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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다/이 재순(53회)
늘 가정에 등한시 했던 남편이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더욱 얼굴보기가 힘들어졌다. 일 관계로 지방 출장이 잦던 남편이 이젠 출장도 직원을 대신 보내고 골프에 미쳐서 주말과 일요일에는 아예 스크린 골프와 윈도아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필드는 한 달에 네 다섯 번은 기본으로 나가게 되면서 내 인내심에도 한계에 이르러 폭발하고 말았다.
“어우~ 곧 프로골퍼로 데뷔하시겠네.”
“꼭 그렇게 말을 해야 돼. 사업상 친다고 했잖아.”하며 미간에 내 천자를 그리며 밥도 안 먹고 안방 문을 꽝 닫으며 들어가 버렸다.
“누가 밥 안 먹으면 겁날 줄 알고.”
식탁의 그릇을 주섬주섬 싱크대에 신경질적으로 일부러 탁탁 내려놓으며 화난 마음을 입으로 계속 알아듣거나 말거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기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나는 이 집에 부엌데긴가?”
남편이 귀에 거슬렸는지 화난 목소리로 나와서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한마디만 더하면 정말 큰 싸움이 날것만 같아 일단 후퇴할 마음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남편이 안방으로 사라진 다음에야 혼잣말로 ‘흥! 뚫린 귀라고 귓구멍은 밝네.’
‘차라리 나도 자전거를 사주던가... 그럼 나도 당신 취미생활 존중해 줄 테니까.’하고 툴툴거리는게 일상이었다.
내가 자전거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당시 성남 공설운동장을 조성 할 때로 그날따라 휴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난 친구가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는 힘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탔는데, 한참을 타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혼자달리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겁이 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자전거를 멈추고 싶은데 멈출 수 가 없었다. 운동장에 있던 사람들이 내게 뭐라 소리를 쳤지만 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로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야~~부레키(브레이크)잡아 빨리.. 위험해... 그냥 손잡이 밑을 잡으라고... ” 자전거 손잡이 있는 곳을 꽉 잡는 어느 순간 내 몸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안도의 숨을 쉬는데 그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식이 되어 창피하였다.
엎어져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그때서야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조금만 더 달렸더라면 공설운동장 옆 도로로 떨어져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난 절대로 자전거를 탈 엄두도 내질 못하고 살았다.
그 후, 2000년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해, 심한 우울증으로 방구석에만 틀어 박혀 있는 내가 걱정스러웠던 이웃집에 사는 은진이 엄마는 매일 계속되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나를 설득해서 올림픽 공원까지 걸어서 함께 산책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전거를 대여하여 이십여 년만에 또다시 자전거를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그곳에서도 잘 타지 못하는 자전거를 어설프게 타다가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려는 순간 중심을 잃고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 광장 대리석 바닥에 자전거와 함께 얼굴을 쳐 박고는 쪽 뻗고 말았다.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한쪽 얼굴이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올림픽 공원 경비아저씨까지 달려 올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얼굴 반쪽이 완전 대리석 바닥에 밀려 감각이 없는 것이 순간적으로 광대뼈가 완전 주저앉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같이 간 이웃집 아줌마와 공원 경비아저씨의 다급한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렸을 즈음 주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줌마 괜찮아요? 눈은....” 행여 안경이 깨지면서 눈이라도 찔렀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내 얼굴...내 얼굴은?”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난 얼굴을 걱정했다.
얼굴에 심한 타박상과 멍 때문에 창피해서 한동안 병원 갈 때마다 거즈를 대고 반창고를 붙였다. 그런 나를 보며 의사는 웃음을 머금고 “거즈 대지 마세요. 그러고 다니시면 부부싸움하다 한 대 맞은 걸로 오해합니다.” 하였다. 남편은 어이가 없는지 “이젠 하다하다 별짓 다하고 다닌다.”하며 비아냥 반 걱정 반 하는 말투였다.
며칠 후 올림픽 공원에서 근무하시는 친정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요즘에도 올림픽 공원에 자전거 타러 다니냐?”
“아니요. 요즘 못 다니고 있어요.” 하며 별일 없는지 안부를 묻자 아버지께서 다름이 아니라 “엊그제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 있는 데서 또 자전거 사고가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전화했다.” 아버지 왈 어떤 젊은 여자가 자전거를 타다 대리석 기둥을 들이받아 119차에 실려 갈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친정아버지께서는 올림픽공원에서 10년 이상 잔디 깎는 일을 하고 계시는 터였다.
난 이후로 절대 자전거를 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몇 해 전 용기를 내어 또다시 자전거 배우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강동연합회에서 자전거를 배우면서 제법 잘 타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취미활동으로 싸이클을 타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감히 취미활동 할 만큼의 자전거 가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생활 자전거 아닌 다음에야 취미활동으로 탈 생각이면 최소한 백은 넘어야 했고 차 한 대 값도 족히 되는 것도 있어 아쉽지만 마음을 접었다. 앞에 바구니가 달린 예쁜 생활자전거를 남편으로부터 선물 받고 그것으로 만족을 해야만 했다.
몇 년을 생활자전거를 타고 출퇴근도 하고, 고덕동 친정에도 오가며 웬만한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 덕을 톡톡히 봤고 그렇게 자전거는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스피드를 얼마나 즐기는지도 알게 되었다. 싸이클이 내게 딱 적합한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계속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시큰둥하였다.
“그냥 집에 있는 자전거로 한강에서 슬슬 타고 다녀. 꼭 비싼 자전거를 타야 운동이 되는 건 아니잖아?”
“집에 있는 자전거로는 멀리가면 무릎이 아프단 말야. 자전거 사주면 당신 소원대로 살 10키로 뺄게. 응?”
“넌 절대로 못 빼. 괜히 자전거 타고 다니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더 좋잖아~ 당신 두 번 갈 수도 있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농을 건넸다.
“이 사람이, 차라리 아주 가면 괜찮아. 가지도 않고 평생 누워있으면 골치 아프니까 그래.”
그 무렵 남편과 골프 때문에 냉전과 말싸움이 잦던 중 심하게 다투고는 나는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전면 대응했다. 그러자 쉽사리 사줄 것이라 생각지도 않고 툭 던진 말에 생각보다 쉽게 그러마 하고 남편이 허락을 하였고 통장에 거금을 입금해 주었다.
혹시 이게 꿈이 아닌지 한참을 어안이 벙벙했다. 내심, 아님 내게 무언가 구린 것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면서도 큰맘 먹고 자전거를 좋은 것으로 장만하면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 가장 잘한 것을 꼽으라면 두 딸을 낳은 것과 자전거를 배운 것 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친구들은 그 돈으로 차라리 작은 소형차라도 뽑지 자전거를 샀냐며 안타까워했다.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하다. 마트에 갈 때나 차가 필요로 할 때 전혀 협조적이지 않은 남편을 생각해 보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난 그래도 좋아하는 자전거를 실컷 탈수가 있어 마냥 좋기만 했다. 자전거를 타면서 골프에 미쳐있는 남편을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 역시 자전거를 타면서 시도 때도 없이 자전거 생각뿐인 것처럼 남편도 그러했을 터이니 말이다.
날마다 미사리 방면 팔당대교 앞으로, 때로는 여의도 까지 출근 도장을 찍으며 속도감을 즐기던 직후 부부가 함께 자전거 동호회 활동을 하던 작은아이 친구 부모의 권유로 동호회 활동을 겁 없이 시작하게 되었다. MTB로 싸이클을 쫓아다니며 실력을 쌓고 완도와 해남을 투어 나갔던 일은 무모했지만 그래도 내겐 뿌듯함과 함께 추억으로 남아있다.
자전거를 타면서 가장 큰 변화는 수줍음과 낯을 많이도 가리는 내성적이었던 성격의 변화였다. 3년 남짓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거의 1년여 동안은 낯 선 회원들과 말을 섞지 못했고 밥을 먹을 때마다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로 함께하는 식사자리가 불편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처음 본 사람들과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본질적인 성격은 변하지는 않았지만 동호회를 탈퇴한 지금까지도 변화한 나의 모습은 회원들 간에 두고두고 전설적인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이후 동창들과 라이딩 소모임 활동을 통해 교류하면서 정식으로 구천 동문 RPM 라이딩 동호회를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 동문이라는 틀 속에서 선후배간에 친목과 활발한 활동이 내겐 건강한 삶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
이토록 자전거사랑에 훔뻑 빠져 있는 내게 사고는 최근 다시 예기치 않게 찾아 왔다. 또 한 번의 자전거 사고였다. 의식을 찾고 깨어날 무렵에는 싸이렌 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통증. 자전거 타며 수없이 자빠지고 엎어져도 이토록 처참할 수는 없었다.
왼쪽 무릎 골절, 자칭 귀엽다 자부했던 얼굴 스크래치, 오른쪽어깨며 엄지손톱 피멍까지. 더 심각한 것은 애지중지 아끼던 자전거도 함께 다쳤단 사실이다.
통 깁스를 한 상태에서도 오로지 자전거 탈 수 없음에 속상하였고 오로지 자전거 생각에 꿈속에서 조차도 자전거 타는 꿈을 꾸기도 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싸이클복을 입어보고 헬멧을 쓰고 거울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목발을 짚고 클릿 신발을 사서 신어보고 열심히 재활운동을 하며 자전거 탈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남편은 이런 나를 바라보며 자전거를 팔아버린다고 반 협박을 하고 있지만 남편 역시 나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과거에는 소심하고 겁이 많던 나는 자전거 사고 난 직후 자전거를 쳐다보기도 싫고 탈 엄두도 못 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하게 다쳤음에도 자전거가 너무도 타고 싶어 자전거앓이를 하고 있다. 이런 나를 친구들은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올림픽공원 앞에서 자전거 타다 깨구락지 되었던 지난날 이야기를 하며 깁스를 하고도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나에게 인간승리라며 웃는다.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이유로 태어나 가장 우울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친구들은 왜 그렇게 자전거에 집착 하냐며 타박 반 궁금증 반으로 묻는다. 그 물음에 항상 나는 ‘난 자전거타고 달리는 동안 나는 온전히 나야. 누구누구도 아닌 그냥 나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라고 대답한다. 집에서 살림을 하고 믹스커피만으로 여유를 챙길 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살림만 하던 나는 집에서 항상 가족들을 기다리기만 했다. 가족이 입을 옷을 위한 빨래, 가족을 위한 식사, 해야만 하는 청소. 그 무엇도 온전히 내 것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지루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더 즐겁고 아내와 엄마가 아닌 쉰 둘의 이재순으로 존재하는 느낌이다.
53회 졸업기수, 2017년 내나이 쉰 하고도 세 살, 내 삶에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자전거타고 국토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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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쉰둘 이재순선배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