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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역사문화의 발전 _
경주박물관자료중심 [下편]
ㅎ 학정카페분관?
* 52/100
[내용 구성]
1. 신라 56왕 연대표
2. 신라 문화정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3. 신라 건국초기 6부족 세력
4. 신라토기문화
5. 신라의 왕릉
6. 신라의 징신구, 공예
7. 신라의 왕호 변천
8. 신라의 영토 확장과 왕권의 강화
9. 천전리 서석곡 명문 기록
10. 울산 반구대 암각화
이상 上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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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하편
11. 화랑도와 진흥왕 영토 확장
12. 불교와 문화발전
13. 삼국통일의 초석
14. 김춘추와 김유신 문무왕
15. 통일신라의 발전, 감은사지
16. 불국사, 석굴암, 동궁월지
17. 신라의 민정문서
18. 성덕대왕신종
19. 신라 하대의 혼란
장보고 최치원
20. 신라의 멸망.
하편
[11] 화랑도와 진흥왕 영토 확장
▪️세속오계는 원광법사가 화랑 귀산과 취항에게 가르친 덕목
*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 진평왕대 화랑도 두 청년들이 스스로 하늘에 맹세한 것을 돌에 새긴 것이다.
* 충성할 것, 과오범하지 않을 것, 시 상서 예기 좌전 등을 3년내 습득할 것 등. 많은 것을 맹세하여 75자 중 誓가 일곱번.
▪️사다함 화랑은 전장에서는 용감했고, 친구 무관랑이 죽자 따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어린 마음이 너무 여렸다. 교우이신 지나치게 지켰나?
▪️진흥왕 국경순수비 ;
* 북한산비; 555? 한강유역 점령, 추사 김정희 금석학 연구로 밝힘.
* 창녕비; 561, 고령 대가야 정복(562),
* 황초령비와 마운령비 ; 568. 이 부분 영토는 오래가지 못하고 곧 상실.
▪️금관가야는 법흥왕때 정복(532)
▪️대가야는 진흥왕때 정복(562)
진흥왕 영토확장
▪️명활산성, 서형산성(선도산), 남산 등지 성곽 개축 등 정비
[12] 불교와 문화발전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 절들은 하늘에 별처럼,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서 있다.
▪️남산 칠불암
7불인데 작품이 우수하고' 두분은 가려졌다.
▪️신라 불교전래; 19대 눌지왕때 5세기중엽
▪️불교 공인 ; 23대 법흥왕때, 527년(6세기 중엽)
▪️전래후 약 1세기가 지나서야 공인, 늦은 이유 ; 전통적 요소가 강했다.
▪️경주 남산 장창골 미륵삼존불
▪️백률사 약사불
순교한 이차돈의 목이 여기까지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사찰.
▪️대표적 호국사찰 ; 사천왕사
사천왕사지
▪️문무왕 때 명랑법사 발원 건립.
▪️삼국통일후 불력으로 당나라 세력 물리치겠다는 염원.
사천왕사녹유전
▪️진흥왕때 황룡사 건립
▪️선덕여왕때 643년 자장 건의로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 높이 약 80 m
* 1238년 몽고난때 소실
▪️황룡사9층목탑 모형 / 선덕여왕 때 건립
[13] 삼국통일의 초석
🟫 진흥왕(540 ~576) 영토확장
*거칠부 국사편찬545/ *개국 개원551/*우륵 신라 이주551/ *백제와 신라 연합, 고구려 공격551/ *한강하류 점령,나제동맹깨짐553/ *관산성 백제 성왕 전사554/ *북한산비555/ *창녕비561/ *대가야정복562/*연호 대창568/ *황초령 마운령비568/ *원화제도 576(진흥왕사망. 비는 비구니)
*진지왕 576~579. 폐위, 죽음
▪️진평왕(579~632)
▪️선덕여왕(632~647)
백제 신라 대야성 점령,김품석 죽죽전사642/ 김춘추 고구려642/ 황룡사9층목탑645/ 첨성대건립647/ 비담 염종반란647/
▪️전덕여왕(647~654)
김춘추 김유신 중용/김춘추 도일647/ 김춘추 도당648
▪️김춘추 태종 무열왕 외교, 백제멸함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첨성대 야경 / 선덕여왕 때 건립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얘기가 담긴 월정교, 현대화된 다리 야경, 첨성대에서도 가까운 거리.
[14 ] 김춘추와 김유신. 문무왕
▪️김춘추(603~661) 고구려 일본 당에 가서 외교활동, 무열왕 (재위 654~ 661)
660년 백제 멸하고 이듬해 사망
▪️김유신(595~673) 김춘추의 처남
무패장군. 김해금관가야국 마지막 구해와의 증손자
태종 무열왕릉
▪️능의 밑둘레 112m, shvdl 8.5m, 규모가 크다. 태종무열왕지비 머릿돌에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글씨.
▪️시호는 무열이고, 신라 왕중 유일하게 태종 묘호가 있다.
태종 무열왕릉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대좌) 위에 이수(비석의 머리장식 부분)만 얹혀있다.
김유신 장군 묘
▪️ 귀족회의 의장 상대등, 백제 멸할 당시 나당연합군 총사령관,
▪️관작은 태대각간, 사후 흥무대왕 추봉(흥덕왕 10, 835) ,
▪️ 능밑둘레 50m, 지름 18m, 높이 5.3m , 십이지신상 호석
사신 170회 이상 보냄
🟫 통일 전쟁의 완수
▪️무열왕 (재위 654~661)과 문무왕(제위 661~681)대에 걸쳐 통일전쟁을 완수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합니다. 무열왕은 왕자들과 김유신(595~673)을 중용하며 지배 체제와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당나라와의 외교에도 힘쓰며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통일 전쟁의 첫걸음은 백제 정벌이었습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재위 641~660)이 항복하였습니다.
▪️백제 부흥군이 주류성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일어났지만 신라군에 패배하였습니다.
▪️문무왕 8년 668에는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하니 보장왕 (재위 642~-668)이 항복하였습니다.
▪️이로써 통일 전쟁은 끝났으나 당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하려 하면서 나당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문무왕 15년(675) 당나라의 설인귀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다음해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면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영토확장의 한계는 있었으나 통일 전쟁을 완수하였습니다.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이루었다고 내세웠습니다.
[15]일신의 발. 감은사지
▪️상대등 권한 약화귀족중심에서 왕권중심
▪️집시부 시중 강화
▪️9주5소경. ▪️9서당10정
▪️녹읍폐지, 녹봉제
감은사지3층쌍석탑
<감은사지 소망>
이재익
신라의 국운이 푸르던 날
감은사엔 석가탑보다 더 큰 삼층 쌍탑이 우뚝 섰다.
어느 때 동아시안게임* 출연 학생들이
푸르고 큰 천 밑에서 파도를 일렁였다.
그 탑과 학생들은 환희를 떠받쳤지만,
바다를 지킨다는 뜻이 엄숙했다.
신문왕*은 통일 문무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감은사感恩寺와 이견대利見臺를 짓고
해중릉 대왕암을 추모하였다.
추령 모차골 함월산을 넘어
기림사와 감은사에 유숙한
대왕의 호국추모 행차길*그 수일,
오늘은 단 하루에 답사한다.
동해바다 바라본 부자대왕父子大王 그 마음같이
바다와 빈 절터를 1300 여 년간 한결 지켜온
저 우람한 탑을 위해 풍경風磬소리 되돌려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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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동아시안게임 ; 1997.5.10.~5.19, 부산에서 개최, 식전행사 중 역동力動 프로그램에 출연한 학생들(경남상고, 대광공고)중 경남상고 학생들 관리 지도교사로 참여하였음.
* 신문왕 ; 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
* 감은사 ; 신문왕이 문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감포 동해 어귀에 세운 원찰願
* 이견대 ; 대본해수욕장 동해구 바다의 대왕암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정자. 문무대왕 혼령이 바다로부터 신문왕에게 만파식적萬波息笛 피리를 전했다는 전설이 있다.
감은사, 이견대, 대왕암이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 호국추모 행차길 ; 함월산 → 기림사→ 감은사→ 이견대(대왕암 참배)
<대왕암>
우현 고유섭(1940년 작)
대왕의 우국영령은
소신후 용왕되사
저 바위 저 길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海天을 덮고 나는
賊鬼를 調伏하시고
우국지성이 중코 또 깊어시어
불당에도 들으시다
高臺에도 오르시다
후손은 思慕하야
용당이요 利見臺라더라
영령이 幻現하사
晝二夜一 전해주신
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에 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大鐘川 覆鐘海를
오작아 뉘지마라
蒼天이 무심거늘
네 울어 속절없다
아무리 微物이라도
뜻있어 운다 하더라.
*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 미학 미술사학자.
▪️국학설립. 신문왕 2년. 682
귀족자제 9년 수학.
▪️6두품세력 정책적 양성
▪️독서출신과 ; 원성왕때, 학문성적 3품으로 나누어 등용. 골품제도 견제,결과는 귀족반대로 실패
신문왕릉
🟫 당나라 복식 채용
▪️服복(옷), 飾식(모자,관, 신발, 허리띠 등 장식)
▪️ 법흥왕 7년 520년 울령반포
▪️진덕여왕2년 648년, 김춘추 당에가서 당복식 따르겠다고 함(남성)
▪️문무왕4년 664년 여성도 당복식 따름.
▪️ 9주 ;
* 본래 신라땅에 3주 ; 상주, 양주, 강주
* 옛백제땅에 3주 ; 웅주, 전주, 무주
* 옛고구려땅에 3주 ; 한주, 삭주, 명주
▪️ 5소경 ; 수도 편재를 보완
*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금관경(김해)/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 소경 지방관 사신 파견
▪️ 9서당(중앙군), 10정(지방군)
🟫 통일신라 문화
▪️정치발전, 왕권강화가 견인
▪️당 고구려 백제 문화 수용
▪️왕릉은 당나라 능원제 수용, 석인상 사자상 등 석물 치장
▪️사찰 평지에 대규모 금당앞 쌍탑 형식 ; 감은사지 3층석탑, 불국사 석가탑
▪️고승 부도(승탑). 비석
▪️불교조각은 신라인의 미의식, 당나라 양식 가미, 독창적이고 비례가 잘 맞는 석굴암 본존상 등
▪️공예 ; 범종, 사리장엄구
[16] 불국사 석굴암.동궁월지
▪️석굴암 벽에 새겨진 보살상들
▪️석굴암 본존불(사진작가 한석홍님 작품)
불국사
▪️문무왕 동궁월지(종전 비하로 쓰였던 명칭은 안압지, 지금은 않씀). 양궁 지음
▪️신문왕 달구벌(대구) 천도 시도하다 포기
▪️동궁월지(종전에 안압지)
[17] 신라민정문서
🟫 민정문서(정창원문서,신라장적)
▪️ 신라 촌락 사정 파악 문서
*남녀별 연령별 인구조사
*소. 말, 뽕나무, 호도나무, 잣나무 수까지 파악
▪️3년마다 통계, 촌주가 작성
▪️ 노동력과 생산자원 철저하게 편제 관리
▪️8세기 중엽 경덕왕때 서원경(청주지방것)
▪️1933년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서 발견
▪️인구 인력기준 6등급
▪️호구 인정기준 9등급
[18] 성덕대왕 신종
🟫 성덕대왕신종
▪️통일신라 전성기 성덕대왕 찬양 범종
▪️효성왕 경덕왕 거쳐 혜공왕대 완성
▪️규모
* 높이 3.3m /입지름 2.2m /구리 12만근, 무게 18.9톤
▪️봉덕사, ㅡ>영묘사, ㅡ>봉황대, ㅡ>경주박물관(1975)
▪️1천자 가량 문장
성덕대왕신종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19] 신라 하대의 혼란. 장보고, 최치원
▪️집사부 기능 강화, 유교이념 도입, 관료제발달
▪️백관잠; 성덕왕이 관리에게 내린 경계지침
🟫 崔致遠(857~?) 당에 유학
▪️율수현 현위, 당말기 황소의 난 때 고변장군 종사관이 되어 <토황소격문> 을 지어 문장으로 유명해짐.
▪️귀국후 태인, 서산, 함양 지방관
▪️894년 진성여왕 에게 개혁안 10 여조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말년은 유람, 운둔으로 사망 연대 모름.
과연 그는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을까?
▪️부산 해운대 동백섬 최치원 동상,
▪️해운대 지명은 최치원 선생 호 고운외 해운이라는 또 다른 호에서 나온 지명이다.
[20] 신라의 멸망
🟫 신라의 융성과 멸망
▪️신라(기원전 57년~935)는 7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점부터 큰 변화를 겪습니다.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은 당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하여 정치제도와 복식을 받아들이고, 군사 지원을 이끌어내어 통일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676년에는 당나라를 물리쳐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룩합니다..
▪️통일을 달성한 문무왕(재위661~681)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치 제도와 지방조직을 개편하고 확대될 영토에 걸맞는 군사제도를 갖추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들을 포용하고 그 문화를 받아들여 아름답고 조화로운 통일신라 문화를 이룩하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8세기 후반부터 권력층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어 최상위 귀족들이 왕위를 찬탈하는 혼란기가 시작되면서 신라의 국력은 점차 쇠약해져 갔습니다
▪️국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지방세력이 성장하고 백성들의 반란도 일어나면서 신라는 쇠퇴의 길을 걸어갑니다.
▪️결국 왕건(877~943)이 세운 고려에 항복하면서 약 천년 가까이 번영하였던 신라도 멸망합니다.
▪️원성왕릉(괘릉)의 서역인 모습상
▪️서역, 아라비아 쪽과 교역이 있었음을 의미.
🟫 나라의 혼란과 열망
▪️통일 이후 안정된 왕권과 정치 제도의 발달로 잘 유지되던 신라 사회는 귀족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혼란에 휩싸입니다.
▪️혜공왕(재위 765 ~780)대에는 고위관직에 있던 귀족들이 수차리 반란을 일으켰고, 혜공왕은 난리 중에 살해되어 선덕왕(재위 780~785)이 즉위합니다.
▪️이후150여 년 동안 재위하였던 왕은 20명에 이르고, 유력 귀족 간에는 정치적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방에서는 국가의 통체가 느슨해진 틈을 타 호족들이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왕들은 정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귀족의 반발로 지지부진하였습니다.
▪️이에 더하여 조세가 잘 걷히지 않으면서 나라는 재정 위기에 빠지고, 농민의 반란도 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국가가 민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동안 궁예(?~918), 왕건(877~943), 견훤(867~936)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세우면서 사회는 혼란이 극에 달합니다,
▪️결국 경순왕(재위 927~935)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약 천년에 걸쳐 번성하였던 신라도 멸망합니다.
신라는 천년을 계속되다가, 이미 천년 전에 명망했지만, 우리 민족문화의 근간으로 오늘날 까지 우리들 가슴 속에서 살아남아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