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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인생 경주
전도서 7 : 8 - 14 (히 3 : 12 - 14)
오늘 본문 8절에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내려오는 말에 ‘시작이 반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일의 시작이 중요합니다. 시작하지도 않은 일은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입니다. ‘내가 아무 일을 해야지 해야지’하면서 시작도 않고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현실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작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고 ‘아, 신앙 생활이란 저렇게 좋은 것이구나’하고 깊이 마음에 느낍니다. 또 옆에서,
“당신도 예수 믿고 나처럼 행복하게 만족하게 감사하면 사는 생활을 안 하시겠습니까?”하고 권면하면,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생활이 참 좋아 보여요. 저도 언젠가는 믿어야지요”
“아, 그러세요. 그러면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시기로 이제 작정을 하시지요.”
“예, 앞으로 작정을 해야지요.”
그러면서 1년 10년 어떤 이는 평생토록 “믿어야지요, 믿어야지요”하면서 그냥 지내는 분이 있습니다. 이거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신앙 생활이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한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지식만이 아니라 체험이 수반됩니다. 들어서만 되는 것이 아니요, 보아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생활을 통해서 체험해야 됩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전에 예수 믿는 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계셨는데 친구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시면서 주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고 전에 알지 못했던 축복의 세계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내가 왜 이렇게 늦게 예수를 믿게 되었던고, 이렇게 좋은 것을”하시는 분이 많으십니다.
신앙 생활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시작을 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시작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한 것을 잘 끝마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3장 14절에도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를 청하여 하신 말씀 중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한 후 약 20년이 되어서 로마 옥중에서 늙은 몸으로 얼마 안되어 순교할 것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었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이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한 것입니다. 오랜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은 재다 보고 제자에게 유시로서 주신 말씀입니다.
달려갈 길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었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도행전 20장의 말씀과 디모데후서 4장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변함이 없는 움직일 수 없는 결심이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달려갈 길이 있는데 이것을 마치겠다는 결심입니다.
경주를 시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그치지 않고 마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귀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공부를 잘해서 졸업하는 것은 더욱 귀합니다. 전쟁도 시작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잘 싸워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그래서 나폴레옹 같은 사람은 “전쟁은 최후 5분간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일생도 꼭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경주를 잘 마치는 것 공부를 잘 끝내는 것 전쟁을 승리로 마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생활도 잘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을 잘 마치는 것은 더욱 귀합니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은 키가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에 올라오고 힘이 세고 모든 재능이 탁월해서 사람들이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대할 때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의 네로 왕은 보통 악한 왕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그에게 순교 당했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아내를 암살한 왕입니다. 그러나 네로 왕이 처음에는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로마의 제일 가는 석한 시세로에게 배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노래와 시에 능하였고 예의가 단정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행정을 얼마나 잘했는지 국민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점점 나빠져서 로마성을 불질렀습니다. 그리고 종래 그는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우리가 보통 가룟 유다하면 나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특별히 신임 받은 제자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회계의 직분을 맡아 재정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어떠한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시작하는 것이 귀하나 잘 마치는 것이 더 귀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나오시다가 학습 서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학습 서신 분 가운데 세례 받으시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세례 받으시고 신앙을 계속해서 지키시며 나중까지 잘 끝마치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믿음으로 잘 마치는 것 매우 귀한 일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세상에서는 별로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믿음을 유산을 물려주고 믿음으로 주 안에서 세상을 떠나는 분입니다. 정말 인생의 승리하신 분들이 부럽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도중에 잘못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월 첫 주일 저녁 예배 후에 그 동안 새로 등록하신 분들을 환영하는 모임을 선교관 하층 친교실에서 가집니다. 그때 저는 새 교우들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갈보리 교회의 새 식구되신 것을 환영하며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경주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경주를 시작하셨는데 잘하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경주를 잘 마치는 것입니다. 경주하는 것은 힘도 듭니다. 숨도 찹니다 볼 것도 많습니다. 구경거리가 우리를 유혹할 때도 있습니다. 옆에서 뛰는 사람이 우리의 달려가는 것을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관계하지 말고 내가 잘 달려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달려간 사람에게만 상급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장 23-25절)고 하였습니다.
요한 번연이 쓴 천로역정(Pilgrims Process)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천성을 향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위험한 곳도 있고, 힘든 곳도 있고, 마음을 움직이는 유혹의 장소도 있고,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곳도 있고 의심하네 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곳을 통과해서 계속 달려갑니다. 그래서 종래는 천성에 도달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체험을 다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는 앞날이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리는 배처럼 조용한 것만 아닙니다. 노도 광풍이 요란하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고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에 영국의 종교 개혁자 크렌모 감독은 헨리 8세때에 구교를 반대하고 종교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메리 여왕은 카톨릭 교인이어서 신교를 없애 버리고 구교로 하여금 영국의 국교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크렌모 감독에게 구교로 돌아오면 높은 지위를 하나 주겠다고 교섭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불응하자 투옥하였습니다.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감독이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는 중 어떤 사람을 시켜서 또 교섭이 왔습니다. 어떤 문서를 내 놓으면서 여기 사인 만하면 무사히 석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문서를 읽어보니 자기의 주장과 비슷하므로 사인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 재판때 검사 측에서 “그대는 구교로 돌아오겠다고 서명하였지?”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깜짝 놀란 크렌모 감독은 일어나서 “내가 사인한 그 성명서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내 양심으로 그 성명서를 취소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화형을 받게 되어 불이 펄펄 타올라 올 때 그는 먼저 자기 손가락을 내밀어 태우면서 ‘이 손가락으로 그 성명서에 사인을 했었구나’하면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뭐 이렇게 심각한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시작한 신앙 생활이 끝마치기 어려운 조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은 미국에 가셨습니다마는 어느 집사님이 한번 제 집에 오셔서 간증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야겠는데 요사이처럼 추첨제도가 아니고 시험을 치고 진학하던 때였습니다. 소위 일류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싶어서 입학 시험을 치면 될 실력은 자신도 있어서 시험을 보면 낙방을 하는데 2년 계속 낙방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짐작이 갑니다. 그러니까 너무 안타까워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해 본다해서 준비를 시켰는데 시험 날이 다가오니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해서 기도할 생각은 안하고 마음에 유혹을 받았어요.
‘어디 점치는데 한번 가 보자’해서 유명하다고 하는 집엘 찾아가서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점을 치는데 그 점쟁이 하는 말이 “거참 어렵겠군요!”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는 속이 타서 그 점쟁이 옷소매를 붙들고 늘어지며 애원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무슨 좋은 길이 없겠습니까?”
“글쎄요, 전연 없지는 않지요.”
“그럼 그 길이 뭣입니까? 저는 선생님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겠어요”
대개의 점쟁이들의 술법이 그렇습니다. 어렵다고 한번 호통을 치면 점치러 온 사람은 대개 다급한 심정으로 왔는데 달려 붙기 마련이고, 처방을 말하면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내놓거든요. 그때 그 점쟁이,
“예, 길이 있습니다.” 아주 의기양양하게 힘을 내면서 “부적을 하나 쓰시지요. 조금 값은 비싸게 되겠습니다만” 다급한 어머니는 “얼마든지 괜치 않습니다. 우리 아들 학교에 입학만 된다면야 아까운게 있겠습니까?” “그러세요. 그러면 쌀 열두 가마 값은 있어야겠는데요.”
사실 그 당시 쌀 열두 가마 값이 적지 않았지만 빛이라도 내서 감당할 셈치고 부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점쟁이 하는 말이 “아들의 수험 번호를 받으러 가는 날 택시를 타시고 교문으로 들어가세요. 물론 수위가 막을 터인데 모른 척하고 아예 쑥 들어가세요. 그러면 시원하게 합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미리 학교 정문에 찾아가서 수위 아저씨들에게 돈을 얼마 주고 교섭을 한 뒤 “이제 수험 번호 받는 날 몇 시에 우리가 차를 타고 정문 안으로 쑥 들어갈테니 좀 봐주셔요”하고 정말 수험표 받는 날 새 택시를 골라 잡아타고 학교 정문에 가서는 운전기사에게 특별히 요금을 더 주기로 하고 아예 속력을 내서 쑥 들어갔습니다. 기분은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시험을 쳤는데 낙방을 했습니다.
이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컸고 너무 마음에 가책을 너무 받아 하나님께 죄송함을 느끼고 점이란 게 얼마나 헛된 것을 알고, 그때부터 아주 완전히 신앙에 들어섰다고 해요. 이런 일 말고도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부끄러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과는 상관없는 길로 걸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다시 돌아가고 회개하고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끝을 바로 맺어야 합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가운데는 끝까지 일을 잘 보아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맡으면 대개 처음에는 성의를 기울여 잘하기 쉽습니다.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잘 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 가운데도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였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다시 말하면 인생의 끝까지 충성하라는 권면입니다.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될 때만 아니라 잘 안될 때도 충성해야 합니다. 칭찬들을 때만 아니라 좀 말을 들어도 충성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옆에서 잘한다고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서 물불 가리지 아니하고 하다가도 좀 말을 그것도 좋은 말이 아닌 말을 듣게 되면 ‘그래, 나 안하면 그만이지’하고 뒤로 물러앉습니다. 이것은 끝가지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다음 부분에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참는 마음이 있어야 끝가지 잘 마칠 수 있습니다. 잠언 25장 15절에도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하였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하였습니다(잠언 15장 1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했습니다.
잠언 16장 32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했습니다.
잠언 19장 11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하였습니다.
야고보 장로께서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야고보 1장 19-20절)고 권면하였습니다.
특별히 주의 일을 하는데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할 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 이르매 거둔다”(갈라디아 6장 9절)고 하였습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할 때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아야 결국은 승리합니다. 화를 내면 그것은 벌써 진 싸움입니다.
어제 저녁에 이 정일 목사님과 장 재원 전도사님과 같이 어느 가정이 꼭 좀 심방해 주기를 바래서 그 댁엘 갔었습니다. 새로 집을 짓고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가정인데 같이 관계가 있는 몇 분 다른 교회 목사님들 장로님들 집사님들도 오셨어요. 교회 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후암 교회에서 오신 오장로님의 간증을 듣고 제가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그 장로님은 교회 상례 부장을 몇 해째 보시는데 상례부가 정말 어려운 봉사 아닙니까?
여러 해 전에 어느 노인이 세상을 떠나서 그 댁엘 가서 자녀들도 만지기 원치 않아서 그냥 있는 것 시신을 알콜로 다 닦고 감장을 하는데 그 아드님이 그때 해군 소장으로 있었대요. 그러면서 이 장로님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교회 가지고 다니시던 성경책을 주면서 “이것을 시신의 가슴 위에 놓아주세요”하더랍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장군님, 세상 떠난 분에게 성경책 넣어 드려야 무슨 소용 있겠어요. 이번 기회에 장군님도 아버님 쓰시던 이 성경책 가지고 교회에 나오시도록 하시죠” 그랬더니 당장에 벼락이 떨어지더래요. “이 자식이, 하래면 하지 무슨 잔소리야”
이 장로님 50이 넘은 분이요. 순전히 주님 봉사하는 마음으로 이런 수고하는데 그때 기분 같아서는 한마디 해주고 싶었으나 꽉 참고 “아, 그래요. 그대로 하지요”하고 일을 다 끝마쳤다고 합니다.
장로님 돌아오신 다음에 옆에서 보고 계시던 여 집사님들이 그 상주되신 장군에게 대들어서 야단했다고 합니다. “당신 우리 장로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아시오? 그런 식으로 대하는 법이 어디 있소? 그 분이 우리 교회에서 몇째 안가는 부자요, 사업가신데 예수님이 좋아서 이런 봉사를 하시는데 당신 부하인줄 아시오?”
사실 이 상주는 교회서 왔다니까 너절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지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자기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태연히 받아들인 그 놀라운 인격에 대해 감동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장로님한테 사과하면서 찾아와 백배 용서를 빌고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열심 있는 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을 이기었습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