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금초 시인의 <남도석성>
조 동 화 (시인)
윤금초 시인은 1943년(임오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갑길리에서 출생했다. 고향의 화산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부문에 입상하고, 1967년 <내재율(內在律) 3>으로 『시조문학』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여 문단에 데뷔했으며, 이듬해에는 시조 <안부(安否)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1968년 2월 20일 김영신(金榮信)과 결혼하여 2녀 1남을 두었으며, 한국복음신보사와 동아출판사 편집기자를 거쳐 대한가족계획협회 출판과장을 두루 역임하면서 1974년 한국잡지기자 특별상을 수상했다. 1977년 시집 『어초문답(漁樵問答)』(지식산업사 간행)이 구상, 정한모 선생 등의 심사로 제2회 <흙의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으나, 당시 문공부장관 김성진씨가 이 작품을 두고 “역사를 빌어 현실을 풍자했다.”는 이유를 제기하여 취소되었다. 장편시조 『어초문답』은 당초 <비황정책>, <탈놀이> 등4편 21수로 구성했으나 나중에 제목을 『청맹과니의 노래』로 바꾸고 <쑥대머리>, <사물놀이>, <지오귀새남> 등 전체 9편 37수로 재구성하였다.
1980년 에세이집 『갈봄여름없이』(어문각)를 상재했고, 1983년 박시교, 이우걸, 유재영과 함께 4인 시조집 『네 사람의 얼굴』(문학과지성사)를 간행했으며, 1986년 정운문학상, 1991년 민족시가대상을 각각 수상했다. 1992년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고, 1993년 시조집 『해남 나들이』(민음사)를 간행했으며, 이 해에 옴니버스 시조(평시조, 사설시조, 엇시조 등 시조의 다양한 형태를 아우른 혼합작품) <주몽의 하늘>로 제12회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다.
1995년 이우걸과 함께 5인 시조선집 『다섯 빛깔의 언어 풍경』(동학사)을 엮었으며, 1998년 『시조 짓는 마을』<삶과 꿈)을 간행했다. 1999년 고정국, 오종문, 이달균, 이재창, 전병희, 홍성란 씨를 선정, 6인 시조선집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창작과 비평사)를 펴냈고, 이 해 6월에 조선일보 방일영문화재단 저술 ․ 출판 지원금을 받는 한편, 11월에는 문학사상사 주관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29번째 시조집 『땅끝』(태학사)이 나왔고, 이 해에 제11회 이호우시조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어서 이듬해 고산시조문학대상을 수상했다. 2003년 시조집『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고요아침)와 시조창작 길라잡이『현대시조쓰기』(새문사)를 간행했고, 2004년 생애 다섯 번째 시조집인 『주몽의 하늘』을 간행했으며, 2010년 시조시인 14인의 현대사설시조를 수록한 현대사설시조포럼 앤솔로지『들깨방정 참깨방정』을 엮어내고 있다.
윤금초 시인은 창작활동이나 저술활동 외에 문단활동도 활발해서 <오늘의 시조학회회장>, 한국프레스센터 언론인 연구 ․ 집필위원 등을 역임했고, 후진양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 중앙일보사 중앙문화센터 시조창작교실에 출강한 바 있으며, 근년에는 민족시사관학교를 개설하여 시조창작법을 강의, 해마다 신춘문예 등을 통해 적지 않은 시조시인들을 배출해오고 있다.
새벽 햇살이 노란 손길로
동쪽 성벽 보듬기 시작한다.
들일 나가는 남정네들
누렁소 방울 울리고
바람결 해자에 앉아
넘실넘실 조리질 한다.
성안엔 잉걸불 째작거리고
뽀얀 안개 혀를 내민다.
가옥 40채 끈으로 묶듯
빙 둘러 감싼 남도석성
뒤뜰엔 무성히 자란
적막만이 서성거린다.
흰 발굽 굴리며 오는
저 파도 푸른 갈기,
몽골군 조랑말인가
용장산성 기어오르고
갯벌로 밀려난 마을
다시래기 소리 익는다.
물푸레 덜 여문 뼈를
매만지며 살고 있는
배중손 후예 눈빛 속엔
불타는 숲 담았을까.
삼별초 부활의 아침
인동 잎도 실눈 뜬다.
―<남도석성> 전문
우선 이 작품을 텍스트로 정하기 전 필자는 시인의 어느 작품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꼬박 사흘을 고심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작품들이 투철한 실험정신에 입각하여 쓴 작품이 한둘이 아닌데다, 작품들의 내용의 진폭이 다른 시인들에 비해 클 뿐만 아니라, 난해성 또한 예사 범주를 넘어서는 것들이어서 근시안적이고 일천한 필자의 비평안(批評眼)으로서는 쉬 감당할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안부(安否)>를 대상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라면 월남전에 대해서 필자 스스로도 알 만큼은 아는 바이고, 내용의 전개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아 그런 대로 아주 허무맹랑한 글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얼마간의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작품으로 동아일보에 2년 연속 투고하여 낙선과 당선을 반복했다는 에피소드도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인데다 그동안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작품이라 독자들이 식상할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쳐 부득불 다른 작품을 물색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뇌리에 떠오른 작품은 제12회 중앙시조대상 수상작으로 시인 스스로 창안한 옴니버스시조인 <주몽의 하늘>이었다. 전대미문의 실험의식, 웅혼한 고구려의 기상을 거뜬히 시화해낸 시인의 비범한 시적 역량,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구석 이완되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 등 이 작품은 많은 장점을 지녔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옴니버스시조라는 것이『시조21』의 편집방향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될 뿐만 아니라, 필자 개인이 가진 시조의 형식에 대한 소신에도 조금은 거리가 있어 이 작품 역시 논외로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고려해본 작품들은 <내재율(內在律)>이라는 이름으로 노래한 일련의 연작시들이었다. 이들은 초기에 시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시편들로 비유들이 참신한 수작(秀作)들이지만, 이 역시 내용의 비약이 예사롭지가 않아 무딘 붓끝으로 세세히 분석하고 감상하기에는 스스로 역부족임을 자인(自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저런 의미에서 결국 <남도석성>을 텍스트로 하기로 최종 결정을 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이 작품은 얼마간의 파격이 보이기는 하나 엇시조나 사설시조로 불릴 만한 정도는 아니고, 내용면에서도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난해성이 적어 내용의 거의 전부가 필자의 가시권 안에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우를 면할 수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의도하는 원고 분량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안성맞춤이었음에랴.
이 작품의 출전은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29 윤금초 시조집『땅끝』이다. 이 시집 48,49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 <남도석성>에 주(註) 표시가 있고, 말미(末尾)에 “남도석성은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다. 고려시대 몽골 침략군에 맞서 저항했던 배중손 장군은 이 석성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 끝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라는 주가 붙어 있다.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29 윤금초 시조집『땅끝』에는 모두 70편의 작품들의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으나, 참고로 수록 작품들을 형식면에서 분류해 보면, 평시조 단수가 3수, 두 수로 된 연시조가 25수, 세 수로 된 연시조가 12수, 네 수로 된 연시조가 4수, 다섯 수로 된 연시조가 3수, 사설시조가 6수, 옴니버스시조가 17수로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간단한 분류만으로도 우리는 시인이 가장 선호하는 형식이 두 수의 평시조로 된 연시조이고, 두 번째로 선호하는 형식이 옴니버스시조이며, 세 번째로 선호하는 형식이 세 수의 평시조로 된 연시조임을 확인하게 된다.
목도하는 바대로 이 작품 <남도석성>은 네 수로 된 연시조로 기승전결의 안정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도 이렇다 할 난해한 부분은 없다.
[우선 첫째 수는 남도석성의 희망찬 아침의 모습이다. 노란 새벽 햇살이 동쪽 성벽에 당도하면, 들일 나가는 남정네들의 모습 뒤로 누렁소들의 워낭소리가 번쩍이고, 신선한 아침 바람이 해자 근처에서 조리질하듯 노닐고 있다.
둘째 수는 바로 그 시각 성안의 정경이다. 아직도 오히려 안개 속에 묻힌 집집의 아궁이들에선 밥을 짓거나 쇠죽을 쑨 뒤 남은 잉걸불들이 째각거리며 잦아들고 40여 채의 가옥을 품에 안은 남도석성은 흡사 폭풍전야와도 같은 정적에 휩싸여 있다.
셋째 수는 역시 그 시각 앞바다의 모습이다. 꼭 푸른 갈기를 세우고 흰 발굽을 차며 달려오는 것만 같은 파도, 파도……. 다시 보니 영락없는 몽골군의 조랑말 떼가 되어 용장산성을 기어오르는 것만 같은데, 그 드센 기세에 당하지 못하고 갯벌로 밀려난 마을은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다시래기(전라남도 진도지방에서 출상(出喪)하기 전날 밤 초상집에서 상두꾼들이 벌이는 민속놀이) 노랫소리에 잠긴다.
넷째 수는 항몽(抗蒙)의 아픈 역사는 흘러갔어도 부활하는 국토수호의 의지이다. 그냥 무지하고 무력한 농민들이 아니다. 삼별초의 부활을 꿈꾸며 물푸레나무처럼 청청한 기상을 간직한 배중손 장군의 후예들! 그 곁에 모진 겨울을 이겨낸 인동 잎도 파릇이 새 눈을 뜬다.]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작품의 소재는 제목이 보여주는 그대로 “남도석성”이며, 주제는 “항몽의 현장에서 다짐하는 국토수호의 의지” 정도로 보아 그리 큰 착오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이 작품의 표현 기법이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사물의 의인화이다. 전체적으로 일별해 보면 “새벽 햇살, 바람결, 잉걸불, 적막, 파도, 인동 잎” 등이 모두 의인화되어 작품에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둘째 수 중장에서 직유법이 한 번, 셋째 수 중장과 넷째 수 중장에서 설의법이 각각 한 번씩 구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품 <남도석성>의 언어구사는 시인의 작품 <안부(安否)>나 <땅끝> 등의 작품에서처럼 그리 세련된 편은 아니다.
선불 맞은 짐승처럼 파닥이는 나비 죽지,
한 떨기 목숨 가누어 내젓는 기구의 손,
그 무슨 깃발을 안고 너는 끝내 포복하나.
―<안부(安否)> 넷째 수
상아질(象牙質) 큰 부리에
선지빛 깃털 물고
햇살 무동 타고
미역 바람 길들여 오는,
잉걸불
발겨서 먹는
그 불새는 여자였다.
―<땅끝> 셋째 수
보다시피 이 경우들은 그 언어들이 얼마나 현란하고 리드미컬하게 짜여 있는가. 그리고 또 얼마나 가볍고 가뭇없고 날렵한가! 이에 비해 <남도석성>의 언어구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읽는 이에게 오히려 다소 서툴고 어눌한 맛을 느끼게 한다. 아니, 무겁고 둔중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는지 모른다. 바로 이 특유의 투박한 어법을 통해 <남도석성>은 삼별초 배중손 장군의 후예들의 모습과 삶을 대상에 딱 포개지도록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조선대부속고교에 다니던 중 헌책방에서 구한 『한국문학선집』에서 김동리 선생의 소설과 서정주 선생의 시를 읽고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서라벌예대에 입학하고 나서도 시보다는 소설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박목월 선생이 시인의 시가 시보다는 시조의 호흡에 가깝다며 시조를 쓸 것을 충고했으며, 아울러 선조인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제1인자 윤선도에 대한 의무감 같은 감정도 두루 복합작용을 일으켜 마침내 시조시인에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시인 스스로 술회한 바가 있다. 수필가 윤오영이 소설을 전공하다가 그의 원고를 본 춘원 이광수 선생으로부터 소설보다는 수필을 쓰라는 권고를 듣고 결국 방향을 바꿔 수필가로 대성했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거니와, 시인이 박목월 선생의 충고를 듣고 순순히 그때까지 오던 길을 버리고 시조시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성했음은 여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니다. 춘원과 목월 두 분의 조언이 자칫하면 이름 없이 묻힐 수도 있었을 윤오영과 윤금초라는 빼어난 두 사람의 문인을 성공적으로 키워냈기 때문이다. 쓴 글만 보고도 그 소질과 역량을 정확히 헤아려 먼 앞날을 내다본 두 분의 혜안에 범인으로서는 그저 탄복하는 수밖에…….
가 이를까, 이를까 몰라/ 살도 뼈도 다 삭은 후엔// 우리 손깍지 끼었던 그 바닷가/ 물안개 저리 피어오르는데,// 어느 날/ 절명 시 쓰듯/ 천일염이 될까 몰라.
이 작품은 시인이 <천일염>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단수이다. “가 이를까, 이를까 몰라”라는 초장의 느닷없는 내디딤도 비범하고 “어느 날/ 절명 시 쓰듯 천일염이 될까 몰라.” 라는 마무리도 완벽하다. 이런 역량과 언어의 운용이라면 평시조의 정형의 틀 안에 고분고분 머물러도 그의 문학적 업적은 남이 쉬 이루지 못할 그것에 이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정해진 틀 안에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타고난 그의 반골 기질이 안에서 그를 끊임없이 부추겨온 것이다. 아마도 시인이 고려시대 노비 만적으로 태어났더라면 그 역시 순정이놈 같은 배반자의 밀고로 잡혀죽을지언정 고분고분 그 제도 안에서 순응하지는 않았으리라. 오히려 그는 틀림없이 주변 세력들을 규합하여 거사를 꾀했으리라. 그러나 이 시대는 주변 세력을 규합하여 거사를 일으킬 만한 시대가 아님으로 해서 시인의 반골 기질은 자연스럽게 그가 몸담은 사회 내지 문단을 뒤엎는 거사 대신 시조라는 정형률을 이리 뒤집고 저리 비틀며 자재(自在)하게 넘나드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얻어야만 했다. 곧 시조의 3장6구를 제한이나 구속이 아닌 변화와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삼은 그 일 말이다.
시조의 정형률을 가능한 한 지키려는 쪽이나 이리저리 변화를 꾀하려는 쪽이나 그 공통점은 우리 시조를 더 좋은 그릇으로 만들겠다는 데 목적이 있음은 자명하다. 그것은 시조시인 모두가 더 완벽한 민족문학을 이룩하겠다는 충정에 차 있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능히 증명이 된다.
윤금초 시인이 창안하고 스스로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옴니버스시조 운동, 이미 상당수의 시조시인들이 그의 이런 헌신적 실험에 동조하여 오니버스시조를 시조집 한 권에 몇 편씩은 시도하고 있음이 목격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시조단의 상당한 중진에서부터 신진을 불문하고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은 시조시인 가운데 절대다수가 시조의 정형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그의 옴니버스시조라는 것도 여기에서 그친다면 찻잔 속의 태풍이 되고 말 가능성이 없잖아 있다. 결국 옴니버스시조의 성공과 실패는 이후에 얼마만한 시인들이 동조할 것인가 여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옴니버스시조가 시조 속의 한 장르로서 우뚝 서느냐, 시조의 현재의 정형률을 더욱 굳히는 역설적(逆說的) 결과를 초래하고 마느냐는 역사가 스스로 결정하게 되리라,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출처] 윤금초 시인의 <남도석성> / 조동화|작성자 시조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