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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크게 두 가지 억을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평생 도덕철학을 연구했고 도덕철학자로 인식해주길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은 그를 도덕철학자가 아닌 경제학의 아버지로 추앙했습니다. 1776년 3월 9일 출간된 자본주의의 교과서가 된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기주의자를 옹호하고 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하여 시장의 자유를 절대 지키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핵심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은 애덤 스미스를 서양 도덕의 아버지로 그의 유언을 받드는 글이자 책 소개입니다.
바로 두번 째 억울한 점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Indivisual Hand)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언급이 두 번 있습니다. 시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가에 의해 작동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건강한 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지 않도록 그래서 인간의 이기를 경계하고 도덕심과 자비심이 필요하다고 한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과 많이 다르지요? 그 만큼 애덤 스미스의 책들은 읽기가 어렵고 빨대로 세상을 보는 흉악한 자들에게 대중을 교란시키는 용어로 둔갑합니다. 지금도 애덤 스미스를 검색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제일 먼저 검색됩니다.
저는 십수년 전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사기당했습니다. 감언이설에 속아서 그야말로 쪽쪽 빨렸습니다. 경제적 손실도 컸지만 가정의 해체는 정말 고통 받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책에 집착하고 중독되었던 이유가 중독되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일까를 찾다 도서관에 처박혀 쟝르에 상관없는 독서를 하기 시작한 이유였습니다.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몰랐을까? 등신아!!!!!!
거기서 얻은 답이 내가 아는 게 정답일까?
내가 지금 확실에 찬 신념이 정답일까?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정답일까?
내가 지금 매 순간 행하는 선택과 결정이 정답일까?
나는 왜 그때 그 많은 돈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투자를 결정했을가? 한 두 번도 아니고?
답은 내게 무분별하게 전해지는 정보의 질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답도 모르면서 거금을 상대를 맹신하고 것낸 것이었습니다.
답은 탐욕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예고없이 날라온 미국 프라임모기지사태!
그에 대한 댓가는 차라리 세상과 연을 끊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 뿐이었죠!
그러나 제 옆에 세상 물정 모르며 새근새근 자고 있는 딸을 보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3천 억을 목표로 경제인으로 살았으니 3천 권을 목표로 책을 읽어갔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듣고 계시는 정보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그에 대한 강한 도전을 준 책이 바로 아래의 대니얼 카너먼의 공저 『노이즈 Noise : 생각의 잡음입니다』 부제 : 생각을 조종하는 생각의 함정
내가 듣고 있는 정보가 선한 의도에 의한 사운드인가 악한 이들이 꾸며낸 사운드를 가장한 잡음인가? 나는 사운드와 이즈를 구분하는 능력이 있는가?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이 경제학에서 정의하고 규정한대로 이기적인가?에 대해 도전을 한 심리학자였습니다. 게임이론을 통해서 말이지요!
저는 인간본성에 대해 제 평생을 연구해왔습니다. 결론은 이기적인 인간과 이타적인 사람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은 더욱 이기적으로 유전자가 진화해 왔고, 이타적인 사람은 이타적으로 더욱 유전자가 진화해왔습니다.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이유는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손해를 보면서도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님들 글 길게 쓰면 안읽으시는 데 오늘도 어쩔 수가 없군요!
경제학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많아집니다.
서양의 자사(子思), 애덤 스미스 – 도덕을 말하다
자사(子思, B.C483~B.C402)는 공자의 손자이다. 사서(四書)인 논어, 맹자, 대학, 중용(中庸) 중 중용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제자가 되어 유학의 명맥을 이어 나가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중용이라는 책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사람됨의 철학이자 도덕 교과서이다. 중용이라는 책을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들은 도올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과 멋』을 읽어보길 권유한다. 도덕(Moral)이 유럽사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초창기 영국에서다.
영국에서 경제학이 태동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를 꼽자면 식민지 찬탈을 합리화, 명분화하기 위한 동인도 회사(1600~1874)의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의 계몽주의 시대 데이비드 흄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정치경제학자였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 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경제학 저술인 1776년 출판된 『국부론』보다 먼저 출간된 책이 있었다. 바로 1759년 『도덕 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출간한 도덕철학자이기도 하다.
성균관대 경제학부의 김광수 교수는 애덤 스미스가 교수로 재직했던 글라스고 대학에서 1994년 『애덤 스미스의 형이상학과 과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애덤 스미스 전문가로 2016년 『도덕 감정론』을 번역 출간하였다.
두 번을 읽어보았으나 그 내용이 심오하고 난해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학자 중에서 이 책을 완독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이 책을 읽었다면 경제학이 소인지학(小人之學)으로 가치 추락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책의 내용을 직접 옮겨 보겠다.
“스미스는 전 생애에 걸쳐 두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글래스고대학에서 도덕철학 교수로 재임하는 동안 윤리학 저술로 『도덕 감정론』을 출간해 당시 유럽 대중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스미스의 윤리 이론은 도덕적 선(善)과 좋은 삶이 평범한 인간의 내재적 본성, 사회적 본능인 동감(同感, sympathy)의 작용에 따라 실현되고 점차 고도화된다고 본다. 예부터 동서양의 도덕 철학자들은 시대별로 강조점은 조금 달랐을지라도 덕목을 실천하라고 꾸준히 권고해왔다. 물론 이것은 사회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안정과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도덕철학자로서 스미스에게 도덕적 선(善)은 사람들의 본성이나 일상생활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도덕적 선은 평범한 인간의 자질을 초월한 그 무엇이 아니라 각 개인의 본성에 내재 되어 있으며 성장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선의 원리는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가운데 발견될 수 있고, 덕목은 낮은 차원의 미덕에서부터 높은 차원의 최고선까지 위계를 지닌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수양이 필요한 최고선과 숭고한 도덕성은 가장 큰 행복을 주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덕목은 아니다.
범부들이 각각의 처지와 환경에 걸맞는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 세상사에서 필요하고 나름대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도덕 감정론』의 가장 명시적 목적은 도덕의 세계를 인간 본성에 의거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과 세상사를 인과관계에 따라 이해하려는 과학적인 태도를 취했을 때 세상이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덕목을 배양하고 도덕성을 우아하게 가다듬는 데도 유용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스미스에게 자기애와 이기심은 사람들의 행동을 좌우하는 매우 본원적이고 지배적인 힘이다. 생존을 위한 물질 추구와 사회 속의 서로 많은 행위는 이 같은 자기중심적 본능이 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중략)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사에서 인간 고유의 열정이 중요의 습관보다는 과다한 만족을 추구함으로써 수많은 소란스러움과 악덕이 일어났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기품 있는 덕을 실천하는 사람보다는 재산과 권력을 보유한 사람을 더 부러워하고 승인하며 존경한다. 이러한 비대칭적 승인과 숭배의 인간 성향이 주변의 빈곤과 약자에게 경멸과 무시를 남발하는 태도를 이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속적, 물질적 경쟁에서 앞서려는 도덕적 타락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도덕 감정이라고 보았고, 인간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 역시 자기 절제가 스스로 가능한 도덕의 중요성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경제학은 불필요한 인간의 도덕 감정을 외면했다.
인간의 이기적 선택과 결정에 의한 모든 행위를 합리성으로 포장하여 경제학을 소인지학(小人之學)으로 격하시켰다. 애덤 스미스 본인은 마지막까지 도덕철학자로 인정받길 원했다. ‘도덕 감정론’을 여섯 차례에 걸쳐 수정 보완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완벽한 도덕철학자로 남길 바랐지만 그를 따르고 숭상하는 후대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도덕이라는 것 자체가 걸림돌이자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보이지 않는 손’과 ‘시장 지상주의’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도덕이 아닌 이익 추구의 효용(效用, utility)만이 취사 선택되었기 때문에 소인지학으로 가치 추락하였다. 그나마 현대의 경제학은 이기적 인간에서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게임이론으로 증명하면서부터 행동경제학(行動經濟學, behavioral economics)이 출현하였고, 인간은 반드시 이기적이지 않음을 바탕으로 기존 고전 경제학을 벗어나 새로운 경제학의 역사를 다시 써나가고 있다.
그 공로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이스라엘 국적의 심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대니얼 카너먼(히브리어: דניאל כהנמן, 영어: Daniel Kahneman, 1934~)과 그의 동료,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 1937~1996)가 아니었다면 경제학은 이기적인 인간들의 탐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기틀을 제공해 주는 소인지학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국제 통상법 역시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식민지 분할권을 놓고 분쟁을 줄이기 위해 태동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중남미 국가들 중 왜 브라질만 포루투갈어를 쓰는지 아시는가? 1494년 6월 7일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 유럽 외 지역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맺은 조약 때문이다.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자기들끼리 분계선을 그어놓고 오른쪽은 포르투갈 대서양 왼쪽은 스페인이 분할 통치하겠다고 자기들끼리 일방적으로 합의하여 정해 놓았다. 자기네들 맘대로 그어진 라인에 브라질 영토가 걸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브라질만이 포르투갈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현대사의 많은 분쟁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 시절을 끝낼 무렵 역사와 문화 종교, 인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국경을 그어났기 때문이다. 지도에 자대고 자기네들 마음대로 직선으로 그어났기에 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다른 사람들이 갑자기 한 나라가 되거나 이웃 마을이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다. 그러한 연유로 한나라가 된 사람들끼리 내전과 반란, 독립 요구가 빗발쳐 아비규환이 따로 없게 된 것이다. 그런 일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다.
2022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버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자국의 이익과 정치적 의도와 맞지 않으면 그냥 무책임하게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 나라 사람들은 미국이 떠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살육이 끊이질 않는다. 기원전 5세기에 노자가 도덕경(道德經)을 저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발 사람이면 사람됨의 철학과 도덕을 갖추고 살라고 말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한 나라에도 도덕적 국격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노자와 공자가 살았다고 추정되는 춘추전국시대(B.C770~B.C221)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태평성대의 주나라의 중앙정부가 힘을 잃자 각각의 제후국들은 청동기에서 벗어나 철제 무기로 무장해 정글의 법칙이 중원을 지배할 시기이다.
公正(공정)과 常識(상식)이 금수만도 못한 짐승들에 의해 변질되고 오염되고 왜곡되이 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餘韻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초보운전자가 술에 만취해서 일말의 양심도 없이 국가를 차가운 바다로 침몰시키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술 양이 점점 늘어납니다. 후한무치가 하늘을 찌르니 저 죄를 다 어찌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