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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7:9-20) 수력발전의 두 종류 낙차
오늘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수력발전의 두 종류 낙차>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수력발전의 두 종류 낙차'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수력발전은 높은 곳의 하천이나 저수지의 물을, 수압관로를 통해서 낮은 곳으로 보내면서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힘으로,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양산해 내는 방식입니다. 의암댐이나 청평댐, 팔당댐이 물의 높낮이에서 발생하는 힘을 이용한 발전소라고 할 수가 있는데, 신앙에서도 신앙적인 삶을 살아갈 때도 이렇게 낙차가 있어야만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에너지가 나타납니다. 마치 낙차가 전기를 만들어내듯이, 낙차가 하나님의 힘이 이 땅에 나타나도록 해 주는 것인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낙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낙차'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수력발전소와 같은 사람들로 나에게서 두 종류의 낙차가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두 가지 낙차가 어떤 것인지 한 번 봅시다.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삶에 나타나셔서, 당신의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에너지를 발산하시는 그런 일이 낙차를 통해 나타나는데, 어떤 낙차들이 있다는 것인가?
오늘 본문에, 나병환자 4명이 아람군대의 진영에 가서 "죽이려면 죽여라. 이미 죽은 것인데, 사회적으로도 죽었고 인생자체가 이미 죽은 것인데 이제 병든 몸 남아 있는데, 이것마저 죽이면 죽는 것이지. 어차피 굶어 죽으나 칼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다."라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가 보았더니, 아무도 없어요. 아람의 군인들이 다 철수하고 심지어는 말까지 그대로 놔두고 가버렸습니다.
아마 말을 타고 따까닥, 따까닥 하고 갔다면 쳐들어오는 군대가 자기들을 죽일 줄 알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이 풍요로움을 만끽합니다. 먹을 것을 먹고 금과 은을 챙기고 그러다 보니까 한 나병환자가 외쳐댑니다.
"아, 이거 안 된다.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된다. 지금 성안에는 자식까지 잡아먹는 굶주림으로 지배당하고 있는데, 이 풍요로움이 준비되어 있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인데 이 소식을 전하지 않고, 우리끼리만 먹고 있다면 내일 아침쯤이면 하나님께서 천벌을 내리셔서 우리가 다 죽을 것이다. 가서 전하자."라고 해서 성 중에 가서 전하게 됩니다.
맨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이게 아람 군이 계략을 쓴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의심합니다. "우리를 끌어내고 유인해서 매복해 있던 아람 군대가 와서 쳐 죽일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자 신하가 하는 말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밑져야 본전인데 남아 있는 다섯 필의 말을 총동원해서 정탐을 하게 합시다. 어차피 정탐하다가 죽는다 해도 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 멸망하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섯 명을 말 태워 보낸다 해도 그들에게 손해날 것도 없으니까, 어치피 이미 다 죽어 있는데, 멸망할 것인데 하고 보냈는데 진짜 아람 군대가 없어요. 그 소식을 듣고 온 백성이 나와서 풍요로움을 자기 것으로 만들게 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하나님의 힘이 발전기에서 전기가 만들어지듯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실질적인 역사와 힘이 나타나는 두 가지의 낙차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낙차, 어제 말씀드렸듯이 죽음과 삶에 차이에서 나타납니다. 지금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살려고 버둥대는 것입니다. 죽음을 거부하면서 "내가 죽으면 안 돼. 내가 더 살아야 돼. 어떻게 하든지 이 굶주림을 이겨내고 살아야만 돼. 살아야만 돼."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하는 말이 뭡니까?
"어떻게 하든지 살겠다는 의지를 가져라."라고 합니다. 저는 병원에 가지 않는 게 좋아요. 환자 심방은 안 하는 게 좋아요. 왜냐하면 죽을병에 걸려 있는 분들에게 가면 안 그래도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든지 앞당겨서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기를 쓰는 거예요. 그러면 환자의 보호자들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서 "무슨 목사가 저따위야?"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나가자마자 "아니야, 살겠다는 희망을 가져야 돼. 희망을 가져야 돼."라고 얘기를 하는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자연적으로 병들어서 죽는 타이밍 이전에, 죽음을 미리 받아들여 버리면 오히려 더 살 확률도 많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면서 "내가 이렇게 아파서 큰일 났구나. 내가 죽으면 안 되는데."라는 스트레스보다 차라리 "난 이미 죽었다. 이미 죽었는데 이제 또 죽게 되는 것이 뭐가 두렵겠느냐?"라고 하는 게 훨씬 더 마음도 편하고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더라고요.
이 성안에서는 그렇게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을 수용하지 않고 멸망을 자꾸 피해가려고 하는데 당연하지요.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밖에 있는 나병환자들은 죽음을 쑥- 받아들여버립니다. "죽었다. 이미 죽었는데 뭐가 아까우랴? 아람 군대의 진영에 가서 먹을 것이나 얻어먹고 안 그러면 죽자."라고 죽음을 수용해 버립니다.
사마리아는 차라리 아람에게 항복하고, "죽이면 죽으리라."라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자식을 잡아먹으면서도 견디고 있는 겁니다.
이 삶과 죽음의 낙차를 하나님이 이용하셔서,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삶의 지평위에서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 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이 낙차를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아세요? 우리가 어저께 읽은 5절과 7절에 보면 똑같은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5절에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라고 4명의 나병환자가 해질 무렵에 가지요. 7절에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해질 무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람군대가 도망하기 시작한 것도 해질 무렵이고, 4명의 나병환자가 아람 진으로 걸어 간 것도 해질 무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결과를 유추해 낼 수가 있습니까?
아람 진영으로 해질 무렵에 일어나 나병환자들이 갈 때에, 6절에 보면 “아람 군대로 병거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다.”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진격해 오게 하였으므로 우리는 이제 멸절 당했다.”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해질 무렵에 4명의 나병환자들이, 이미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여 버립니다. 사마리아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거부하고 있을 때, 죽음을 피하려고 하고 있을 때, 이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받아들인 4명의 나병환자들이 아람 군대를 향하여 걸어갈 때부터, 아람군대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여러 나라의 연합군들이 자기들을 향하여 진격해 오는 소리로 듣게 되었고 그러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4명의 나병환자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증폭하시고, 증폭하시고, 증폭하셔서 아람 군대 전체가 말 한 마리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다 도망가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니, 그러한 소리를 듣게 하시려고 했다면 꼭 4명의 나병환자가 움직였어야 되느냐? 이게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시스템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를 원하셨던 것으로 나의 주인 됨을 거부하기를 원하셨던 것 아닙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날 때, 자연에 있는 나무라든지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 산 봉우리의 눈이 내린다든지 이건 사람의 힘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실 때, 반드시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활동의 거점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데 어떤 사람을 원하시느냐?
이렇게 구원의 역사를 펼쳐 나가시고, 하나님의 에너지를 발산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살려고 버둥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삶과 죽음의 낙차를 이용하셔서, 살겠다고 버둥대는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내용들을 준비해 가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낙차, 어떤 낙차일까요? 이 4명의 나병환자가 오늘 본문에 읽은 대로, 가서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라고 합니다.이게 지금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비슷한 말을 사도바울의 말에서도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칠지라.”
이게 무슨 사명감 때문에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 것 같아요? 어떤 낙차가 여기서 느껴집니까?
사마리아 성안에 있는 빈곤과, 자기가 느끼고 있는 풍요로움의 낙차를 느끼는 자만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낙차를 느끼지 못하면 절대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이 delivery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낙차를 이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빈곤을 알고 풍요를 아는 자들에 의해서만 복음은 전달되는 것이에요. 이 낙차가 존재하지 않으면 거기 전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같이 죽을 판인데 누가 누구에게 가서 전한다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 사도바울이 베스도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 왕과 총독의 부귀영화자체가 빈곤으로 느껴질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움을 경험한 자만이 베스도총독과 아그립바 왕이라는 신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지금 당장 당신의 부귀영화, 왕과 총독의 부귀영화 가운데서도 당신이 빈곤가운데 있음을 알아야 그만큼 내가 풍요로워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가 십 몇 년 동안 다른 모든 종교들이 다 숫자가 늘어나는데, 우리 기독교, 개신교에만 줄어들었다고 말합니까? 전혀 낙차가 없어요.
이 풍요로움이 어디서 발생하는 것입니까? 지금 본문에는 아람 군대 진영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이 풍성해서 풍요로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진정한 내용이 뭐예요?
이게 진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풍요로움이라면, 여로보암 시절에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그 풍요로움을 이상으로 삼겠습니까? 그것을 구원으로 여기겠어요?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밥을 잘 먹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이렇게 본문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에티오피아 난민들과 다른 굶주린 자들에게 우리가 쌀을 보내는데,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전달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밥을 배불리 먹게 해놓고 사람이 정상적으로 된 다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밥을 전달하는 게 우리의 목적은 아니지요. 진정한 풍요로움, 참 풍요로움이 뭡니까?
왜 사마리아 성에 기근과 굶주림을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을 먹게 하려고.
제가 창세기 설교할 때 "무 만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인간이 인격이라는 만두피로 되어 있는데, 그 만두피 속에 없다가 생긴 존재니까, 본질이 무(無)입니다. 없어요. 없음을 본질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자식을 통해서 배 부르려 하고 있다. 그 자식의 인격의 껍데기 안에 들어 있는 게, 무로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그것을 자꾸 자식을 통해서 "성적이 좋아라. 잘 생겨라. 장가를 잘 가라. 시집을 잘 가라."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기쁘려고 하니 내가 기뻐지겠느냐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게 다 그렇다는 겁니다.
자동차로 기뻐하는 것도 그렇고, 사업으로 기뻐하는 것도 그렇고, 전부 없던 것에서 생긴 것이니까.
없던 것에서 생긴 것으로는 내 배를 채울 수가 없어요. 오직 원래 있던 것으로만 내 배가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 스스로 계신 분이 누구예요? 유일하게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내가 참 풍요로움을 느끼고, 내가 참 부자가 되고, 내가 참 여유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배부르려면, 하나님 한 분 먹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먹어본 자.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 사랑을 죽이고, 세상사랑 죽었음을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는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을 먹을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을 먹어본 자라야만 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 하나님, 그 분이 내 아버지라는 관계를 맺고 계시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가 부자관계입니다. 부부관계도 아닙니다.
사업도 동업을 하잖아요? 법적으로 법인 신청을 해서 동업을 할 때, 어떤 동업도 제대로 되는 동업이 없습니다. 친구, 동창,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동업이 안 됩니다. 반드시 싸우고 깨지는데 오직 동업이 가능한 파트너십이 가능한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주 협조가 잘 되기 때문이냐? 아니요.
아들놈이 다 말아먹어도 아무소리 안 하는 게 아버지입니다. 결별할 수 없는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 미국 땅, 전혀 나와 상관없는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백인과 흑인과 멕시칸 온갖 사람들이 다 살고 있는 미국 땅까지도, 그렇게 친밀한 내 아버지가 지으셨다는 이 사실이 실감되는 게 아버지로 배부른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실감하면, 그렇게 친밀하게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면 도대체 뭐가 걱정이고 뭐가 불안이겠습니까?
만약 그런 아들이 굶어 죽는다. 그건 아버지가 기가 막힌 길을 예비하신 것이지, 없어서 죽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정말 돈이 나올 구멍이 없는 아주, 아주 지독한 경제적 난관에 부딪혀 있다할지라도 아버지가 실감되면 부유한 자가 됩니다. 오죽 이 길이 좋으면 아버지가 나한테 이렇게 돈을 바짝바짝 말려서 죽게 만드셨을까? "아, 이 길이 최고야. 최고야."라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거꾸로 매달려 죽고 톱에 켜 죽고 하면서도, 아버지 사랑을 믿는 게 아닙니까?
아버지를 실감하니까 그렇게 톱에 켜 죽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 빈곤을 보는 겁니다.
스스로 계신 아버지하나님을 먹지 않는 한 모든 자가 빈곤한 겁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있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돈이 많고 하면서, 아버지가 없다면 이 빈곤은 아주 악질 빈곤이고, 고칠 수가 없는 빈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뭔가 있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뭔가 있는 줄 아는데 마음은 불행한 겁니다.
불평, 불만, 짜증, 지루함, 이런 것이 가득 차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많이 가져 보아도 그 속에는 제로니까. 무 만두니까.
이 두 가지 낙차로 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 땅에서 계속 전개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것을 느껴요. 선교회에 나오시는 분들 특히 여자 집사님들, 여자 권사님들, 제가 목사로서 관찰을 해요. 하여간 엄마 한 사람이 굳건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매 순간 자기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에, 남편 변하고 자식 변하고 그리고 시누이 변하고 그리고 동생 변하고 친정 엄마 변하고 아빠 변하고 시댁 변하고 다 변해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혼자 붙잡고 있는데.
이 4명의 나병환자가 무슨 대단한 계획을 세우고 소원을 가지고 의도한 바가 있어서 아람 군대를 물리친 게 아니에요. 그냥 죽은 자로서 움직여 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인 자로서 움직였을 뿐인데, 그들의 발걸음을 그들도 알지 못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써먹으시는지를 아예 몰랐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발걸음을 큰 연합군의 발소리로 들리게 해서 다 쫓아냈던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자의 낙차를 이용하셔서,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먹으므로, 어저께 말씀드린 대로 죽음을 받아들인 자들만이 구원의 장으로 발을 들여 놓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벌판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판에서 그 아버지를 막 먹어요.
아버지의 사랑 먹고 아버지의 정 먹고 아버지의 능력 먹고 그 풍요로움을 느낀 자만이, 세상을 둘러보니까 "아, 탄식소리 들려온다."라는 것입니다. 대통령부터 재벌부터 그들의 탄식소리가 마음에 들려오는 겁니다. 야, 저들의 불행함, 저들의 탄식, 여기서 전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이 낙차에서.
하나님아버지로 풍요로운 자들이, 아버지가 없으므로 빈곤해 하는 자,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어요. 아버지가 없으면 무조건 가난한 자요. 무조건 굶주려 있는 자요. 그래서 다른 사람 잡아먹어가면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안 되잖아요. 그들에게 낙차를 통해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 낙차를 통해서, 이 세상의 복을 주시고 이 세상을 구원해 내서 백성들로 회복해 가시는 중입니다. 내 속에서 오늘도 이 두 가지 낙차가 어김없이 확인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동안 정말 차이 없이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어떻게 하든지 세상방식으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과거 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아버지로만 풍요로울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이 세상 것을 불량식품 먹듯이 마구잡이로 삼켰던 것들을 다 용서하여 주시고 진정한 두 종류의 낙차가 확인되는 복된 하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죽음이 답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