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필연이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조견 또한 굴절된 삶에 휘둘리다 스러지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여 필연적 운명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백운호수를 시계방향으로 끼고 돌면서 우담산으로
잠시 고려와 조선의 간극에서 벌어지는 충절과 배신을 새겨보다가 바라산으로 향한다.
바라산(해발 498m)은 망산望山이라 불렸었는데 고려 수도 개성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풀어 바라산이라 지었다고 한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개성은 시야에 없고 산 아래로 백운호수가 보인다. 백운호수를 시계방향으로 끼고 돌면서 우담산으로 향하게 된다.
바라재로 내려가는 24절기 철제계단, 365 희망계단이라고 명명한 이 계단은 1년 365일을 15일 간격으로 구분한 24절기를 소재로 이곳을 오르는 산객들의 건강과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니 감사한 일이다.
동지부터 소한까지 365개의 계단을 내려서서 돌아보면 성큼 한 살을 더 먹은 느낌이 든다. 광교산 들머리부터 대략 10km를 지나온 셈인데 아직까지는 다들 끄떡없어 보인다. 내려온 만큼 올라가는 곳이 산이다. 바라재에서 다시 고도를 높이게 된다. 뙤약볕 능선이 거의 없다는 것이 오늘 산행의 큰 복이다.
“자, 여기서 점심먹자.”
우담산 정상 지척에 자리 잡고 배낭을 푼다. 한상 가득 진수성찬을 차려 점심식사를 한다.
“산에서의 즐거움 중엔 먹는 일도 크게 차지하지.”
“난 그게 전부인 거 같아.”
“그래, 넌 산에 다니면서 살이 더 붙었어.”
노동이나 훈련에 휴식이 없다면 얼마나 고되겠는가. 산행을 잠시 멈추어서 바리바리 챙겨온 먹거리를 나눠먹는 건 그럴듯한 만찬 못지않다. 산에서는 갈증을 느끼기 전에, 허기를 느끼기 전에 물을 마시고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먹는 모습들을 보니 식사가 조금 늦었나보다. 너무 맛있게 먹는다. 어렸을 적 소풍 나와 먹는 것처럼 맛있다.
한 시간여 정찬을 즐기고 바로 우담산(해발 425m)에서 네 번째 인증 샷을 박는다. 볕 뜨거운 산정, 지치고 땀 젖었어도 카메라 앞인지라 미소 띠우면서 서로를 다감하게 끌어안는다. 푸릇한 생동, 환희의 빛이 가슴에 자리하고 눈에 들어찬다. 아주 멀리 눈길 던져도 튕기듯 반사되어 돌아온다. 그 되돌림 속에 시름과 한숨이 사라지고 미소와 긍정, 그리고 삶의 참한 미소가 풍성하게 담겨졌으면 좋겠다.
하오고개에서 바라보는 청계산 국사봉과 망경대가 아득하다
거리상으로 딱 반 정도 왔다고 할 수 있는 영심봉을 지나 하오고개로 내려간다. 그리고 폭 높은 나무계단을 내려가서 우담산과 청계산을 잇는 교각, 외곽순환도로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다. 식사 후의 산행길이라 피로하고 지칠 법도 한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행을 이어간다.
다섯 산의 끝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어라
이제부터는 다섯 번째 청계산으로 접어든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은 청계산의 옛 이름 청룡산을 이렇게 읊었다.
청룡산 아래 옛 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 하네
친구들과 함께 크게 심호흡을 한다.
“여기 국사봉 오르는 길이 오늘 산행코스 중 가장 가파른 구간이야.”
“힘들어 보이네.”
영빈이가 갈 길을 올려다보고는 좌우로 몸을 비틀어 스트레칭을 한다.
“앞장서게나.”
중턱에 닿자 갑작스레 몰아치는 바람에 진달래 마른 꽃잎이 떨어진다, 오다만 봄이거늘 한여름 재촉하나싶어 오던 길 돌아보니 곳곳마다 초록으로 속속 물들이는 중이다.
장딴지 묵직해오건만 시시때때 관계없이 가는 길 무릉도원인 양 여겨지는 건 사랑하는 벗들과 산을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의기투합해 목표한 바에 점점 다가서기 때문이다. 술이 맛있어 혼자 마시겠는가. 원수와 술자리 함께 하는 일이 흔하겠는가.
그 자리에 내가 사랑하는 이, 나를 좋아하는 이가 있으므로 해서 술맛 거나하고 얼큰하게 취기 오르는 것 아니겠나. 그들과의 산길은 숨이 목까지 차 올라와도, 온몸이 땀에 젖었어도 마냥 가볍고 싱그럽기만 하다.
쏟아지는 졸음을 떨쳐내고 청계산 첫 봉우리, 국사봉(해발 542m)에 닿는다. 화강암 기단 위에 커다란 바위를 올린 정상석을 보며 그제야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편다. 숨을 고르고 또 고려멸망의 시간대로 이동해본다.
“나라가 망했는데 목숨을 부지하는 건 개와 다름없다.”
고려충신 조윤은 그래서 고려멸망 후 자를 종견從犬이라 지었다. 개는 그저 주인을 연모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충신의 오롯한 충심을 어떻게 가늠하겠는가마는 국사봉과 망경대를 오가며 망국의 슬픔을 곱씹었을 조윤의 가슴속이 얼마나 찢어지고 망가졌을지는 헤아려지고도 남음이 있다.
국사봉國思峰은 그렇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명명된 곳인데 낮지만 넓게 뻗은 소나무의 푸름이 충절을 대변하듯 의연하게 정상석을 지키고 서있다.
“정 힘들면 여기서 탈출해.”
여기서 청계사 쪽으로의 하산로가 있지만 지나쳐 이수봉으로 간다.
“여기서 포기하면 내 호를 종견이라고 해야겠지.”
“휴우, 개처럼 기어서라도 가자고.”
다소 길긴 해도 청계산 하나를 남기고 중도탈출을 시도할 수는 없다는 눈빛들이다. 다시 예정대로의 행군이 이어진다.
이수봉二壽峰(해발 547m)은 조선 연산군 때 세자시절 연산군의 스승이던 정여창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이곳에 숨어 두 번 위기를 모면했다고 지어진 명칭이다. 그의 호 일두一蠹도 한 마리 바퀴벌레라는 자괴적인 의미를 지닌다.
정몽주, 김굉필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라 칭송받았던 일두 정여창 선생은 갑자사화가 일어난 1504년에 죽은 후 다시 부관참시를 당했으니 두 번 살아나 두 번 죽임을 당한 셈이다. 그는 온갖 동물들이 드나들어 오막난이굴이라고도 불리는 청계산 마왕굴에서 은거하다가 밤이 되면 망경대 정상의 금빛이 감도는 샘물인 금정수를 마시며 갈증을 달랬다.
“정여창 선생이 부관참시를 당하자 달빛을 받아 금빛을 발하던 샘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하지.”
그 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복관이 되자 붉어진 샘물은 다시 금빛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청계산 이수봉에 이르렀을 때는 심신이 나른할 즈음이다
당시의 정사와 야사가 뒤섞여 많은 이야기를 뽑아내는 이수봉 너른 터에 옛골이나 절 고개에서 올라온 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식사를 한다.
여기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다음 행선지 망경대 갈림길을 지나 석기봉에서 암릉구간을 우회하여 청계산 주봉인 망경대望京臺(해발 615m)를 찍는다. 이곳 또한 조윤이 이성계를 피해 여기서 막을 치고 고려수도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랜 곳이다.
“저 물이 금정수인가?”
바위 밑에 금빛도, 핏빛도 아닌 샘이 조그맣게 고여 있다.
“아마 그럴 거야.”
혈읍재에 닿자 다시 정여창이 등장한다. 성리학적 이상국가의 실현이 좌절되자 청계산에 은거했던 그가 망경대 아래 고개를 넘다 통분해 울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하여 후학인 정구가 피눈물을 뜻하는 혈읍재라 명명했다고 한다.
청계산은 조윤이나 정여창의 일화에서 보듯 도피 혹은 은둔의 장소였나 보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명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말년을 지냈다고 하니 말이다.
긴 길을 걸어와 막바지 청계산을 지나면서 문득 제로섬게임zero sum game의 이론이 떠오른다. 해외 원정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다거나 인터넷도박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유명인들이 화두에 오르곤 했다. 고스톱이나 포커게임 등은 누군가가 따면 반드시 그만큼 잃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 간에 따거나 잃은 돈의 합은 거기 참가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의 액수와 같다. 딴 사람은 희희낙락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바로 옆 사람의 자조적 한숨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 정권이 기존의 정권을 뒤엎고 들어서는 허다한 사건들은 고려가 조선에 넘어가는 과정처럼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판가름 나는 win-lose게임이다. 시대의 음지로 물러선 정몽주, 조윤, 정여창, 이색 등과 달리 동시대를 풍미했던 정도전, 이방의, 배극렴 등은 개국공신으로 새 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다 같이 win-win이 될 수 없고 게임에 참가한 이들의 이익과 손실을 모두 합하면 그 합이 반드시 ‘0’zero이 되는 제로섬게임을 떠올리고 만다.
어찌되었건 청계산은 지조와 절개의 터전으로 그 유래에 깊이 스며들어 좋은 느낌을 지니고 싶은 곳이다. 지금은 도심의 허파이자 커다란 쉼표역할을 하는 청계산이다. 그런 산이 패자의 음지로 폄하되는 게 싫다고나 할까.
혈읍재를 지나면서 지친 기색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젠 다 같이 완주한다는 의미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실감할 즈음이다. 힘에 부친 일행을 달래고 설득하여 억지로 동행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좀 더 가보고…….”
“얼마나 더 가야 되지?”
힘들면 혈읍재 아래 샛길로 빠져 옛골로 하산할 수 있음을 부언했지만 딱 부러지게 응하지 않고 가는 데까지 가보잔다. 매봉(해발 583m)에서 숨을 돌리며 쥐가 오른 계원이의 다리를 풀어주고 이어 매바위에서 1240계단을 내려선다.
돌문바위에는 청계산 정기를 듬뿍 받아가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다. 지니고 있는 정기나마 흘리지 않고 남은 길을 가면 다행이다. 그 마지막 힘을 뽑아 원터고개를 지나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옥녀봉(해발 376m)까지 내달았다.
전국 수많은 산에 옥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있다. 내려오는 전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청계산의 옥녀봉은 봉우리 모양이 예쁜 여성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소엔 그런 것도 같았는데 오늘은 옥녀봉의 미모가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과천정부청사, 경마공원 등 과천시 일대를 내려다보고 마지막 하산 길에 접어든다. 서서히 서녘으로 붉게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다. 화물터미널 갈림길을 지나 통나무계단을 내려서면서 양재동 화물터미널 날머리에 도착한다.
“실로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어. 모두들 수고했어.”
하루꼬박 걸리는 장거리산행이 처음인데도 다들 큰 무리 없이 완주했다는 게 대단하다. 비교적 빠른 보폭이었음에도 전혀 거리간격 없이 동반 완주했다는 게 놀랍다.
“그대들과 함께 5산을 종주해서 행복했고 앞으로 더욱 많은 추억을 함께 쌓아올릴 수 있어 행복하다네.”
친구들의 뿌듯한 표정을 보면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젖어 양재동으로 간다.
“오늘 같은 날 뒤풀이를 빼먹을 순 없겠지.”
국사봉 거쳐 이수봉 지나도록 햇살 아직 뜨거운데
매봉 아랫길 일천이백사십계단 밟아 옥녀봉 이르니
희뿌연 하현달 놓칠세라 에메랄드 황혼 뒤쫓누나.
이른 초저녁별 물 양으로 산새 한 마리 공중으로 치솟더니
막 지나온 옥녀봉 서둘러 어둠 뿌려 날머리마저 지우누나.
어둠 가린들 그 산 그대로인 걸
세월 흐른들 갈 산 거기 그대로인 걸
내키면 신발 끈 조여매고 나서면 반기는 곳
거기가 산,
거기가 희망,
거기에 바로 추억 있지 아니하던가.
때 /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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