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최씨는 한국과 중국에서 저성(著姓)이다. 물론 성씨 역사가 깊은 중국에 먼저 최씨가 있었고 한국인이 중국최씨를 인용(引用)했거나 혹은 중국최씨가 한반도로 이주해 와서 한국최씨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최씨는 인구 약 350만(0.28%)으로 인구순위 60번째 정도에 불과한 그다지 크지 않은 성씨가 되어버렸다. 거기에다 동북지방 조선족(朝鮮族)을 한국최씨에 포함 시킨다면 혈통적(血統的)으로 두 나라 최씨 인구는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중국최씨는 고대의 저성으로 “북방 호족의 우두머리(北方豪族之首)” 또는 사해대성[1]으로 불려 왔다. 중국최씨는 크게 나누어 청하최씨(淸河崔氏)와 박릉최씨(博陵崔氏) 계열이 있는데, 청하최씨는 당나라(唐)에서 재상(宰相) 28명이 나온 이른바 사대군망(四大郡望)으로 칭송되었다. 현대 저명인사로 주미중국대사를 지낸 최천개(崔天凱, Cui Tiankai)가 있다.
최씨로서 최초로 역사책에 등장한 인물은 최요(崔夭)로 춘추시대 제나라(齊) 귀족이다. 『춘추좌씨전』<희공 28년(BC632)>에는 “제나라 국귀보와 최요는 진나라 소자 은과 함께 성복에 부대를 주둔시켰다.”{영인} 라고 적혀 있다. 진(晉), 송(宋), 제(齊), 진(秦) 등 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楚)와 싸운 이른바 성복전투(城濮戰鬪)를 기록한 부분으로 최요는 제나라 대부(大夫)로서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중국 전설상 실존 인물 강태공(姜太公)이 고향인 제나라(齊, 산동성) 제후(諸侯)로 책봉되어 시조가 되었는데 아들 정공(丁公) 급(伋)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다. 정공의 장남 계자(季子)는 제후 자리를 동생 을공(乙公) 득(得)에게 양보하고 최읍(崔邑)으로 물러나서 살았는데, 후손들이 최읍의 이름을 따서 최(崔)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전해 온다.
최읍과 관련하여 『사기』<제태공세가 경공 원년(BC547)>에는 “태자 최성이 최저에게 요청하기를 ‘최읍에서 늙어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 최저는 허락했으나 재상 두 사람이 말하기를 ‘최읍은 최씨 종읍(본거지)이므로 안 된다.’ 라고 했다.”{영인} 라고 적혀 있고, 또 “[두예[2]가 주석하기를 ‘제양(제남) 동쪽, 조양현 서북쪽에 최읍이 있다.’]했다.” {영인}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나라 실권자 최저(崔杼, ?~BC 546)의 아들 최성(崔成)이 죄를 지어 쫗겨나게 되었는데, 최저에게 최읍에서 늙어 죽게 해 달라고 하므로 최저는 허락했으나 주변에서 최읍은 최씨 본거지(宗邑)이므로 허락할 수 없다 하여 실패했다는 것이다. 최읍이 “산동성 빈주시 추평현 위교진 최팔촌”[3]이라는 주장과 “제남시 장구구 황하진 토성촌”[4]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중국 최씨들이 최팔촌을 최읍 옛터라면서 성역화하고 있다.
강태공(BC1211~BC1072)은 이른바 궁팔십달팔십[5] 했다는 전설 속 인물인데 『사기』<제태공세가>에는 “태공망 여상은 동쪽 바닷가 출신이다. 그 선조는 일찍이 사악(벼슬)으로 우왕을 도와 물과 땅을 정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순임금과 하나라 때는 여(지명)와 신(지명)의 제후에 봉해지기도 했고 성을 강씨라 했다. 하나라와 상나라 때는 신과 여에 방계 자손이 제후로 봉해지기도 하고 평민이 되기도 했는데 여상은 그 후예다. 본래는 강씨이었지만 책봉 받은 땅 이름을 성으로 삼아 여상이라 했다.”[6] 또 주석하여 기록하기를 “[『여씨춘추』에는 동이족이라 했다. 또 삭은과 초주는 말하기를 성은 강이고 이름은 아다. 염제(신농씨) 후예이며, 백이의 후손이다. 라고 했다.]”[7] 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이 천년도 더 이전에 살았던 강태공에 대하여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었겠는가? 특히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는 전설상 신(神)으로 인간이 아니다. 이는 모두 전해오는 전설을 기록했을 뿐이며, 전설 속에는 자신의 조상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많이 섞여 있을 것이다.
강태공은 강씨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씨로 바꾸어 여상(呂尙)이라고 한다. 이는 자신의 사회적 위상(位相)에 따라 성을 마음대로 바꾸는 귀족성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또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나라 태공(周太公)이 만나기를 바라던(望)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강(姜), 여(呂), 정(丁), 최(崔), 등 자그마치 102개 성씨가 모두 강태공 후손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 역시 자기 성씨의 역사를 유구하게 만들려는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매년 양력 9월 12일(강태공 생일)이면 강태공 후손이라는 사람 3000여 명이 산동성 치박시 태공광장에 모여 제사를 올리는데 한국인도 300여 명 참석한다고 한다.
강태공은『여씨춘추』,『사기』등 역사책에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매우 황당하여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어리석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각주 ------------------
[1] 四海大姓. 세상에서 가장 큰 성씨.
[2] 杜預(222~285)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魏) 정치가.
[3] 山東省滨州市鄒平縣魏橋鎭崔八村.
[4] 山東省濟南市章丘區黄河鎭土城村.
[5] 窮八十達八十. 궁벽하게 80년을 살고 영달하며 80년을 살았다는 전설.
[6] 太公望呂尚者東海上人其先祖嘗為四嶽佐禹平水土甚有功虞夏之際封於呂或封於申姓姜氏夏商之時申呂或封枝庶子孫或為庶人尚其後苗裔也本姓姜氏従其封姓故曰呂尚.
[7] 集解呂氏春秋曰東夷之士O索隠譙周曰姓姜名牙炎帝之裔伯夷之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