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서공원 억새밭 민둥산보다 더 좋아 _1
15일 오후, 수원문학의 집을 나와 화서문 옆 주막을 지나서 문밖 버스를 타러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스산한 가을바람과 함께 화서공원 성곽 아래 물들고 있는 은빛 억새꽃이 마구 손짓이라도 하듯이 발걸음을 붙잡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모습은 가을 여인이었는지도 몰랐다. 사람들 저마다 이 가을에는 쓸쓸해진다는데 바쁠 것 하나 없는 나는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성곽 둘레 길을 따라 올라가니 억새밭이 숲속을 이루며 장관이었다. 사진 찍는 곳인지 길이 나 있고, 청춘남녀가 데이트하기에는 이만한 좋은 곳도 없을 것 같아 보였다.
화서공원 억새밭 민둥산보다 더 좋아 _2 몇 쌍의 남녀가 손을 잡고 걷는가 하면, 저마다 억새꽃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오며가며 차창 밖으로 멀리 보아 왔지만 이렇게 좋은 곳일 줄은 미처 몰랐었다. 화서문과 서장대 사이의 서포루를 중심으로 옛 성과 함께 억새꽃은 조화를 이루며 찾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앞에 보이는 서포루의 누각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길 한쪽 벤치에 앉아 안내도를 보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잘 되었구나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물어보았더니 자기도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럴 수가! 이심전심이었을까. 오십쯤 되었을 것만 같은 그 여인은 "잘 모르겠네요. 어르신이 한번 찾아보세요"라며 지도를 나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안경을 끼지 않고서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곧 못 찾겠다며 되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실눈을 찌그려가며 현 위치를 찾아 겨우 알아낸 나는 의기양양하게 서포루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나에게 '어르신'이라 부르며 여기 흔들리는 억새꽃쯤으로 나를 본 것은 아닐지, 그것이 나는 왠지 마음 한편으로 걸려왔다. 내심 나는 젊다는 것을 뽐낼 양으로 그 여인이 보는 앞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억새꽃을 찍으며 폼을 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억새꽃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 한 장만 찍어 달라며 부탁하자 그 여인은 두 말없이 그러자고 했다.
나도 이번에는 그 여인을 찍어주겠다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너 받아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리고 김치를 주문하기도 하며 나도 넌지시 웃었다. "수원에 살아도 여기 억새밭에는 오늘 처음 왔다"는 그녀는 정말로 가을 여인이었는지도 몰랐다. 나 역시도 수원에 산지는 오래지만 억새꽃을 보겠다며 여기에 일부러 찾아오기는 처음이 아니겠는가. 주책일지는 모르지만 가을남자와 가을여자가 만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운명적 만남이라거나 인연 같은 것은 아닐지, 뒤숭숭한 생각들이 뇌리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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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아까부터 여기에 앉아서 하염없이 억새꽃을 바라보며 취해 계시던데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다"며 물어보았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흰머리 흔드는 저 억새꽃을 보고 있노라면 쓸쓸한 가운데, 그렇지만 마음이 한없이 맑아지고 나를 생각하게 하여 좋다"고 했다. 전율이 일 듯 나는 어쩌면 영혼까지 닮은 이런 인연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억새의 바람이 질투를 하며 이제 그만 되었으니 내려가라고 옷깃을 잡아끌었다.
강원도 민둥산의 억새축제가 유명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산정호수가 있는 명성산의 억새축제도 그렇고, 영남알프스의 억새 또한 그렇고, 서울의 하늘공원 억새축제도 유명하다고 한다. 내가 아는 광교산에도 억새밭이 있기는 하지만 허명일 뿐이다. 그래서 여기 팔달산자락의 화서공원에 오면 어느 유명한 곳 부럽지가 않은 억새다운 억새꽃을 볼 수 있다고 나는 감히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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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누구라도 가을여자, 가을남자 눈부시게 만나보고 싶거든 여기 장안공원 옆 화서공원으로 살짜기 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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