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만나다
박갑순
30년 만에 아버지를 다시 뵈었다. 얼마나 더 늙으셨는지, 이제는 새 옷도 입으셨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오랜 이별 뭉뚱그려 하얀 사기함에 고이 모셔진 아버지. 가뭇없이 흘러버린 세월만큼이나 눈물도 말라서 그저 먹먹한 가슴으로 맞이했다.
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장화를 신고 마당으로 들어서던 아버지는 늘 지쳐 있었다. 주름 깊은 이마엔 땀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고, 턱엔 미처 뽑지 못한 들판의 풀처럼 수염이 거칠었다. 씻을 생각도 못 하고 토방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 동안 한숨을 내쉬다가 주문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힘든 아버지 일을 제대로 거들지 못하는 약골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었다. ‘다른 집 여자들은 일만 잘하도만….’ 그럴 때면 어머니는 죄인처럼 숨을 죽인 채 정성껏 저녁상을 차렸다. 그러나 어쩌다 어머니가 힘에 부치는 일을 할라치면 팔을 걷어붙이던 아버지는 깊은 속정을 간직한 분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남의집살이로 가계를 꾸렸던 아버지는 자식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우리가 잠든 후에 오셨다가 날이 밝기 전에 나가곤 했다. 그래도 생활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언젠가 어떤 선생님이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했을 때 정말 화가 많이 났다. 아버지는 게으를 틈 없이 일했고, 그러면서도 평생 가난했기에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비가 오면 짚으로 새끼를 꼬거나 동생들 팽이를 만들어주고 자치기용 막대를 만들어주셨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애틋한 사랑이었다. 하나뿐인 딸인 내게는 언제나 ‘우리 고명딸’이라며 꼬깃꼬깃 접힌 용돈을 남몰래 쥐어주곤 했다.
시래기된장국에 시어빠진 김치가 전부인 밥상이어도 싫은 기색 없이 고봉밥을 맛있게 드셨던 아버지. 어쩌다 들일을 마치고 술 한잔 마신 날은 세상 어떤 아버지보다 당당하게 어깨가 떡 벌어졌다. 좁은 골목을 박달재를 넘듯 넘어와서 술기운이 가실 때까지 「번지 없는 주막」과 「타향살이」를 반복적으로 부르셨다.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했던 온갖 시름을 노래로 풀어내는 그 시간. 구성진 노랫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던 게 엊그제만 같다.
남편의 회갑 기념 가족여행 중 또 한 번 아버지를 만났다. 살아 계신다면 영락없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딸들이 코로나로 위험한 시기라고 패키지로 준비한 여행이다. 미니버스에 우리 가족만 타고 다녔다. 제주 토박이라는 가이드는 어림잡아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아빠였다. 한곳이라도 더 보고 가라고, 남들이 해보지 않은 것들 해보라고, 나름의 노하우를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성실한 아버지였다. 인생샷을 담아주겠다고,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젊은 아버지. 무거운 지게를 짊어지고도 달음질치던 아버지가 오버랩되었다.
숙련된 가이드에게서 성실한 아버지를 회상하며 여행을 즐기는 나와 달리 남편은 고생해서 번 돈을 여행으로 써버리는 것이 안타까워 가는 곳마다 잔소리였다. ‘너무 비싸다, 조금 싼 것 시켜라, 아껴 써라.’ 좋은 날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편은 틀림없이 돌아가신 내 아버지였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흔쾌히 써보지 못했던 아버지.
어머니는 젊은 날 남의집살이에 매여 한 달에 두 번 손님같이 다녀가던 남편과 죽어서라도 부부의 정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유언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나 죽으믄 니 아버지랑 같이 화장혀서 아무디나 뿌려버려라잉.’ 두 분을 나란히 서남권추모공원에 모셨다. 210구역 99, 100번.
엄마 삼우제날 추모관에 넣을 사진을 준비하는데 아버지 사진이 없어 할 수 없이 내 결혼식 날 혼주석에 앉아 계신 사진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고사하고 양복도 그날이 처음이라 남의 옷 빌려 입은 듯 어색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함에 담긴 아버지를 보는 순간, 엄마를 보내드려야 하는 슬픈 마음에 평안이 깃들었다. 삼십 년이나 먼저 가서 사후세계의 생활을 계획하신 아버지. 이승에서 한 번도 호강시켜주지 못한 아내를 위해 저승에서의 삶은 부족함 없이 준비하셨으리라 믿는다.
약력
1998년 《자유문학》 시, 2005년 《수필과비평》 수필 등단
수필집 《꽃망울 떨어질라》, 시집 《우리는 눈물을 연습한 적 없다》
동시집 《아빠가 배달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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