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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프로드 삶, 온로드 삶>의 줄거리:
오프로드 삶, 온로드 삶
(고전6:12~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오프로드 삶, 온로드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다카르 랠리’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다카르는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나라 세네갈의 도시입니다, 아프리카의 파리라고도 하는 이 도시 이름에 자동차 경주 대회를 말하는 ‘랠리’를 붙여서 ‘다카르 랠리’라고 하면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 대회를 말합니다.
1979년에 처음 시작이 되었는데,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서 알제리, 니제르, 말리를 지나서 사하라사막을 통과해가지고 세네갈의 다카르에 도착하는 경기로 거의 9천 킬로미터 가까이 되는 긴 코스를 달리게 됩니다.
근데 특이한 것은 이 다카르 랠리의 모토가 ‘인간의 문명이 닿지 않는 오지를 달린다’입니다.
이 모토대로 코스 자체가 완전히 사람의 손으로 닦여진 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물론 도심을 통과하려면 그런 도로도 지나야 되겠습니다만, 많은 구간들이 사막은 물론이고 산악지대, 그리고 돌과 바위가 깔려있는 황무지와 계곡, 이런 길 아닌 길들을 가야만 하는 것이 이 경기의 특색입니다.
1979년부터 매년 열렸는데, 지금까지 60여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랠리, 지옥의 경기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다카를 랠리가 바로 대표적인 오프로드 랠리입니다.
오프로드라는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이미 잘 놓여지고 깔려져 있는 도로 밖을 넘어서, 자동차가 달리면 안 되는 곳을 달리는 것, 이게 오프로드 드라이빙입니다.
반면에 온로드라고 하면 정해진 깔려있는 도로를 달리는 것, 그래서 온로드 드라이빙은 주어져 있는 기존의 도로를 그냥 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 오프로드의 삶, 온로드의 삶, 오늘 본문과 관계 지어서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기차는 오직 선로 위를 달립니다, on the rail이 되겠지요, 그리고 자동차는 도로를 달립니다.
자동차가 정해진 길을 벗어날 때 오프로드 드라이빙이 됩니다.
근데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은 이상, 그 일생이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어느 인생도 이 땅에 태어난 인생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길을 계획해 놓으시지 않은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되고 계획되어진 도로를 달리는 온로드 드라이빙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모든 인간들의 삶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은 아담 이후 죄악이 들어온 뒤에, 다 오프로드 인생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걸 소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정해준 길은 언제나 한 길입니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듯이, 그리고 동교동에서 시청 앞까지 가려면 길은 하나에요.
신촌을 지나고 굴레방다리를 지나 서소문을 지나야 시청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길은 하나에요.
그러다 보니 정해져 있는 길이 자유라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프로드 드라이빙의 삶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소원하고 내 속에서 생기는 욕구대로 삶을 살아도 되기 때문에, 이 오프로드의 삶이 진짜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본능적으로 생래적으로 매력이 있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아십니까?
인생을 불교에서는 고해라고 하잖아요?
근데 인생이 고해라고 하는 것이 설득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오프로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온로드,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그 길을 따라서 가는 삶이 아니라, 내 속에서 생기는 욕구와 소원을 따라 가는 삶이기 때문에 인생의 고뇌가 있다는 것이에요.
우선,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운명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운명론은 내 의지나 내 인격적 주체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내 삶이 정해져 있는 대로 이끌려가는 것을 운명론이라고 하고, 복음 안에서 온로드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 인생길을 정해놓으셨습니다, 미리 정해져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이 길을 따라서 사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나의 주체적인 결정에 달려 있다는 얘깁니다.
나의 기쁨과 자발성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길을 따라갈 때 온로드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운명론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나 분명히 내 마지막 죽음까지, 마치 파리에서 다카르까지 두 지점이 결정돼있는 것처럼, 우리가 태어나서 마지막 목적지까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이 돼있습니다.
근데 이 다카르 랠리는 자기 마음대로 최단 코스를 가는 거예요, 이게 오프로드 랠리죠.
태어나서부터 죽음 때까지가 정해져 있지만, 그 구간을 어떻게 가야 될지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괴로움이라는 게 왜 생기는가 하면…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제일 좋은 차 중 에쿠스라는 차가 있어요, 길고 크고 차체가 낮습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이 승차감이 좋으니까.
이 에쿠스 신형을 갖고 자갈과 돌과 바위가 깔려있는 계곡 길과 산악, 황무지를 드라이빙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우리는 에쿠스로 태어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내실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내시는 길을 따라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에쿠스로 태어난 자들이 자기 속에서 생기는 욕구를 따라서 오프로드 드라이빙을 하게 됨으로써 부딪치고 찍히고 흔들리고, 그러니까 인생의 고난이 있는 겁니다.
인생이 스무드하다는 얘기는 내 욕구대로 잘돼서 내가 출세하고 이름을 날리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돈이 벌리든 안 벌리든, 출세를 하든 말든,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놓으신 죽음까지 도달하는 그 길을 가는 것이 스무드한 길이고 스무드한 인생이고, 스무드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정하신 나의 삶이 이 세상에서 살던 사람들이 한 번도 겪어보지 않고 가보지 않았던 그런 길을 가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프로드에서 길을 개척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결정된 길입니다.
지구 위에서 보면 새 길이지만, 하늘에서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나를 이 땅에 내시기 전에 이미 정해놓으신 길을 가는 것이라 이겁니다.
자, 이러한 비유를 놓고 생각하면, 이 지구 위는 완전히 다카르 랠리장이에요.
60억 인구 중에서 특히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교인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온로드의 삶을 사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얘깁니다.
복음은 무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오프로드를 달리고 있는 인생들에게 온로드의 삶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능력과 가능성과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에쿠스로 태어난 자들이 오프로드를 사느라고 부딪치고 찍히고 덜컹거리고 괴롭고 힘든 고해의 바다를 드라이빙 하다가, 이제 정해진 온로드를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삶을 위해서 전환하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고린도교인들 중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아예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도로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오프로드의 삶을 되는대로 내 욕구를 따라서 하나님이 정해놓은 길을 벗어나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유의 주제 하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성행했던 음행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왜 교회 안에 음행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성행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내역이 좀 있습니다.
여러분, ‘코린티아조마이’라고 하는 헬라어가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의 단어인가 하면, 고린도人처럼 행한다는 뜻입니다.
뉴욕에 사는 사람을 뉴요커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면 뉴욕 사람처럼 행한다는 말은 뉴요커라이즈라고 해야 될까요?
하여간 이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인처럼 행한다는 말의 의미가 뭐냐 하면 매춘행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시 전체에 얼마나 매춘행위가 보편화 되었으면, ‘고린도인처럼 행하네!’ 하면 매춘행위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어버렸겠습니까?
당시 AD 50년대에 60만 명의 인구로 이루어진, 그러니까 굉장히 큰 도시에요, 분당이 40만 명인데 20만 명이 더 많으니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인데, 12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의 예가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이었는데, 이 하나의 신전에만 여자사제들이 역사가에 따라 다르지만 천 명에서 삼천 명까지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천 명이라고 합시다, 천 명의 여자사제들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부사역자가 천 명인 교회를 말하는 셈이에요.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크고 70만 명이 되는데, 이 고린도 시의 인구가 60만 명입니다.
그런데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사역자 수가 천 명이 안 될 거예요, 몇 백 명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사제들이 천 명이었어요, 천 명.
이들이 무엇을 하는 사제들인가 하면, 아프로디테 여신이 풍요를 주관하는 여신으로 숭배되었는데,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의식 중에 남자 숭배자들이 와서 성행위를 하는 것이 종교의식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행위의 상대자들이 바로 여자사제들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인된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의 분위기가 바로 이랬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헬라사상의 이원론의 부작용까지 덧붙여집니다.
헬라사상의 이원론이란, 육체는 열등하고 정신은 고귀하다, 이렇게 이원론으로 나누어서 열등하고 가치 없는 육체는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상관없다, 이렇게 부작용이 일어난 겁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육체인데 까짓것 아무렇게 쓰면 어떠냐?’
이래서 음행을 부채질했던 거예요.
고린도市 안에 있는 우상숭배 속에서의 음행의 관행, 그리고 헬라사상의 이원론의 부작용, 여기에다가 고린도교인들이 마지막으로 손에 쥔 것이 뭐냐 하면, 복음이 주는 자유에 의해서 마들어진 격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기의 서신서 곳곳에다 그런 말을 하는데, 오늘 1절에 읽은 것처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고 하는 격언입니다.
그러니까 이 격언이 고린도교인들의 손에 주어졌다는 것은 불난 곳에 휘발유를 부은 격이 돼버린 것입니다.
이래서 교회 안에 고린도 시에 편만해 있던 음행이 보편화되어있던 우상숭배 속에서 발원하고 있던 음행의 관습이 고린도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서 고린도교인들의 생각 자체가 음행 자체에 대해서 자책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이 그 자체를 허용하는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자유라는 주제 하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너희가 지금 복음을 받아들여서 자유 한답시고 까짓것 이런 음행이 무슨 문제냐 라고 생각하고 오프로드의 삶을 살고 있는데, 자유란 그런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선언하시고, 이 자유를 받아서 사도바울이 서신서 곳곳에서 자유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같은 데서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이런 말씀, 자유라고 하는 것이 복음에서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의 얽매임이라는 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자, 인간의 마음이 비어있습니다, 이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인간은 창조되어진 모습 그대로 말하자면, 이 비어진 마음을 채울 때에 만족이 있고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어진 마음을 채우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있는 거예요.
근데 에덴에서는 그게 어떻게 채워져서 기쁨이라는 뜻의 에덴의 삶이 가능했느냐?
하나님으로 빈 마음을 채움으로써 가능해졌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어요, 하지만 마음을 채워야 되지 않습니까?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안 계시니까 몸에 붙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몸의 5감관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사람과 사물과 일 등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이외의 것들로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얽매임이라는 거예요.
마음의 빈 구석을 채우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몸에 의존돼있는 상태가 얽매임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 얽매임으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것입니다.
몸을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만족하고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래서 자유를 준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몸을 통해서 마음을 채우려는 얽매임 중에, 욕구가 그 특성 중 하나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마음을 만족시키려는 것,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 아닙니까?
이게 바로 물욕(物慾)이에요, 물질 욕심입니다.
또 명예를 많이 얻어서 마음의 빈 구석을 채워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사회적으로 얻는 것이니까 몸이 있어야 가능한 겁니다.
또 성취, 이 세상에서 일을 이룸으로써 보람을 느끼려고 합니다, 이것도 몸이 있어서 가능한 겁니다.
이러한 성취욕, 권력욕, 명예욕, 물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들, 학벌이라든지 명품 백, 아파트 자동차, 이런 모든 욕구들이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욕구 중에 성욕과 식욕이 있습니다.
모든 욕구가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성욕과 식욕만은 몸 자체에 귀속돼버리는 거예요, 명예욕과 물욕 권력욕은 몸 자체에 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앞에서 식욕을 잠깐 이야기하지요, 이것저것 다 폐하여 버리실 것인데 우리가 식욕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잠깐 하고는 음행에 관한 얘기로 나가십니다.
결국 이 음행이라는 문제가 복음이 주는 자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고 있고, 복음이 주는 본래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이 주는 자유는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몸을 통하여 마음의 빈 구석을 채우려고 하는 의도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물질을 벌어서 마음을 채우려는 의도가 죽는 것이고, 명예욕 권력욕 성취욕, 이생의 자랑, 이런 것들이 다 죽는 겁니다.
그리고 성에 관한 욕구와 음식에 관한 욕구를 내 스스로 십자가에서 못 박아 버리는 겁니다.
이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음이 몸을 통하지 않고도 약속된 성령님의 오심과 역사를 통해서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에덴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게 되고 기쁨의 상태가 회복됩니다.
이게 바로 자유의 상태에요.
몸을 통하지 않고도 마음이 기쁠 수 있는 상태, 행복할 수 있는 상태, 이게 바로 복음이 주는 자유고, 이렇게 되었을 때, 몸은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씀에서처럼 이제 주님께서 내 몸을 사용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내 몸을 사용하실 때 나타나는 일이 온로드의 삶이라는 거예요.
물욕, 권력욕, 명예욕, 성취욕, 성욕, 식욕, 이 모든 욕구, 여기서 성의 문제, 음식의 문제, 물질의 문제, 사회적인 지위나 역할의 문제,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 인생을 인생답게 하기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금욕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다 온로드 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얘기에요,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서 결혼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서 먹고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서 사회 속에서 지위와 신분을 담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서 능력과 은사가 주어지면서 그것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갑니다.
물질도 권력도 명예도 그리고 성취, 모든 것들이 성도 음식도 의복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온로드 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을 먼저 마음속에 모셔 들여서 육체로부터 독립되어서 하나님으로 마음이 행복해지는 자유를 얻은 다음에는, 이 모든 것들이 온로드를 달리고 있는 삶 속에서 시기적절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할 텐데, 내 마음이 육체를 통해서 마음의 빈 구석을 채우려고 할 때, 물질을 따라 오프로드 하게 되고, 명예를 따라 오프로드 하게 되고, 권력을 따라, 성을 따라 오프로드 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오프로드의 삶을 살게 될 때, 모든 삶에서 에쿠스를 타고 바위 길을 갈 때 나타나는 고해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한 뒤에 하나님께서 ‘네가 평생을 수고하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 것이다’라고 고해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프로드의 인생이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되겠고 명예를 얻어야 되겠고, 권력을 쟁취해야 되겠고, 성을 누려야 되겠고, 음식을 잘 먹어야 되겠고… 이런 모든 육체를 통한 욕구로 말미암아 마음에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오프로드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은 지금도 이렇게 아프고 덜컥거리고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에쿠스로 태어났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온로드를 달릴 때라야만 여러분의 인생은 에덴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건 성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성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갈 때 모든 방면에서 온로드의 삶을 살 때라야만 진정한 기쁨의 삶이 주어지는 것이에요.
괴롭습니까? 힘듭니까?
오늘의 주제는 자유 하에서의 음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자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음행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오프로드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로드로 드라이빙 하는 삶이 되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는 이 한 가지 일에 충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범죄 한 아담의 뒤를 따라서 내 속에서 몸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욕구를 따라 오프로드의 삶을 사느라 이렇게 삶이 덜컹거리고 부딪히고 아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만을 붙잡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길을 달리는 온로드의 삶에서 정말 인생의 안락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