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일번지 남포동과 광복동, 국제시장, 그리고 자갈치 시장을 지나면 충무동이 나온다.
충무동은 자갈치 끝자락에 위치하며 로타리 주변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동신버스’라는 시외버스 터미널(차부)이 위치하여 마산이나 김해 등지로 갈려면 이곳에서 차를 타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중간 정류소도 있었지만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터라 특히 명절이면 출발지에서 승객이 이미 만원이기에 중간 정류소에서는 탈 엄두도 못냈다.
충무동 로타리에서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은 송도 아랫길이라 칭했고, 위쪽 방향에는 송도 윗 길이라 했으며, 일본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전국 3대 사창가인 완월동을 지나면, 남부민동이 나오고 좀 더 가면 송도 해수욕장에 다다른다.
송도 아랫길로 가면 해양고등학교(지금은 없어짐)와 대형냉동창고회사 등이 즐비하고 역시 송도 해수욕장과 만나게 된다.
송도 해수욕장 초입에는 횟집 촌이 형성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시민이나 관광객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에 회를 맛볼 수 있어 늘 인파가 붐비기도 한다.
송도 해수욕장은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해수욕을 못 할 정도로 물이 오염되었다.
부산시민들의 정화조 폐수와 생활폐수들의 찌꺼기가 물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현재의 송도 해수욕장은 그동안 서구청에서 대대적인 개선작업으로 명소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오랜 기간 노력한 결과로 180도 변신한 송도 해수욕장은, 과거에는 거북이 섬과 호텔을 연결하는 구간이 짧은 케이블카가 있었으나 철거했고, 이후에 다시 복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엄청난 사업비가 투입된 케이블카는 그 모습만으로 대단하다는 것과 누구나 타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말로 설명이 부족하여 사진을 첨부한다.
거북이 섬에서 해변을 더욱 가까이 볼 수 있는 스카이 워크, 구름다리, 송도 해수욕장과 산 고개를 한번 넘으면 나오는 혈청소까지 해변을 따라 연결된 산책로는 낭만과 추억을 고스란히전해 주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명소라고 자부한다.
혈청소를 지나면 암남공원이 나오고 그 아래에는 바다를 매운 공터가 나오는데 강태공들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낚시꾼들이 진을 치는 곳이다.
다시 송도를 돌아오면 중학교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당시 필자가 살아온 수기(수필형식)에서 언급했듯이, 부친의 사업실패로 정규 학교가 아닌 근로자들을 위한 중학교를 다녔기에 보통의 아이들보다 1~2살이 많은 누나들과 동급생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동급생이기에 존대는 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송도 해수욕장 진입 전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면, 부산 은행이 있었으며, 골목을 따라 약 300 미터 정도에 일본인이 지은 2층 목조건물이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오면 2층 끝 집은 중학교 3학년 시절 필자가 짝사랑(?)하는 숙희라는 여학생(필자와 나이가 동갑으로 알고 있었으나, 한 살 많은 연상으로 밝혀짐)의 집이 있었다.
겨울방학 시절 난 숙희와 진지하게 사귀고 싶어 주로 편지를 보내곤 했지만 답장은 없었다.
10번째 정도 답장 없는 편지를 보내고 포기를 하려는 동안 드디어 기다리던 꽃 편지 봉투에 두툼한 편지가 당도했다.
받는 사람 이름 밑에는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으며(당시에는 여학생들의 편지에는 마치 유행처럼 이러한 문구를 주로 사용했다는 걸 뒤에 알게 되었다.)
필자는 숙희를 더욱 착한 마음씨의 여학생으로 생각했으며, 누가 볼 새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당시 편지는 주로 3~4일에서 늦으면 1주일도 넘어 배달되었기에 약속을 정할 때는 약 15일 전에 편지를 보내야만 했다.
필자가 편지를 받은 날은 숙희가 편지를 쓴 지 10일 후임에도 늦게 도착하여 편지를 받는 날 자신의 집으로 놀러 오라며 상세하게 약도를 그려 넣었다.
오전 10시경 책을 보다가 편지를 받고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버스 정류소로 달려갔고,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 두 번이나 갈아탔기에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당도 할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와 숙희를 부르는 순간, 반 여학생들이 다 함께 모여 문을 열고는 늦게 도착한 날 놀려대기 시작했다.
필자는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있었고, 그러자 숙희 어머님께서 오늘 우리 딸 생일에 와 줘서 고맙다고...
필자는 생일임을 모른 체 무작정 달려와 선물은 고사하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비조차 없었다.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임을 안, 숙희는 “부담 주기 싫어서 말 안했다”며 “생일에 맞춰 와주어 너무 감사하다고...”
시간이 흘러 반 여학생들이 모두 떠나자, 숙희는 해변을 좀 걷자며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숙희는 겨울바다의 찬바람 속에서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로 “난 너보다 한 살 많아, 그러니 누나라고 해”라며 “우리는 사귈 수 없어, 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가 좋아”라는 말을 던지곤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섰다.
당시에는 숫기도 없었고 어찌할 방법조차 모른 체 멍하니 서 있다가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상명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필자는 군대 제대 후 우연히 만나게 되어 차 한잔 마시며 지난날을 얘기하며 헤어졌다.
서로가 그때를 생각하며, 마냥 웃다가 시간을 보내고는 작별한 후 지금까지 연락도 없이 잊고지낸다.
잠깐 지난날의 추억 이야기로 부산 갈매기 3부가 다른 곳으로 흘러간 것 같아 양해를 구한다.
부산 갈매기 4부는 다음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