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지리산
입산투쟁의 제이단계를 맞고있는 것은 전남도당만이 아니었다. 전북도당 사령부는 이미 팔월에 지리산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들 사령부가 트를 마련하여 머물고 있는 곳은 천왕봉, 노고단과 함께 지리산의 삼대 주봉중의 하나인 반야봉 줄기를 타고 내리면서 뻗친 뱀사골이었다. 지리산의 그 많고 많은 골짜기들 중에서 그들이 하필 그곳에 자리잡은 것은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들은 지리산으로 옮겨와서도 자기네 관찰지역은 무한책임으로 지킨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령부와는 달리 남원군당이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길고 깊은 골짜기가 노고단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리고 있는 달궁골이었다.
그 원칙에 전라·경남도당은 일찍이 재작년 구월부터 자기네 지역을 찾아들어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동쪽의 대원사골, 동북쪽의 칠선골, 동남쪽의 중산리골에 걸처서 투쟁의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남도당은 노고단과 반야봉을 잇고 있는 주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내리고 있는 골짜기인 화엄사골, 문수리골, 피아골이 그 관할이었고, 화엄사골에는 오래전부터 구례당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그 투쟁력을 과시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세 덩어리로 나누고 나면 지리산에서 남은 역을 천왕봉 아래 장터목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주능선을 따라 제석펑전의 영신봉, 덕평봉, 꽃대봉을 거쳐 명선봉에 이르는 남쪽과 북쪽의 골짜기들이었다. 남쪽으로 뻗어내린 큰 골짜기들은 백부골, 한신골, 영원사골이었다. 남부군은 주로 이 지역을 넘나들면서 필요에 따라 각 도당들과 함께 합세했다가 분리되고는 했다.
그러니까 지리산이 품고 있는 삼도오군의 분기점은 주능선인 지리산맥의 토끼봉과 반야봉의 중간지점인 날라리봉(삼도봉)이었고, 그 행정구역에 따라 세 도당의 빨치산들과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은 명확하게 그 관할을 구분지어 책임분담을 하고 있었다. 지리산 뱀사골이라는 깊고깊은 골짜기로 사령부를 따라 들어온 손승호는 어디가 어딘지 모른 채 트를 만들고, 부대정비를 하고 하느라고 한 이틀을 분주하게 보내고 나서야 한가한 시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울창한 숲들이었고, 귀에 들리는 것은 끊임없이 계곡을 울려대는 물소리였고, 마음에 담기는 것은 크고 큰산이 지니는무한량의 정적의 무게였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가고 있었다. 그 막연한 불안감은 사령부가 남덕유산의 줄기를 벗어나 지리산 줄기를 밟으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건 지리산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이 나빠진데서 비롯된 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 하필 지리산일까, 다른 산들도 많은데.......하는 생각으로 지리산으로 가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리산에 어떤 악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리산은 언제나 오르고 싶었으면서도 오르지 못한 채 멀리로만 있었던 선망의 산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산을 가게 되었는데 왜 꺼려지는 것일까. 그는 그 생각을 억지로 누르고 외면했을 뿐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집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싫었고, 그리고 전북도당이 밀리고 있는데 전남도당이라고 밀리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지리산에서 염상진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가장 구체적이 불안의 이유였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이제 그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자신도 투쟁을 통해 당원이 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객관적 조건이 그와의 지난날을 해결시키지도 못했고, 청산하게 하지도 못했다. 지난날은 지난날대로 가슴벽에 화석으로 찍혀 있었다. 당원이 되었을 때, 이제야말로 염상진 떳떳하게 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말 그때의 순간적인 생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염상진을 만나 오늘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시킨다 하더라도 자신 가슴벽에 찍힌 화석이 결코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염상진을 만나고 나면 어쩌면 그것은 더 커질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기도 했다. 염상진에게 자신의 모습을 확인시킨다는 것은 그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던 인내심을 입증시키는 것이었도, 그의 예언이 적중되었음을 실증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자신의 오늘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든간에 그 결과는 결국 염상진이 쳐놓은 그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포획물의 꼴에 지나지 않았고, 스스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서로 만나지 않는 다른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위해 싸워나가는 동지로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줄기차게 계곡을 울려대는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채 손승호는 멍하니 않아 있었다. "손 동무, 뭘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로 뒤에서 들리는 조심스런 목소리였다. 손승호는 생각을 수습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박두병이 사람좋게 웃고 서 있었다. "아니 어서 오십시오." 손승호가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니오, 같이 앉읍시다. 무슨 생각이 깊으신 것 같은데, 방해가 안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박두병이 손승호 옆에 자리잡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저 물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물소리, 좋지요. 하늘이나 숲을 보는 것처럼 물소리를 듣는 것도 오랜 긴장과 피곤을 푸는데 아주 효과가 큽니다. 요즈음이 수량이 제일 많은 때라서 물소리가 또 유난스럽지요." 박두병이 예사스럽게 하는 말에서 손승호는 구빨치다운 세월의 축적을 또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손승호는 먼저 아랫사람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었다. "예, 다름이 아니고, 손 동무가 자리산이 초행이라고 하셨죠?" 박두병이 지리산 자락을 밟으면서 잠깐 나누었던 말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예, 처음입니다." "그럼 내가 군당을 거쳐 노고단으로 돌아올 일이 있는데 동행하면 어떨까 해서요. 길도 익힐겸 지리산도 관찰할 겸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리산을 넓게 관찰하는 것은 손 동무의 사업에 필요한 일이거든요." 손승호는 박두병이 "구경"이라고 하지 않고 "관찰"이라고 하는 말에 유의했다. 투쟁중의 모든 행위는 곧 혁명사업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지요. 언제 떠나십니까?" "두어 시간 있다가 떠날 겁니다. 그럼 준비해두시지요." 박두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승호는 고무신을 묶은 삼끈을 풀었다. 고무신을 벗어 왼쪽 손바닥에 대고 털었다. 고무신을 벗자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가려움증이 발가락 사이사이에서 무슨 벌레가 기는 것처럼 스물거리기 시작했다. 한번 긁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도지게 될 가려움이었다. 발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거친 발 하나가 바닥을 드러낸 채 풀섶위에 놓여있었다. 발바닥 전체에는 허이연 군살이 두껍게 붙었고, 그 군살은 늙은 얼굴에 잡힌 주름살처럼 굵고 가는 금들로 수없이 갈라터져 있었다. 물론 그 금들은 힘을 많이 쓰는 부위에 따라 엄지발가락에서 시작해서 앞굽을 거치고, 다시 뒷굽에서 심해지고 있었다. 군살의 두께는 얼른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손톱의 서너 배쯤 두꺼운 것도 같았고,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두꺼운 것도 같아서 종잡을수가 없었다. 뒤꿈치에 굵게 갈라터진 금들은 들여다보면 손톱의 서너배 두께쯤 되는 것 같았지만, 손가락으로 눌러보거나 나뭇가지로 쑤셔보면 속살이 어딘지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가 없어 그보다 훨씬 두꺼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손톱을 손톱끝으로 누르면 그 색깔이 금방 하얗게 변하면서 감각을 뚜렷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는 군살은 손톱보다 몇 배 두꺼운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강도도 몇 배가 강한 것이 분명했다. 그 감각없는 군살에는 그 동안 헤아릴수 없이 넘고 넘었던 산들의 자취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발의 변화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발등에는 언제 긁히고 다쳤는지 모를 크고 작은 흉터들이 얽혀 있었고, 발가락들 끝에는 동상의 흔적이 푸르죽죽하게 박혀 있었고, 발가락 사이사이에는 무좀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손승호는 그야말로 소도둑놈 발 같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솥뚜껑을 생각하고 있었다. 솥뚜껑이 살았었더라면 그 발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손도 입산 초기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거칠어지고 억세져 있었지만 솥뚜껑 앞에 내놓기는 부족함이 많았고, 발만은 그에게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을것 같았던 것이다. 자신의 발이 부르터 제대로 걷지못하고, 발목이나 무릎이 삐어 절룩거리며 뒤처질 때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부축을 하거나 짐을 벗게 했다. 자신은 그럴 때마다 자기의 계급에 어울리지 않게 배움을 가진 수치심과 죄의식이 얼마나 깊이 느끼고는 했는지 몰랐다. 자신은 그런 감정을 솥뚜껑에게 한문을 열심히 가르쳐주는 것으로 상쇄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또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하며 발바닥의 군살은 자신도 모르게 두꺼워갔고, 아무리 험한 산길을 오르내려도 힘든 것을 모르며 산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치고 발바닥에 그런 식으로 군살이 박히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어린애처럼 솥뚜껑에게 보이고 싶어하는가... 그건 끊을 수 없는 솥뚜껑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손승호의 길 떠날 준비는 삼끈을 고쳐매는 것으로 끝났다. 짐이라고는 총 한자루와 간추린 배낭이 전부였다. 일행은 넷이었다. 하나는 선요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박두병의 연락병 겸 경호병이었다. 손승호는 자신에게도 문화부 연대의 대본집필이라는 기본임무 외에 박두병의 경호원이라는 임무가 주어져 있음을 무언중에 느끼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 어떤 위험에 부딪치게 되면 도당 간부인 박두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 사람은 주저없이 앞으로 나서야 한다. 그건 박두병 개인이 아닌 당을 보호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난 선요원의 말을 들으면 그럴 만한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 자신들은 깊고 깊은 골짜기의 중간쯤에 자리잡고있고, 전투경찰대들은 지리산 초입의 중요한 길목인 운봉이나 마천·구례 같은 곳에 보루대를 쌓아놓고 진을 쳤다는 것이었다.
토벌대가 수색대 활동을 펴지 않는건 아니지만 마음대로 산 깊이 파고들지는 못하는 처지라고 했다. 그런 느낌은 어제의 집단목욕에서도 눈치챌수 있었던 것이다. 부서별로 트들을 완성시켜놓고 나서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그 맑고 시원한 물로 뛰어들어 맘껏 목욕들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몇 개월, 아니 좀더 정확하게 거의가 일년 만의 목욕이었다. 모두가 꼭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서로 물을 끼얹고, 물장구를 치고 했다. 그건 목욕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였다. 서로 말이 없는 속에서 목욕을 할 수 있게 된 그 안전까지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숲속의 폭염에 허덕이면서도 목을 축일 짬도 없이 계곡물을 건너뛰며 쫒겨야 했던 것에 비하면 맘놓고 목욕을 할 수있다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고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표현을 여자 대원들은 남자대원들보다 몇 배 강렬하게 했다. 여자 대원들은 남자대원들의 목욕터에서 한참 떨어진 아래쪽에서 목욕을 하고 있어서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그녀들이 뿌려대는 웃음소리와 탄성은 그 요란한 물소리를 이기고 낭랑하고 탄력적으로 퍼졌던 것이다. 손승호는 때를 문지르면서 여자들이 터뜨리고 있는 온갖 기쁨의 소리에서 새들이 깃을 퍼득이며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빨간 꽃들이 낭자하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도 오랜만에 목욕을 하는 것인데도 때는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물이 뜨겁지 않아 그런가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신빨덜이 멀 알아야 말이제잉, 때라는 것은 빗게내먼 빗게낸 만치 빨르게 찌는 법이고, 안 빗기면 또 그만치 덜 찌는 법이오. 우리 몸이란 것이 그리 묘허니 되야 있는 디다가, 우리가 또 하도 움직기리고 난리판굿얼 치다봉께 옷에 씻겨서 빗게지기도 허고 그러는 것이오." 어느 구빨치의 말이었다.
산길은 끝이 없었다. 산봉우리들도 끝이 없었다. 하나를 감고 돌면 또 나타나고, 그것을 감고 돌면 또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그들 넷은 말을 하는 법도 없이, 발소리를 내는 법도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줄기차게 걷고 있었다. 손승호는 걷기에만 열중할 뿐 지리산이 덕유산과 어떻게 다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리산이 덕유산보다 몇 배 장대하고 웅장하다는 말이 머리에 담겨 있을 뿐, 산속의 어느 한 부분에 파묻혀 걷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말은 아무 실감도 없었다.
"여기서 다리 쉼얼 잠 허시제라." 산마루의 넓직한 바위 앞에서 선요원이 발을 멈추었다. 모두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밤중에도 산등성이를 타고 걷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불문율인데 선요원은 하필이면 산마루에서 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누구도 그 점을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안전하다는 것이었고, 기왕이면 산마루에서 땀을 식히자는 선요원의 뜻을 다 알아차렸던 것이다.
"손 동무, 걸을 만한가요?" 박두명이 쌈지를 꺼내며 손승호를 바라보았다. 출발하고 나서 처음으로 건네는 말이었다. "예, 좋습니다." "손 동무 걷는 걸 보니 재귀열 앓았던 게 완전히 회복된 것 같더군요. 그 병을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다니, 손 동무도 갈 데 없는 빨치산이오." 박두병은 담배를 말며 쿡쿡 소리내서 웃었다. 손승호는 그의 마음이 언제나 세심하게 자신을 감싸돌고 있다는 것을 또 느끼며 소리없이 마주 웃었다. 박두명이 부싯돌을 치기 시작하자 손승호는 산을 휘둘러보았다. 좌우 양쪽에 산들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산의 물결, 그의 직감적인 느낌이었다. 짙은 녹음에 덮힌 채 겹을 이루며 펼쳐져 있는 산들은 거칠게 일어나고 있는 파도들의 형상 그대로였다. 그 산마루가 꽤나 높은 지점이라는 것은 그 다음에 온 깨달음이었다.
"손 동무, 전에 지리산에 와본 일이 없더라도 혹시 지리산에 대한 글을 읽어본 적은 있습니까?" 박두병이 담배 연기를 시원하게 내뿜고 나서 물었다. "아 예, 기행문을 그저 몇 편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기억이 납니까?" "글쎄요...다 예찬이었는데 특별한 기억은 없고, 최남선의 글이 제일 낫지 않나 하는 정도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 친일파!" 박두병이 내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전혀 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가슴에 쿵 부딪쳐오는 것을 손승호는 느꼈다. 그건 갑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박두명의 단호함 때문인 것 같았다.
"나도 그 글을 읽었소. 그런데, 재주를 친일하는 데나 더럽게 써먹은 자라서 그 글에는 경치에 대한 찬사의 말들만 너절하게 늘어놓고 있을뿐이지 조국강산에 대한 진정한 애정은 찾을 수가 없었소. 아무리 기행문이라지만 기행문도 어디까지나 글인 것은 분명한데, 글이 그 모양이 돼서야 글이라고 할 수 있겠소?" "글쎄요, 박동지 말씀이 틀림은 없는데요, 최남선한테서 그런 정신을 기대하는 건 이광수한테서 항일투쟁을 기대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 맞소! 내가 잠깐 어리석었소." 박두병은 무릎을 치는 것과 함께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담배를 깊이 빨아들여 연기를 천천히 내뿜고는 입을 열었다.
"손 동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최남선의 친일은 계급적 기회주의의 표본이오. 그는 돈 많은 중인 집안의 자식이었는데, 그 중인계급의 생리란 게 아주 묘하고도 고약합니다. 중인계급은 지배계급과 기본계급 사이에 끼어 중간착취를 일삼는게 그 계급적 특성 아닙니까. 그 중간착취계급의 대표적인게 관리로서는 아전부류고, 도시사회에서는 상인이고, 농촌사회에서는 마름인건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은 지배계급에게는 열등감과, 기본계급에게는 우월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 이중성은 위로는 계급상승욕구로 나타나고, 아래로는 지배확대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를 향해서는 간사한 아부와 아첨을 일삼고,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악랄한 회포와 억압을 자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직접생산을 위해 땀 흘리는 노력을 하지 않고도 두 계급 사이에서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한 보수집단인 반면에 정치세력의 변동에 따라 언제나 민감하게 변신하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중성은 민첩한 현실주의와 교활한 기회주의를 낳게 됩니다. 그들의 그런 기생충과 같은 생리는 일제 치하에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제 치하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들 주변을 유심히 살펴봐요, 중간계급 출신들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살펴본 바로는 거의 없어요. 농민들이 그렇게 많은 데 비해 마름이나 그 자식들은 하나를 찾기가 어렵다 그 말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무런 기대도 걸 수 없는 속물적 집단이고 반역사적 집단입니다.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내 생각이 어떻습니까?" 박두병은 입을 훔치며 큰 코를 씰룩했다.
"예, 저도 중간계급에 대해선 좋지 않게 생각해오긴 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정확한 파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손승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박두병에게 새삼스럽게 놀랐는데, 그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 실례가 될 것 같았던 것이다. 흡사 논문을 읽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말에서 그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그 문제를 생각해왔는지 알 수 있었고, 그가 지배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그 비판은 더 설득력이 강했던 것이다.
"인자 가보시제라."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듯 선요원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해를 흘낏 올려다보았다. 남원군당까지는 굽이쳐 출렁거리는 산의 파도를 내려다보며 걷는 내리막길이었다. 그러나 걸어갈수록 높이가 낮아져 언제부턴가 그 산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손승호는 얼핏 바다 속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군당에서 약간 늦은 점심을 얻어먹고 박두명을 제외한 세 사람은 계곡물로 뛰어들었다.
그 골짜기도 거센 물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골짜기들이 깊고, 골짜기마다 물이 많은 것이 유산과 다르다는 것을 손승호는 첫 번째 차이점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손승호는 두 손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물을 떠마시며, 이 물들이 흘러 섬진강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틀을 연거푸 목욕을 한다는 것이 꼭 꿈만 같고, 살을 파고드는 시원함으로 더위를 씻어가는 맑은 물이 소중스러워 그는 물을 끼얹으며 감탄했다. 거침없이 흘러내려가는 물줄기는 반들거리는 넓은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이 매끄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줄기의 그 유연한 흐름은 물기 젖은 긴 머리카락을 빗겨내린 것 같기도 했고, 볏잎 푸른 들녘이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느린 물이랑을 이루며 흔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물줄기의 흐름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부드럽고 얌전하지만은 않았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부딪쳐 제몸을 바수었고, 갑작스럽게 낭떠러지가 나타나도 주저없이 제 몸을 굴려 떨어뜨렸다. 물줄기는 그때마다 몸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들이 모아져 골짜기의 양쪽 벽을 그리고 세차게 두들겨대는 큰 소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물소리는 물줄기가 장애물들과 싸우는 소리였고, 그 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장애물들이 많다는 증거였다. 물줄기는 장애물들을 만날 때마다 부딪치고, 깨지고, 부서지고, 휘돌고, 솟구치고, 나뒹굴고, 처박히고, 맴돌이질쳤고, 그러면서도 흩어지거나 멈추지 않고 하나로 뭉쳐져 끝끝내 목적하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아아, 저 물의 흐름은 혁명의 과정과 같지 않은가! 혁명에는 그 얼마나 장애가 많던가. 그 장애를 무너뜨리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가. 수많은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그 핏빛처럼 처절한 외침을 남기고 죽어가지 않았던가. 저 줄기차게 울려 퍼지는 물소리는 그들이 남기고 간 함성이다. 그리고 또 살아남은 자들이 이어받아 외치고 있는 함성이다. 혁명에 이르는 그날까지 물줄기의 격렬함으로, 물줄기의 끈기로 싸워나가야 한다... 싸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손승호는 솥뚜껑이 숨을 거두던 모습을 또 보며 목이 메이고 있었다. 그는 갔으되 그의 죽음의 의미는 자신의 의식 속에 선 굵은 강렬한 판화로 찍혀 있음을 손승호는 무시로 느끼고 있었다.
"선 동무, 봇씨요, 손 동무!" 물이 몇 방울 얼굴에 튕겨오며 부르는 소리에 손승호는 오랜만에 깊이 빠져들었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무신 생각얼 그리 허고 있으시오?" 유난스럽게 검은 얼굴에 물방울들을 매단 선요원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아 예, 죽은 동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손승호도 그에게 웃음을 보냈다. "죽은 동지럴 생각허는 것도 존디, 빨치산은 생각이 너무 많으먼 사업 망치게 되는 수도 있소. 죽은 동지덜 생각허자면 고것이 워디 끝이나 한이나 있는 일어겄소. 여그 이 달궁골에서도 작년 그러께 을매나 많이 죽었는지 몰르요. 이 나무, 저 나무에 묶여서 총 맞어 죽은 시체가 수두룩 혔고, 이 깔끄막, 저 깔끄막에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헌 시체가 늘핀혔응께. 그 시체덜얼 까마구가 파묵고, 여우가 뜯어묵고, 쉬포리가 쉬 깔기고, 그럼시로 썩어가는디, 요 골짝이 썩는 내로 진동혔소. 아매 요 물에도 그 동지덜에 살 썩은 물이 섞앴을 것이요." 선요원은 여기서 말을 끊고는 한 손바닥을 오그려 물을 떠 홀짝 마시고는, "요 골짝얼 타고 쪼옥 허니 내래가먼 반선이라고 나오는디, 거그서 김지회 동지도 안 죽었소." 팔을 들어 물 흘러가는 쪽을 멀리 가리키며 속상하다는 듯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려라? 그 유명한 김지회 동지럴 동무넌 보셨소?" 연락병이 침을 삼키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먼, 보기만 헌 것이 아니라 손도 만져보고, 밥도 항꾼에 묵고 혔는디. 글고 워디 그 뿐이간디? 나가 그때 김지회 동지허고 항꾼에 죽고 잽힌 동지덜 웬수럴 갚은 결사대였다 그것이여!" 선요원은 그때 생각으로 감정이 흔들리는지 주먹으로 물을 내리쳤다. 손승호는 그때서야 관심이 쏠렸다. 그가 말하는 품으로 보아 구빨치라는건 금방 알았지만, 그 사건에 이렇게까지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저 단편적으로 들어왔던 그 사건의 전모를 알고 실었던 것이다. 그 동안 들어왔던 이야기로는 그들이 죽은 장소부터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무, 그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가 많은데 좀 자세히 들었으면 좋겠소. 어디 얘기좀 들읍시다." 손승호는 선요원 쪽으로 옮겨앉았다. "이, 전라도 사람치고 이약 한 자락 쌈빡허니 못허는 사람 옶고, 청해 받은 이약 마다허면 고것언 전라도 사람 자격이 옶는디, 더군다나 나가 하늘맹키로 생각허든 김지회 동지 일잉께 안헐라야 안헐 수가 옶제자잉. 긍께 머시냐, 미인박명에다가 영웅졸사드라고, 김지회 동지가 시상떠나뿐 것이 똑 그 짱이요. 그 적에 홍순석 동지할라 항꾼에 죽어 부렀시니, 두 지리산 영웅이 참말로 물거품 꺼재대끼 허망허니 죽어뿐 것이요. 을매나 허망허니 죽어뿌렀는지 이약 들어봇씨요. 그날이 양력으로 사월이라 초아흐렛날인디, 김지회 동지넌 부하덜얼 델꼬 전북도당 야산대럴 지도허니라고 덕유산에 갔다가 지리산으로 들어오든 참이었제라. 비밀선얼 타고 반선 마실꺼정 와서, 은제고 그리혔던 것맨치로 마실 뒷짝으로 멀찍허니 떨어져 앉은 그 고정세포 아지트로 들어스지 않었겄소. 그집 쥔년이 희반닥 웃음시로 반가워라 헌 것이야 전허고 달븐 것이 하나또 옶고, 믿거라 허는 오래된 세폰께로 밥얼 싸게 허라고 일르고 다덜 방으로 들었제라. 걸어온 질언 멀제, 밥때넌 늦었제, 모다 곤허고 배가 고프기가 거지 삼시랑이 따로 옶는 판이었제라. 근디 암만 기둘려도 밥이 안나온단 말이요. 그려서 쥔년얼 불러 밥이 워찌 됐냐 물은께, 쥔년 허는 대답이, 지끔 불얼 때고 있는디 낭구가 안몰라 그런다, 그것이요. 싸게싸게 허라고 혀놓고 또 이제나 저네나 기둘려도 밥이 나와야제라. 또 쥔년얼 불러 잡진께, 그년이 눈물얼 찍어냄스로 허는 말이, 요리 눈물 짜감서 생짜배기 낭구 부지런히 때고 있응께 쪼깐 더 기둘려라. 낭구가 그 모양인 디다가 쌀얼 많이 안치다봉께 밥이 더 늦어진다. 긍께 정 시장허먼 잔치에 쓸라고 담군 술이 있응께 먼첨 한잔썩 허는 것이 워칳겄냐, 아 요랬단 말이제라. 하아! 빨치산에 술이 극약인 것이야 하늘 천 따 지고, 고것얼 귀닳게 갤친 사람이 바로 김지회 동진디, 그때 고것이 허방인지 착 알아묵고 그 백여시 꼬랑댕이럴 잡아챘어야 헐 것인디, 와하! 무신 잡귀가 씌었든지 그러던 못허고 그 백여시 꾀에 넘어가 술얼 받아묵고 말었소. 그러니 워찌 됐을 것이요. 몸언 곤헌 디다가 빈속에 술이 들어간 판이니 관우 아니라 장비가 당허겄소? 보초도 멋도 웂이 다 곯아떨어져뿐 것이제라. 근디, 알고 보면 술얼 마시기도 전에 또 한 가지에 속힌 것이오. 고것이 먼고 허니, 낭구가 안 몰랐다고 혀서 생솔가지럴 때게 냅둔 것이오. 생솔가지럴 때먼 내가 을매나 지독스럽게 나오요. 고것이 바로 신호였드라 말이오. 그 내럴 보고 아랫동네서 두 놈이 토벌대헌테 연락얼 한 것이오. 토벌대가 들이닥쳤는디, 더 말혀서 멋허겄소. 그 자리서 열여섯이 죽고, 일곱이 달아나다가 잽혔는디, 결국에넌 다 총살당혔제라. 김지회 동지가 총얼 맞고 그 자리럴 피허기넌 혔는디, 거그서 이십리 떨어진 연장 골짝에서 죽었시니 다 소양웂는 일이 되야뿌렀소. 그 개잡년이 변심혀갖고 토벌대허고 내통험시로 허방얼 파놓고 딱 기둘리고 있었던 것이요. 사람이란 것이 그리 무서운 즘생이요. 좌우당간 그 연눔 셋이서 우리 동지럴 시물넷이나 죽였시니 우리가 워째야 쓰겄소. 고 개잡녀러것덜이 호강날라리로묵고 살게 냅둘 수야 웂는일 아니겄소! 고것덜이야말로 동지덜에 웬수고, 인민에 적인디. 그려서 결사대럴 짰소. 세 연눔얼 잡아다기 지금까지 헌 이약대로 다 실토받고, 죽였제라! 고런 잡것덜언 총알이 아까와 돌로 쳐죽였제라. 그려도 분이 안삭아 갈가리 찢었제라. 그라고 시범쪼로 돌팍 우에 넣었제라." 선요원은 목이 잠기며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손승호는 물에 입을 들이대고 물을 벌컥벌컥 넘겼다. 그의 귀에는 멀어져 있던 물소리가 다시 세차게 밀려들고 있었다.
다시 노고단을 향해 길을 잡았다. 서로의 거친 숨소리만 들으며 오르막길의 강행군이 계속되고 있었다. 손승호는 선요원이 했던 말을 곱씹어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선요원의 말은 단순한 체험담이 아니라 살아 있는 투쟁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귀한 경험자들에 의해 투쟁사는 이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생생한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엮고 싶은 의욕을 느끼고 있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 다리를 쉬게 되었다. 어느 사이엔가 겹을 이룬 산봉우리들이 눈아래로 펼쳐지고 있었다. 손승호는 사방으로 눈길을 돌리며 지리산의 모습을 살펴나갔다. 한 시간 정도의 노동을 바쳐 얻은 대가치고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동무, 지리산을 보는 기분이 어떠시오?" 어느새 담배를 말아피운 박두병이 석양 햇빛을 받고 앉아 물었다. "글쎄요, 아직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럴 거요. 인제 시작이니까." 박두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먼이라. 요것 쪼깐 보고 지리산이 어쩌니 저쩌니하는 것이야 순전 헌 그짓말이제라. 노고단에나 올라야 갱신히 문턱 넘어스는 것잉께요." 선요원이 말을 보태고 있었다.
노고단까지는 두어 시간이 넘게 줄창 걸었다. "기왕지사 걸음헌 것잉께 해 떨어지는것얼 귀경혀야제라." 앞장선 선요원이 걸음을 서둘러댔던 것이다. "옛사람들 말로 지리산 십경에 노고원해, 반야낙조라고 했는데 그리 급할 것 없잖겠소?" 아주 느긋한 박두병의 말이었다. "말이야 필경 그렇제라. 근디, 날이 은데꺼정 요리 말끔허다는 보장이 웂는디라? 지리산 칠팔월이야 요리 깨끔허다가도 은제 먹구름 깜깜허게 찔란지 몰르는 일 아니겄는가요?" "그야 그렇소. 여름 지리산 날씨야 시시각각 변하는 거니까." 박두병이 물러서고 말았다.
그래서 선요원의 걸음은 줄달음질치듯하게 되었다. 세사람 다 산을 타는 데는 이골이 나 있으면서도 선요원의 발길을 따라잡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고단에 오르는 순간 그들이 마주친 것은 커다랗게 둥근 불덩어리였다. 상상하기 어렵게 큰 그 불덩어리는 해였다. 해는 하늘 가운데 떴을 때보다 열 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하늘끝에서 떨어져내리기 직전인 해는 스스로의 몸을 그렇게도 크게 키워 하루를 마감하는 모습을 찬연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해는 서쪽 하늘을 스스로의 빛으로 온통 붉게 물들여 자신의 모습을 떠받치게 하는, 세상에서 제일 큰 휘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휘장의 붉은색은 생기 퍼득이는 광채와 윤기 반짝이는 채색으로 싱그럽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해는 하늘을 그리고 곱고 아름답게 물들이느라 제 빛을 다 써버려서 그러는 것일까, 하늘 가운데 머물 때는 눈이 시다 못해 눈물이 나도록 강한 빛을 내쏘아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더니만 이제는 그 빛을 거두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한낮의 해는 작으면서 맵고 거만했는데, 저물녘의 해는 크고 부드럽고 친근했다. 노고단이 장만해놓은 하늘은 사람의 눈을 감당해낼수 없도록 넓고도 넓었다. 그 서쪽을 물들인 휘장만으로는 모자라는 것인지 해는 무슨 큰 깃털들처럼 옆으로 뻗친 구름층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엷고 가볍게 뜬 구름들도 층층이 붉게 물들어 찬란한 색조로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불덩어리는 이글거리는 황금빛 몸을 아래서부터 느리게 느리게 감추어가고 있었고, 그 주변의 하늘은 커다란 황금빛 동그라미를 그리며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이 엷어지는 데서부터 황적색으로 물들고, 황적색이 엷어지면서는 청적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자연스러운 빛의 변화와 조화를 따라 구름의 층도 색감을 달리해가고 있었다. 손승호는 어디론지 잠겨들고 있는 그 신비스러운 불덩이와, 현란하고도 황홀한 빛의 채색화를 그리고 있는 낙조를 넋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른 세 사람도 긴 그림자를 하나씩 단채 해를 향해 굳어진 듯 서 있었다.
마침내 해가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하늘을 물들였던 색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해를 에워싸고 있던 커다란 황금색 바탕이 옆으로 넓게 퍼지면서 황적색과 섞이고, 황금색이 묽어지자 하늘은 더 붉게 물들었다. 하늘은 이제 온통 붉은 색조의 바다였다. 그 붉은 색조는 살아서 뛰는 빛으로 넘치고, 그 빛들이 부딪쳐 불꽃을 일구고 이었다. 그래서 하늘은 마침내 불붙어 타고 있었다. 구름들도 그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면서 자취를 감춘 해가 쏘아올리는 빛살을 받아 구름들의 아랫부분은 눈부신 흰빛으로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들은 열도높은 흰빛을 발산하는 발광체가 되어 있었다.
해가 사라져간 그 언저리에서 뻗어오르는 빛살이 차츰차츰 약해지면서 하늘을 뒤덮은 붉은 색조에서도 싱그러움과 싱싱함이 서서히 사그러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황적색이 적색으로 변해 하늘은 더욱 붉은 빛으로 칠해졌다. 그 진해진 붉은 빛은 이제 불길이 아니었다. 불길이 잦아든 그 진한 붉은 빛은 환상적인 핏빛이었다. 하늘은 처연한 핏빛으로 물들어 침묵하고 있었다.
아, 저건! 손승호는 가슴을 쳐오는 충격을 느꼈다. 저건... 지리산에서 죽어간 수많은 동지들의 넋이 아닐 것인가! 한이 아닐 것인가! 그 생각이 들자 그는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한참만에 떴다. 노을은 그대로 핏빛인 채 가장자리가 적보라빛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듯 웅장하고 장엄하고 기질리는 노을을 여지껏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산으로 막힌 좁은 하늘의 규모 작은 노을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노고단은 하늘을 있는대로 다 열어주고는, 그 넓은 하늘에 해가 그려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찬란하고, 가장 황홀한 그림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안개가 골짜기를 자욱하게 채운 산중턱에서 해돋이 직전의 아침노을을 보며 솥뚜껑은 그런 경치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차라리 죽고 싶었다. 황홀하고, 현란하고, 아름답다 못해 기가 막혀버리는 자연의 그 신비로운 조화 앞에서 말을 잃은 감동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죽음의 충동이었다. 어느 화가가 있어 저 기막힌 빛의 조화와 변화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려놓은 것은 흉내일 뿐, 진정으로 그리고자 한 자는 끝내 절망하여 죽고 말 터였다. 그가 진정한 화가가 아닐까. 또한, 무슨 말이 있어 저 노을을 글로 표현할 것인가. 그 시도는 화가보다 더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른다. 그림은 보다 자연에 가깝지만 말은 전적으로 인간들끼리만 사용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손승호는 그건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음만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 우리 강토가 이토록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을 이제야 알다니...
노을의 가장자리에서 생기기 시작했던 적보라색은 점점 안쪽으로 퍼지고 있었고, 처음의 적보라색은 청보라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노을은 윤기를 잃어가며 서서히 사위어 들고 있었다. 엷게 뜬 구름들도 어느새 그 눈부시던 흰빛의 현란함을 잃고 회백색으로 칙칙하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겹겹이 물결 이루며 뻗어나가고 있는 먼 산들도 서로의 그림자에 묻혀가며 어슴푸레한 기운에 잠기고 있었다. 어둠살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시요들?" 선요원이 기지개를 켜며 오랜 침묵을 깼다. "아 참, 언제 봐도 장관이오." 박두병의 말이었다. "와따 참말로 기맥혀뿌요. 정신이 다 어질어질허요." 연락병의 말이었다. "손 동무넌 으쩌요?" 손승호가 말이 없자 선요원은 자기에게 일행의 감상을 다 들어야 하는 책임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승호에게 독촉했다. "아무 할말이 없소." 손승호의 입에서 나온 무뚝뚝한 소리였다.
"잉, 고것이 질로 잘헌 답인지도 몰르겄소." 선요원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떡끄떡하고는, "싸개 샘터로 내래갑시다. 해가 떨어졌다 허먼 금세금세 어두워진께로." 그는 서두르는 몸짓으로 앞장을 섰다. "옛사람들이 왜 낙조는 반야봉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 줄 알겠소?" 박두병이 배낭을 지며 손승호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거...잘 모르겠는데요." 손승호가 멋적게 웃었다. "그거 아주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요. 반야봉은 그 높이가 천왕봉 다음이고, 여기 노고단보다는 이백오십 미터 정도가 더 높아요. 그래서 동쪽에서 제일 높은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아야 한다고 천왕일출이라고 했고, 서쪽에서 제일 높은 반야봉에서 낙조를 보아야 한다고 반야낙조라고 한 겁니다. 그리고 사실 높이가 이백오십 미터나 차이나는 반야봉의 낙조와 노고단의 낙조가 같을 수가 없지요. 높이 이백오십 미터 차이에서 오는 서쪽의 전망이 달라지니까요. 높을수록 더 멀리, 더 넓게 보일 수 밖에 없는데, 오늘같이 맑은 날이면 반야봉에서는 바다 가까이까지 보입니다. 그 낙조를 즐긴 옛사람들의 관찰이 예사는 아니었지요." "그렇군요..."
어둠이 묻어오는 내리막길을 걸으며 손승호는 이번 행보에서 자신이 해야 할 "관찰"이 무엇일까를 언뜻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박두병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샘터에 이르렀을 때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선요원이 쌀을 꺼내고, 손승호와 연락병은 나무를 구하러 나섰다. "동무덜, 낭구넌 요것저것 개릴 것 웂이 닥치는 대로 해오씨요. 밤이 되기 시작헌께 내가 나도 암시랑 알고, 여그서넌 모닥불얼 피와도 뎀빌 개덜이 웂소." 선요원이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참 희한하군요. 이 높은 산에 이리도 물이 많이 흘러나오는 샘이 있다니." 밥을 먹고 나서 냄비를 씻으며 손승호가 말했다.
"항, 명산잉께라." 선요원의 대꾸는 간단했다. 손승호는 그저 웃었다. 천오백 미터를 헤아리는 산꼭대기 언저리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로는 그 이상의 말이 없다싶었던 것이다. "요 샘이 노고단 보물인디, 노고단언 또 요것 땀시로 숭악헌 꼴 당허기도 혔소. 노고단이 빡빡 중대가리로 큰 나무 한나가 웂는 것이 워째 그런지 아요? 요 샘물 찾어 구빨치덜이 여그에다 트럴 장만허는 것이야 당연지사 아니겄소? 이 골짝, 저 골작으로 빠지기도 좋고, 붙기도 존 고지기도 허고라. 그래논께 개덜이 우리 잡겄다고 요 넓은 노고단에다 싹 불얼 질러뿌렀소. 잡녀러새끼덜, 일본눔덜언 천왕봉 아래 장터목에 슨 산신령을 넘어뜨려 골짝으로 내리굴리등마, 인자 친일민족반역자덜언 명산 꼭대기에 불얼 질르고 염병이오." 선요원의 명확한 역사 파악에 손승호는 문득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아까부터 불탄 흔적들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해 뒤늦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높은 산 꼭대기에서까지 인민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산까지 불에 휩싸이는 수난을 겪는 그때에 자신은 역사의 현장에서 비켜서 있었던 것이다.
"보초 슬 것 웂지 않겄는게라?" 잠자리를 잡으며 선요원이 박두병에게로 물은 말이었다. "필요없으면 그냥 자는게 더 좋지요." "개덜이 여그꺼지 올라붙을라먼 당아당아 멀었구만요. 두 동무넌 두다리 쭈욱 뻗고 늘어지게 자뿌씨요. 빨치산 팔자에 보초 안스고 편안허니 자보는 것도 큰 복일 것이요." 선요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보초를 안서도 되는 밤을 손승호는 입산하고 처음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총을 겨드랑이에서 떼어놓지는 못했다. 지리산의 별들을 올려다보고 누워 오랜만에 집 생각을 하다가 그는 깜빡 잠이 들었다.
손승호는 누가 흔들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은 아직 안개가 낀 듯이 흐리칙칙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팔을 뒤로 한껏 젖히며 숨을 깊이 들이켰다. 옷은 이슬에 함뿍 젖어 있었지만 몸은 가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깊이 잔 단잠이었다. 그들은 차례로 샘물을 마셨다. "이 샘얼 선도샘이라고 허요. 우리넌 그냥 노고단 빨치샘이라고도 허고요." 선요원의 말이었다. "욕심도 많소. 인민샘이라고 하면 몰라도." 박두병의 말에 선요원은 큭큭큭 웃었다. 그들은 노고단 정상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비탈길을 오르는 선요원의 발길은 빨치산답지않게 느렸다. 그러니 뒤따르는 사람들의 발길도 거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느리게 걸으면서 무슨 노래를 나직하게 부르고 있었다.
여수는 항구였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꽃피는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봐도 옛날을 불러봐도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비만 내린다.
구슬픈 음조의 노랫소리는 흐려져가는 어둠살을 타고 고산의 새벽 공기 속에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저게 무슨 노랜지 아시오?" 박두병이 손승호에게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저게 여순 이후 구빨치들이 지어 부른 노래요." 손승호는 그때서야 선요원이 빨치산 노래 같지 않은 그 노래를 부르는 이유와, 그 노래가 왜 그리 구슬픈 가락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감이 서린 가사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노고단 정상에 이르는 동안 어둠은 다 걷히고 싱그러운 새벽의 대기속에 하늘과 산의 건강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경쾌한 새소리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풀잎들이 이슬에 함초롬히 젖었고, 어떤 잎에는 맑은 구슬처럼 방울방울 맺혀 있기도 했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왔다. 녹음의 푸름을 묻혀온 것처럼 싱싱한 그 바람결에 나뭇잎이며 풀잎들의 잔물결을 이루며 가볍게 흔들렸다. 어둠에 묻혀 있던 자연의 생명들이 마침내 하룻밤의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손승호는 애써서 불타버린 노고단의 모습을 보지않으려고 했다. 불타다만 큰 나무들의 뼈대 앙상한 모습은 사람의 해골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살벌하고 끔찍스러웠다. 그러나 그 황량한 땅에서도 풀들은 다시 돋아나 푸르고, 나무들도 잔가지들을 뻗쳐 올리며 초록의 잎을 매달고 있었다. 식물의 생명력을 닮을 일인 것이다! 그건 산에 들어와서 깨달은 것이었다.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선 소나무를 보면서, 바위 사이의 한줌 흙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패랭이를 보면서 가슴 깊이 느낀 바였다.
"어허! 또 눈이 호강허게 생겨뿌렀네. 짚었다 허면 명당이시." 앞장선 선요원이 노고단으로 올라서며 감탄스럽게 토해내고 있는 말이었다. 뒤따라 정상에 발을 디디는 사람마다 탄성을 질렀다. 동쪽 하늘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침노을이었다. 어제 본 저녁노을보다 붉은 기운이 더 진하고 넓게 퍼져 있었다. 황금빛 찬란함이 덜한 대신에 붉은 기운은 펄펄 살아서 넘치고 있었다. 아침의 해맑은 대기와 함께 그 붉은 기운은 풋풋한 생명력으로 부풀고 있었고, 싱싱한 활력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제의 저녁노을에서 느낄 수 없었던 꿈틀거리고, 용솟음하는 것 같은 생동감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손승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생빛이 살아서 뛰는 붉은 기운은 일렁거리며 불길로 타고, 출렁거리며 물결로 솟고 있었다. 그 선혈의 붉은빛을 밀어올리며 황금빛 빛살이 뻗어오르고 있었다. 그 황금빛살은 붉은색조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붉은빛은 황금빛과 섞이면서 더 싱싱하게 살아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저녁노을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아!..." 손승호는 감탄의 소리를 신음처럼 흘리고 있었다. 해는 어제의 해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어제의 해가 불덩어리는 불덩어리이되 타는것은 정지한 불덩어리였는데, 아침의 해는 일렁거리는 불길을 온몸에 달고 이글이글 타고있는 불덩어리였다. 그래서 어제의 해는 정교하게 동그랗고 그 색깔도 붉은 기 섞인 황금빛이었는데, 지금의 해는 정교함이 없는 동그라미이면서 그 색깔은 눈이 시린 순황금빛이었다. 어제의 해는 마주 바라볼 수 있었는데 오늘의 해는 마주 바라 볼 수 없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하늘을 물들인 붉은 기운에서 넘치던 생명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손승호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해가 솟아오르면서 퍼져나온 햇살이 일시에 천지에 가득 차며 하늘이고 땅이고 한덩어리로 붉게 물들었다. 나무란 나무, 바위란 바위, 풀이란 풀, 타다 남은 남은 나무의 잔해까지도 붉은 기운에 젖어 있었다. 지리산이 온통 붉게 물들어 해 앞에 숨죽여 읍하고 있었다. 그리고 햇살은 나뭇잎이며 풀잎에 샅샅이 스미고, 고루고루 뿌려져 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 모두가 반짝반짝 빛나는 영롱한 구슬이 되게 해놓고 있었다.
그 장엄하고도 경건한 신비스러움 앞에서 손승호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축감과,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경이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옆에 선 동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도, 몸도 전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친 얼굴은 더 거칠어 보이고, 남루한 옷은 더욱 남루해 보였다. 당신들은 그런 몰골로 왜 이 높은 산 위에 서 있는가. 나는 또 왜 이렇게 서 있는가. 당신들과 나, 우리는 서로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가 뜻이 같아 만나게 되었고, 그 뜻을 함께 이루어나가기 위해 서로의 생명을 함께 지키며 싸우는 동지가 되어 이 자리에 서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혁명이다. 역사의 해를 만들고자 하는것이다. 그렇다. 혁명은 역사의 해다. 해가 세상 만물에게 평등한 생명을 부여하고, 평등한 생존을 보장했듯이 혁명은 인간의 평등한 역사를 창조하고,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삶을 보장한다.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인간으로 태어나 한목숨 바쳐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역사의 해를 만들어내는 날, 이 거친 얼굴들, 이 남루한 모습들은 그 얼마나 자랑스럽고도 눈물겨우랴. 그리고 그때 다시 보이는 해돋이는 얼마나 더 가슴 벅착 감격적이랴. 손승호는 목메임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해는 높이 떠오를수록 크기가 작아지면서 붉은 색조도 사위어져갔다. "저 해 아래 솟은 것이 천왕봉이오." 박두병이 팔을 뻗어 가리켰다. 손승호는 해 아래 삼각뿔로 솟은 무게실린 봉우리를 눈에 넣고 있었다. 그 거리는 꽤나 멀어 보였다. "인자 운해요오. 모다 뒤로 돌아습시다아." 아침 햇살을 받고 새 기운이라도 돋은 것인지 선요원이 흥이 얹힌 소리를 길게 뽑았다. 몸을 돌려세운 손승호는 다시 감탄을 입에 물었다. 눈앞에는 구름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새하얀 구름이 끝없이 넓은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구름바다 위로 산봉우리들이 붕긋붕긋 솟아 크고 작은 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안개 자욱하게 낀 섬 많은 남해를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 같았다. 질펀한 구름 위로 솟은 산봉우리들은 안개 가득 찬 들녘의 초가지붕들 같기도 했다. 운해는 바람결을 타고 구름깃들을 뭉클뭉클 피워올려 구름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구름파도들은 햇빛을 받아 위는 맑은 흰빛으로 빛나고, 아래는 제 그림자를 드리워 아주 세찬 파도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 구름파도들은 바람결을 타고 쉼없이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뭉클거리며 더 크게 피어오르기도 하고, 어느 것이 갑자기 가라앉으면 새 것이 솟기도 하고, 서로 엉키듯밀리듯 하기도 하는 그 수많은 구름파도에서는 정말 쏴아쏴아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바다를 이루고 있는 흰 구름은 어찌나 농밀한지 그 위를 걸어 붕긋붕긋 솟은 산봉우리들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름바다 위로 솟은 산봉우리들은 그래도 높은 축에 드는 것이었다. 낮은 봉우리들은 모두 구름 밑에 잠겨 흔적이 없었다. 어느 산봉우리로는 구름파도가 밀려올라가기도 했고, 어느 산봉우리에서는 밀려올라간 구름파도가 갈기를 나부끼며 밀려내려오기도 했다. 바다가 그러하듯 구름파도도 살아서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운파만리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로군, 생각하며 손승호는 빈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는 "장관"이라는 말이 너무 단순한 의미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구름만 모아서는 의미가 없으니까 두 동무한테 산들을 좀 설명하는 것이 어떻소?" 박두병이 선요원에게 말했다. "그러제라. 산 이름얼 암스로 보먼 더 맛나제라. 글먼 아까맹키로 뒤로 돌아스씨요." 손승호와 연락병은 시키는 대로 했다. "천왕봉언 아까 알았을 것이고, 거그서 왼쪽 옆으로 쪼깐 틀어서, 이, 쩌그 저 아시무락허니 산꼭대기가 서너 개 맞붙은 것맨치로 된 것 있제라? 아, 뵈요, 안 뵈요!" "이, 뵈요." 선요원이 어조에 맞우어 손승호가 힘을 꽁 쓰며 대답했다. "고것이 바로 덕유산이오. 더 확실하게 말허자면 남덕유요. 그라고 잔잔헌 것덜이야 덮어두고, 눈얼 팍 끌어댕겨 코앞얼 보면, 폴짝 뛰어올라앉을 수 있을 것 겉은 저것이 반야봉, 다시 뒤로 돌아서서, 이, 동작이 빨른께좋고, 쩌그 저 똑바라지게 뵈는 디에 두리 뭉시릴 생겼음시로 질로 높은 것, 고것이 광주 무등산이고, 거그서 쪼로록 왼짝으로 돌아스먼, 무등산허고는 반대로 뾰쭉허니 싸납게 생긴 저뽈록헌 산, 저것이 광양 백운산이오. 요 정도로 알아두면 학습이 된 상불르요." 선요원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을 훔쳤다. 박두병은 돌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표시였다. "워쨌그나 두 동무가 참 복이 많으요. 넘덜언 한 행보에 한 가지 보기도 에로운디, 두 동무야 한 행보에 시 가지나 봐부렀응게." 선요원이 쌈지를 꺼내며 말했다. "그 존 것얼 넷이서만 본께 영판 아깝구만이라." 말수가 적은 연락병이 한마디했다. "해방의 날이 오면 인민들하고 다 함께 다시 보도록 합시다." 박두병이 구름바다를 바라본 채 힘주어 말했다. 햇발이 강하게 퍼지기 시작하면서 구름바다는 꼭 거짓말처럼 빠르게 썰물이 되고 있었다.
구름들이 얼크러지고 설크러지고, 휘감기고 꿈틀거리면서 어딘가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운해가 낮아지는 만큼 산허리들이 드러났고, 새로운 봉우리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풀잎에 맺혔던 이슬들도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저 구름들은 남해에서 일어나 여기로 몰려든 것이오." 박두병이 몸을 일으키며 손승호에게 말했다. "예, 그렇군요. 구름들이 저리 움직이는 게 꼭 무슨 함성 같습니다." 손승호는 무심코 대답했다. "함성! 함성이라고 했소?" 박두병이 달라진 눈빛으로 손승호를 쳐다보았다. "예, 함성. 여러 사람들이 질러대는 소리 말입니다." "아, 좋소. 그것 참 좋소." 박두병은 손뼉을 치며 반색을 하고는, "역시 손 동무는 남이 느끼지 못하는 걸 감지하는 능력이 있소. 바로 그런 관찰을 하길 바라고 있었소. 그런 관찰을 동원해서 손 동무가 지리산에 대해 글을 좀 써야겠소. 그 동안에 우리가 상황이 나빠 도당신문을 제대로 발간하지 못하지 않았소? 이제 형편이 안정도 되고, 여기 종이공장에서 나오는 종이도 충분하니까 신문을 본격적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그 말이오. 거기에 손 동무가 우리의 투쟁과 지리산에 대해서 글을 좀 써야 되겠소." 손승호는 그때서야 이번 행보에서 자신이 해야 될 "관찰"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여기에 종이공장이 있다고요?" 손승호는 자신의 임무를 생각하기 전에 박두병의 말에 대한 놀라움부터 먼저 나타냈다. "뱀사골에 종이공장도 있고 정미소도 있소. 물론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설치한 건 아니고, 수공업적인 것이긴 하지만 말이오. 그래도 우리가 필요한 정도의 종이는 생산해 내고 있소." 박두병은 달궁골에 탄약창과 당학교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탄약창은 통신설비와 함께 일반대원이나 평당원들이 알 필요가 없는 기밀사항이었고, 당학교라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개설이 어렵지 않은 별로 특이할 것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승호는 수공업적인 종이공장이나 정미소에 대해서는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빨치산 중에는 여러 가지 직종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으니까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기술노동자가 없을리 없었고, 또한 한지 만드는 기술자도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목수가 있으면 계곡의 많은 물을 이용해서 물레방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구름이 걷히자 산들의 무리가 드러났다.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무리를 이룬 산들이 각기 높낮이가 다르게 겹겹이 포개지면서 하늘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구름의 바다가 사라지자 산의 바다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그 바다에는 지리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리산이 보듬고 품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에다가, 노고단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수많은 산들이 한눈에 다 보이고 있었다. 서로 업고 업혀 억세게 뻗어나가고 있는 산들은 층층이 그 색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가까운 데서 멀리까지, 그 색깔은 진한 초록에서부터 시작해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점점 엷여지는 초록으로 바뀌어가면서 하늘 끝에 이르면 아슴푸레한 회색빛이 되고 있었다. 산들은 온갖 초록빛 잔치를 꾸며놓고 있었다.
"자아, 보기만 해서는 잘 모를 테니까 내가 설명을 하겠소." 박두병이 손승호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연락병도 박두병 가까이 다가섰다. "지리산은 너무나 크고 넓어 어느 지점에서도 한꺼번에 볼 수가 없소. 천왕봉에서 이 노고단까지만 해도 백리가 넘소. 그러니까 지라산은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고, 그 부분도 골짜기 중심으로 나눠서 봐야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소. 자아 그럼, 오른쪽으로 돌아서서 우리가 올라왔던 골짜기서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왼쪽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트를 잡고 있는 뱀사골은 저 반야봉에 가려 보이지 않소. 반야봉 바로 아랫골짜기가 뱀사골이오. 반야봉과 이 노고단 사이의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계곡이 어제 우리가 타고 올라온 심원계곡이오. 흔히들 달궁골이라고 해버리는데, 골짜기가 너무 길고 휘어져 여기서 보이는 건 심원계곡뿐이고, 그아래로 계속 이어진 달궁골은 안 보이오. 그러니까 한줄기 골짜기에 지명을 따라 두 개의 이름을 붙인 셈이오. 그리고 저기 반반하게 잘생긴 봉우리가 만복대요. 여기서부터 만복대 아래로 쭉 뻗어내리고 있는 산줄기가 지리산 서북능선이오. 그 왼쪽으로 넓게 퍼진 골짜기가 보이지요? 그게 삼성재골이오. 그 옆으로 좁장하게 뻗어내린 것이 천은사골이오. 그리고 조금 더 왼쪽으로 돌아서서, 저기 산줄기가 좀더 억세 보이는 그 아래 계곡이 화엄사골이고, 저 앞에 바로 내려다보이는 게 문수리골이오. 저 피아골과 문수리골 사이로 뻗어내리고 있는 산줄기가 지리산 서남능선이오. 이렇게 되면 노고단에서 볼 수 있는 여섯 개의 골짜기를 다 설명한 셈이오. 어떻소. 내 설명이 틀린 데는 없소?" 박두병이 선요원을 쳐다보았다.
"와따, 쪼로록허니 뀌시는 것이 총기도 좋고, 눈썰미도 좋구만이라. 여그서 투쟁허신 지도 이년이 넘으셨을 것인디라." 선요원이 과장되게 혀를 내둘러 보였다. "그럼 지리산에는 저런 골짜기들이 몇 개나 됩니까?" 하나의 산줄기에도 수십 개의 봉우리들이 이어지고 있는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손승호는 박두병에게 물었다. "큰 것으로만 스무 개 정도 될 거요." "그럼, 박 동지께서는 그 골짜기들을 다 다녀보셨습니까?" "아이고, 어림없는 소리요. 난 주로 이쪽에서만 투쟁했고, 이쪽에서도 발길을 못해본 골짜기도 있소." 박두병은 고개와 손을 함께 내저었다. 그리고 선요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르겠소. 저 동무는 다 다녀봤는지." "와따메, 택도 웂소. 지리산서 포도시 사오년 살아갖고 지리산 아흔 아홉 골짝얼 지가 무신 수로 다 안당가요. 말이 시무개제. 한 골짝에도 샛골짝이 쌔고 쌨고, 그 샛골짝이 또 새끼럴 쳐서 수십 개가 되는 판인디 워떤 장사가 고것얼 다 알 것이요. 세석평전에 약초 캠스로 평상얼 지리산서 사신 영감님이 기신디, 그 영감님 말이 자기도 지리산 골짝골짝얼 다 몰른다고 그럽디다. 긍께로 나겉은 겉이야 반봉사로 그냥 둔전기리고 댕기는 것이제라." 그리도 길은 잘 찾아 노고단까지 왔던 선요원의 말이었다. 손승호는 그 말이 결코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휘둘러 볼 수 있는 여섯 개의 골짜기들만 해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 네배 가까운 골짜기들이 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전체의 규모는 상상으로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사람의 몸뚱이와 비교를 할 때 지리산의 크기는 상상의 밖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가보도록 합시다. 마침 노고단에서 볼 것을 거의 다 봤으니 반야봉엔 오르지 말고 뱀사골로 빠지는 게 좋겠소. 아침 겸 점심을 임걸령에서 해먹고 말이오." 박두병이 선요원에게 말했다. "그러제라. 임걸령꺼지 가자먼 시장허실 것인디 싸게 뜨십시다." 선요원이 동작이 빨라졌다. 그들은 천왕봉 쪽으로 뻗은 주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길은 거의 평지에 가깝도록 평탄했다. 그들에겐 그런 길이 오히려 걷기가 거북했다. 오르막, 내리막, 비탈에 익숙해진 그들의 다리는 평탄한 길을 낯설어하며 더듬거렸다. 능선에서 큰 나무들이 별로 없었다. 산이 높아 바람을 많이 타는 큰 나무들은 능선에서 견디기 어려운 탓일 것이었다. 진달래와 철쭉나무들이 많았고, 다른 잡목들과 억새풀들이 뒤섞여 있기도 했다. 어떤 곳은 산죽밭이 펼쳐져 있기도 했다. 그런 지점에서는 왼쪽이나 오른쪽 중에 어느 한쪽으로는 끝없이 겹을 이루며 뻗어나가고 있는 산의 물결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능선길을 약간만 벗어나 비탈길을 접어들게되면 금방 수림에 파묻히게 되었다. 그런 숲속에서는 햇발을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돼지평전을 지나다 넓은 철쭉나무밭이 펼쳐졌다. 그 옆으로는 싱싱하게 자라난 억새풀들이 또 밭을 이루며 사람의 키를 넘고 있었다. 그 한 옆에 누가 손질을 해놓은 것처럼 잔디밭이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잔디밭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바로 내려다 보이는 게 피아골이오. 그리고 저 산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물줄기가 섬진강이고." 박두병이 손가락질하며 설명했다. "그럼 저 멀리 솟은 게 백운산인가요?" 손승호는 정면을 가리켰다. "잉, 딱 맞쳐뿌렀소!" 자기가 했던 학습의 효과를 반기기라도 하듯 선요원이 신바람을 냈다. 손승호는 산줄기들이 굽이치고 있는 저 멀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무등산과 백운산 사이에 들어서 있는 그 많은 산들 중에 조계산도 있을 것이고, 그 산 너머 육십리면 벌교였다. 늙은 어머니의 얼굴과 동생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완강하게 그 얼굴들을 의식 밖으로 몰아냈다. 부모와 형제가 아닌 자식들을 떼어놓고도 투쟁에 나선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염상진이 그랬고, 바로 앞에 있는 박두병이 그랬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엄걸령의 샘은 노고단의 샘에 비해 물길이 아주 가늘었다. 그러나 그 높은 능선에서 물이 졸졸거리며 나온다는 사실은 역시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 삼거리에서 피아골로 내려가게 되오." 박두병은 꼬박꼬박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 그런데... 앞으로는 지리산에서 투쟁하게 됩니까?" 손승호는 여지껏 마음에 담아왔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글쎄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거요. 지리산에 계속 머무른다는건 투쟁원칙에 어긋나고, 또 지리산은 최악의 상태에 빠졌을 때 선택하는 투쟁지일 뿐이오. 우리는 불리한 상황을 잠깐 피할 겸 휴식을 취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것 같소. 우린 휴식을 통한 전력강화도, 사상 재무장도 필요한 상태에 와 있소." 박두병의 신중한 말이었다.
"바람이 후덥찌그리헌 것이 워째 요상시럽네?" 밥을 먹으려고 둘러앉으며 선요원이 하늘을 휘둘러보았다. "내 느낌에도 날이 안 좋아질 것 같기는 같소." 손잡이 짧은 몽당숟가락을 든 채 박두병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길, 안 좋아져봤자 비 오는 것이제라. 시장허신디 싸게 드시씨요." 선요원이 태평스럽게 냄비 뚜껑을 열었다.
세 도의 분기점인 날라리봉에 이르렀을 즈음에 그들은 완전히 비구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지리산의 팔월이 보여주는 급격한 날씨 변화였다. "날씨가 빨치산얼 신선 맹글어주네. 신선이 구름 속에 산당께로, 신선이 따로 있간디. 우리가 신선이제." 빗방울이 듣는데도 선요원은 느긋하기만 했다. 사실 지리산 같은 데서 서둘러대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랜 산생활에서 얻은 그 느긋함과 묵직함이 손승호는 너무 믿음직스럽 고마움에 들었던 것이다.
비구름은 그 넓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말았다. 구름 속을 걸으면서, 구름 속에서 내리는 비를 맞았다. 비로 목욕을 하며 뱀사골 트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저녁밥 때였다. 지리산은 산이 산을 품고, 산이 산을 업고, 산이 산을 거느리고 있는, 그 크기도 모양새도 쉽사리 알 수 없는 미궁의 산이었다. 이것은 손승호가 배낭을 벗으며 한 생각이었다. 다음날부터 두 달 가까이를 손승호는 지리산에 대한 글쓰기로 일과를 삼다시피 했다. 처음 며칠은 한 줄도 쓰지 못 하다가 어찌어찌 시 한 편을 엮은 다음부터 여러 종류의 글을 써내게 되었다. 시와 기행문은 신문에 게재했고, 지리산의 구빨치투쟁을 그린 희곡으로는 덕유산 이후 처음으로 연극을 하게 되었다. 그런 여러 가지 글을 태연하게 써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손승호는 스스로 뻔뻔스러움이나 쑥스러움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빨치산으로 완성되어가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빨치산은 온갖 투쟁에서 불가능이 없는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